차가웠던 용비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자신의 차가운 심장에 그저 마음이 아팠다.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살며시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저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핑계만 나올 뿐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과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는 용비의 얼굴에 역시 얼굴이 굳어질 뿐이었다.
[……나를 우롱한 것입니까.]
[…….]
[좋으셨습니까? 나를 이리도 조롱한 것이!]
“……좋지 않았다.”
……누구에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그저 청룡은 조용히 입을 열 뿐이었다. 울려 퍼지듯 나오는 청룡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느냐…….”
눈물을 흘리던 용비에게 다가가서 안아 주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 주며 울지 말라며 달래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 너를 위한 것이었다 말해 주고 싶었다. 그저 그 여리고 작은 여인을 품에 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리 했다면 자신의 마음은 조금은 미안함을 덜어 낼 수 있었겠지만 그리하질 못했다. 마음은 그리 하라 외치고 절규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그로 인해 일어날 모든 일을 계산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하는 자신이 그 순간 너무나도 미울 뿐이었다. 두 눈을 조용히 감아 버린 청룡의 입에서는 미안함과 애절함이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다.
“……미안……미안…….”
[미리보기]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허나. 가족의 죽음을. 가족의 원한을 이대로 품은 채 죽고 싶진 않습니다.”
“……여인아. 나는 너를 죽이려 온 자가 아니다. 한낱 사신으로 나를 보려드는 게냐.”
……아니십니까? 되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수연은 이내 어지러움으로 바닥에 다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신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허상인 것인가. 죽을 때가 되어 허상을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었던가. 수연은 애써 붉은 입술을 열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정수연.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한 생을 애써 살았습니다. 쿨럭! 인생에 미련이 남았다 한들 남지 않았다 한들 이미 제게는 모든 것이 사라진 것들입니다.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소서.”
“…….”
“다만……아주 작은 바람이라면. 이 내 마음에 깃든 연민. 그리고 원한까지도. 모든 것들을 다 지울 수 있게 해주소서. 인생에서의 더럽고 추악한 것들에 이제 지쳤습니다. 쿨럭. 연옥으로 끌려간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이곳에 내려놓고 가게 해주소서…….”
두 눈을 굳게 다문 수연은 다시금 거친 기침을 하면서 핏덩이를 토해 내고서는 그대로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강하게 내려오는 빗줄기의 느낌이 온몸에 그대로 내려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렸던 탓일까. 어지러움과 고통이 강렬하게 몰아오고 있었다.
지쳤던 걸까.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사랑하는 정인의 얼굴이 회상되었다. 짙은 검은 머리에 부드러운 미소. 그를 위해 수를 놓으며 그를 생각하며 서찰을 보내고 받았던 아름다웠던 세월. 존경해 마지않았던 아버님. 인자하셨던 어머님.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따스했던 오라버니. 그리고 이렇게 원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정인의 가족들. 모든 것들이 허망했다. 이렇게 죽고자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데……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 곧 소녀 뒤를 따라가렵니다.
“…….”
두 눈을 감고 있는 수연을 한참이고 바라보는 소년은 굳게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미 어느 순간 끊어져도 이상치 않은 소녀의 생명이었다. 비록 그녀가 입은 창상은 목숨과 직결되어 있진 않았으나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그녀의 정신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소나기의 맞으면서 여린 소녀는 이미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고 있을 뿐이었다.
“……흐음.”
한참이고 굳게 다문 소년의 입술이 휘어지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가 가득해 보이는 눈빛으로 반짝이면서 빛나던 자줏빛의 눈동자는 다시금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내며 휘어지었다. 워낙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이었기에 그 미소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고 따스해 보이기까지 했다. 비록 속마음이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살려 줄게. 여인아, 너를.”
수연이 듣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오로지 그의 결정만이 중요할 뿐. 그의 눈동자는 재미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붉은 입술로 나지막하게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고 이내 검게 물들여지고 있던 소나기는 언제 내렸냐는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맑은 태양의 햇빛이 그와 그녀 그리고 시체들이 난자한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바닥은 이미 피로 잔뜩 고여 있는 웅덩이들만 가득 넘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그대에게는 덧없을 것이야. 그리고 분명하게 그대가 내게 말했지?”
소년이 가볍게 장포를 휘날리며 손짓을 하니 이내 피 웅덩이는 사라지고 새하얀 물웅덩이들만 남겨졌다. 바닥에 누워 있던 수연의 아비의 시신과 어미의 시신은 사라졌고 일가의 수많은 시신들은 마치 오랜 시간이 흐른 듯 퇴화되더니 이내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수연은 변화되고 있는 상황을 알고는 있는 걸까. 그저 수연은 조용히 두 눈을 감은 채 정신을 놓아 버린 상태일 뿐이었다.
“내 뜻대로 하라고 했다. 너, 후회는 하지 마.”
……뭐 후회는 내가 할지도 모르겠지만. 짧게 중얼거리던 소년은 이내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물어뜯었다. 분명 강렬한 고통이 일어날 법도 한데 소년의 얼굴에는 변화조차 없었다. 자연스럽게 누워 있는 수연의 입술로 향했다.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수연의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 떨어지며 수연의 입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참이고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가락을 수연의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한 듯 수연의 입 안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살며시 느껴지는 그녀의 혀는 본능적으로 들어오는 소년의 손가락을 감싸는 듯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새파랬던 입술은 다시 붉디붉은 입술로 돌아왔고 창백하다 못해 새하얀 피부는 이내 혈색이 돌고 있었다. 산발이 되어 있었던 짙은 그녀의 흑발은 따스한 햇살에 부드럽게 보랏빛이 빛이 나는 윤기 나는 머리로 변화하고 있었다. 소년의 입에서 살며시 흩날리는 주문은 그녀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고 이에 그녀의 온몸이 공명이라도 하는 듯 부드러운 바람이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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