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선비를 탐하다 1

지은이 : 서은수
표지 일러스트 : 래빗제이
펴낸곳 : 도서출판 가하
홈페이지 : www.ixbook.co.kr

copyright ⓒ 서은수, 2019
ISBN : 979-11-300-3430-0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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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너는 나를 우선순위 신붓감으로 고려해보겠다, 약조하였다!”
“그때는 자가의 신분을 몰랐기에 그리했던 것입니다.”
“공주면 달라지느냐? 어찌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느냐!”


그대가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다가갈 것입니다. 법도에 어긋난다 하였습니까? 내게는 그대가 법도이고 숨입니다. 그대가 웃어야 나도 웃고, 그대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나니. 내일 죽더라도 오늘 후회하지 않고자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것입니다.


“자가와 저는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냉정하십니다.”
“서운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이 열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혹여 그런 일이 생겨 자가 외에는 다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집을 부리면 어찌하시렵니까?”
“그럴 수는 있는 것입니까?”
“다가오지 마십시오. 자꾸 두드리지 마십시오. 품고 있는 감정을 몰아내시고 저에게는 손톱만큼의 마음도 내어주지 마십시오.”

작가 소개


서은수

▣ 출간작

공주, 선비를 탐하다
윈터 블루스
고백의 이유



1. 푸른달의 첫 만남


세상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든 푸른달 초순. 시원스레 반듯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몸집의 한 소년이 건장한 무사의 호위를 받으며 충청도의 어느 고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직 관례도 치르지 않았을 앳된 얼굴이지만 소년은 이미 상투를 틀어 갓을 쓰고, 흰색 도포에 쪽빛 쾌자를 말끔히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 외양이 어찌나 새뜻하면서도 맵시가 나는지, 근처를 지나던 고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흘끔흘끔 어린 선비를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체 뉘 댁 도련님이시랴. 옆 고을에서 온 분도 아닌 것 같은디.”
“저 귀티 나는 얼굴 좀 봐. 시상에, 성 진사 댁 애기씨보다 훨 곱구먼!”
“기여? 오메…… 몇 년만 지나면 여인네들이 밤잠도 못 자고 설쳐대겄어.”
소곤소곤 귀엣말을 주고받다 호호거리는 부녀자들의 속살거림이 곳곳에서 날아왔다. 봄날의 노곤한 오후, 일상에 지친 순진한 아낙들이 아름다운 외모의 어린 선비 하나를 눈요기 삼아 오후의 권태를 극복하는 것이리라.
고단한 여정의 끝, 막 발을 디딘 고을의 첫인상은 정겹고 순박했다. 낯선 곳에 들어서며 신경을 곤두세웠던 호위무사 치경은 눈매를 부드럽게 이완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마저 느끼게 하는 거구의 그였지만 어린 상전을 바라보는 두 눈엔 온화함과 자랑스러움만 그득했다.
“어?”
잠깐 경계를 늦춘 사이, 소년이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그새 흥미로운 것이라도 발견했는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옆길로 빠르게 나아갔다. 평소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소년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해 치경은 미소를 띤 채 뒤를 따랐다.
작은 저자가 형성되어 있는 고을의 번화가. 물건값을 흥정하는 데 정신없어야 할 장 안 사람들이 다른 일로 복작복작 시끄러웠다. 두 갈래로 나누어진 무리가 길가 양쪽 끝으로 각각 붙어 서서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어떠한 행렬을 주시했다. 인파가 한데 모인 복잡한 상황이라 치경은 그들을 헤치고 앞서 나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돌아왔다.
“노비들입니다. 이번 변란 때 참수된 자들의 일족과 그 사노들로 보입니다.”
“그렇군.”
구경꾼들에게서 크게 세 발짝쯤 물러나 있던 서율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지긋지긋한 피바람은 과연 언제쯤이면 멈추게 될는지. 저도 모르게 연상된 과거의 기억이 힘겨워 억지로 머릿속을 비우는데 가까이서 또랑또랑한 여자아이의 음성이 들렸다.
“그럼 저들은 모두 이번에 새로 관노비가 된 자들이냐?”
소리가 나는 쪽을 동시에 내려다본 서율과 치경은 일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착각이 일었다. 기껏해야 서율의 가슴팍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꼬질꼬질한 무명옷을 걸쳐 입고 그들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율은 한쪽 눈썹을 산처럼 삐죽 치켜세웠고, 치경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살짝 멍해 있던 그들은 곧 평온을 되찾았다. 척 봐도 사대부인 서율과 건장한 어른인 치경에게 저 아이가 반말지거리를 했을 리 없다.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들은 것 같다고 넘어가려 했는데 밤톨만 한 저 아이, 두 사람의 순간적인 착각을 단숨에 깨부쉈다.
“뭘 그리 멍청하게 보고만 있느냐. 내가 지금 묻고 있다!”
“근데 이 조그만 녀석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치경이 화를 참지 못하고 꿀밤을 한 대 먹이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엄하다!”
아이는 도망치기는커녕 흠칫 놀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서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그 잔망스러움에 잠시 멈칫했던 치경은 이내 코웃음을 치며 다시 주먹을 쥐는데 중간에서 서율이 그를 만류했다.
“그만. 그만두게.”
“여기서 버릇을 고쳐주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치경의 속 깊은 뜻을 서율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상대가 그들이 아닌 거친 성정의 양반이었다면 지금쯤 저 아이는 끔찍한 매질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율은 눈앞의 여아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티 없이 깨끗하고 뽀얀 얼굴에 그림같이 자리한 먹빛의 눈동자. 그 큰 눈망울은 맑고도 투명해 세상사 어려움이란 요만큼도 겪어보지 않은 듯싶다. 게다가 말투와 표정,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대광실의 금자둥이처럼 한없이 도도하고 당당했다. 걸치고 있는 남루한 옷이 외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건 보면 볼수록 저 아이, 매우 낯이 익단 점이다. 마치 일전에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었던 듯 굉장히 친숙한 느낌이었다. 물론 실지로 그랬다면 서율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겠지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의 등장에 서율은 예리한 눈빛을 빛냈다. 진중히 입을 닫고 요모조모 살펴보는데 멀뚱히 그와 눈을 맞추던 계집아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발끈하였다.
“뭘 그리 보고만 있느냐. 어서 답을 하여라!”
“저들 중엔 다른 관할 지역의 노비였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정말?”
원하는 답을 들었는지 아이가 반색했다.
“그래. 내가 답을 주었으니 너도 협조 좀 하거라.”
“그게 무슨 소리냐?”
서율은 아이의 말똥말똥한 눈을 마주 보다가 작은 손을 낚아채 재빨리 들여다보았다. 이제껏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을 희고 보드라운 손이다.
최근 몰락한 사대부가의 여식이라.
서율이 머릿속으로 신분을 가늠해보는데 화들짝 놀란 아이가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목소리에 노여움을 실어 제법 앙칼지게 소리쳤다.
“이제 보니 실성한 자로구나!”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이!”
“그만.”
저를 암팡지게 노려보는 아이와 한 대 쥐어박을 듯 씩씩거리는 치경. 서율은 그 두 사람 사이로 재빨리 끼어들며 힘주어 말했다. 인내심이 바닥난 치경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분통을 터트리며 호소했다.
“도련님!”
양쪽에서 뿜어대는 화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서율은 유유자적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아이와 충성심이 지극한 치경 때문에 고을에 들어서자마자 어이없는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힐끔 아래를 보았더니 앵돌아진 아이는 여전히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눈이 마주치자 파르르 성깔까지 부렸다.
“허락도 없이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기백이 남다르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대책 없이 당돌한 아이의 태도는 명백히 예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율은 호통을 치거나 대거리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우발적이고도 해괴망측한 이 실랑이를 이쯤에서 그만 마무리짓고 싶었다.
“행렬이 요 앞까지 당도하였거늘 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는 것이냐?”
“어?”
관심을 돌리기 위한 즉흥적인 대처는 성공적이었다. 아이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노비의 행렬은 실제로 코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것이 꼭 보고 싶었는지 지금껏 노발대발했던 것도 잊고 지체 없이 구경꾼들 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서율은 그런 아이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조그만 게 아주 되바라지게 굴어 따끔하게 혼을 낼 수도, 무한정 받아줄 수도 없어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그만 가세.”
쉽사리 골칫거리를 해결해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깐의 일탈을 마치고 이제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야 할 시간. 애초의 계획대로 관아에 도착하기 전 고을을 한 바퀴 둘러보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서율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못 가 옷자락이 어딘가에 걸린 것처럼 몸이 기우뚱하였다. 뒤에서 누군가 도포를 거세게 잡아당긴 것이다. 서율은 즉시 돌아보았고 이어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떨쳐낸 줄 알았던 그 아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도포 자락을 쥐어 잡고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그 행태에 치경은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서율 역시 이번만큼은 따끔하게 꾸짖으려고 하는데, 아이는 여전히 해맑고 당당했다.
“그대, 나를 업어주어야겠다. 나를 번쩍 업거라, 응?”
“……뭐라?”
서율의 낯빛과 음색이 엄격하게 바뀌었다. 문제는 정작 그것을 눈치채줘야 할 상대가 그의 감정 변화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는 난처해하는 눈길로 북적이는 인파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율의 눈동자가 저절로 아이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사정은 단박에 파악되었다. 장정 여럿이 이미 앞쪽으로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버거운 모양이었다.
불쑥 솟았던 노여움은 덩달아 흐지부지 녹아내렸다. 이 와중에 준엄히 훈계한다고 한들 들어먹을 아이도 아니었다. 첫날부터 사소한 일에 힘을 빼서 무엇하나. 서율은 오직 측은지심에 입각해 치경을 보았다. 재깍 청을 들어주고 한시바삐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보게.”
“아니다!”
한데 아이는 서율이 입을 떼자마자 급하게 돌아보며 기겁했다. 경기를 일으킬 듯 서율의 옷소매를 꽉 틀어쥐기까지 하였다.
“무엇이냐?”
“나는 그대에게 업히겠다. 그대가 업어다오.”
서율의 쌩한 물음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정했다. 주춤주춤 치경을 등지며 무엇이 그리 긴장되는지 연신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오밀조밀, 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도 뚝뚝 흘렀다.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지만 아직은 어린 나이, 거칠고 무뚝뚝한 무사가 무서울 만했다.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거부당한 치경은 못마땅한 심경을 표정에 드러냈다. 그러자 더 겁을 먹은 아이는 서율의 소매를 부여잡고 거의 매달리다시피 애원했다.
“이러다 행렬을 놓칠 것이다. 나는 저들을 꼭 보아야 한다. 날 도와다오!”
“도련님, 소인이 다녀오겠습니다.”
“자네는 가서 길이나 열어주게.”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 새까만 눈망울이 이상하게 마음을 두드렸다. 서율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아이 앞에 순순히 등을 내밀어주었다. 아이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 듯 아주 능숙하게 작은 몸을 그의 등에 맡겼다.
또래보다 키가 컸던 서율은 아이를 가뿐히 업어 올려 성큼성큼 나아갔다. 치경은 꽉 막힌 인해를 간단히 헤치며 앞에서 길을 열었다. 갑자기 끼어든 그들이 못마땅해 눈을 부릅뜨는 자들도 있었지만 육 척이 훨씬 넘는 장신의 치경을 보고는 금세 움츠러들었다. 어느새 그들은 맨 앞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노비들의 행렬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관아로 가서 하루나 이틀 정도 묵었다가 이 고을에 남게 될 몇 명만 빼고는 또다시 어딘가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서율은 아이가 누군가를 절실히 찾고 있음을 직감했다. 행렬을 유심히 살피는 아이의 눈에는 신기한 구경을 한다는 일말의 유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혹시나 하는 어떠한 기대감으로, 지칠 대로 지친 관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정말 멸문당한 가문의 여식인가…….
피곤에 절어 있는 노비들과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고 최대한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아이. 서율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은은히 풍기는 운치 있는 향기는 아이에게서 나는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 있음에 그나마 감사해야 하는지도.
등으로 전해오는 아이의 말랑말랑한 감촉과 따스한 체온이 유난히도 포근하고 안심되는 순간이었다.

“고마웠다. 너희의 도움은 절대 잊지 않으마.”
서율의 등에서 내려온 아이는 감사를 표하는 마지막 말까지 하대를 하였다. 빚을 진 사람치곤 지나치게 건방진 말투였으나 치경은 더 이상 아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애처로운 듯 흐릿한 미소를 걸치고 하는 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율 또한 연민의 빛을 드리우긴 마찬가지, 이전보다 다감한 눈길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를 찾고 있는 중이냐?”
“…….”
“혹 가족과 헤어진 것이냐?”
“…….”
거듭되는 질문에 아이는 시무룩한 빛을 띠면서도 좀처럼 답을 주지 않았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느냐? 이 고을 관아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냐?”
“아니다.”
“아니다?”
아이는 더 답할 마음이 없는지 입을 다물고 커다란 두 눈만 슴벅거렸다. 무엇이든 직선적으로 말하되, 답하기 곤란한 질문엔 둘러대기보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성정인 것 같았다.
“알았다. 네가 답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더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앗!”
아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터져 나온 건 서율이 캐묻기를 그만두고 앞으로의 신변 안전을 위해 잔소리를 조금 하려던 차였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앙증맞은 몸에 비해 그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는 민망함이 섞인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양팔로 배를 얼른 감싸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