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만난 여인을 생애 처음 연모하게 되었다. '생애 처음 만나 생애 처음 연모하게 된 여인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미소를 주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보내진 미소가 단 한 자락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나 마음이 갈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토록, 그녀를 보는 것 자체로도 그리 심장이 웅성거릴 수 있었을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 그런데도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 선명하게 가슴에 박혀 있는 걸 보니, 연모의 정이란 건 온통 환영인 듯. 그 여인을 생각한, 그 여인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한 그 모든 감정도, 절절한 그리움도, 죽을 것 같던 고통도 모두가 다 환영이었던 듯.'처음부터 떠나려고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마지막까지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서, 그 고운 뺨에 눈물만을 적신 채 이제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다. 이 사내의 비참함 따위, 이 사내의 참담함 따위 처음부터 그녀는 신경 쓴 일이 없으니, 돌아봐 준 적이 없으니, 이렇게 멋대로 가 버려도 이 사내는 괜찮을 거라고. 오히려 이 사내 때문에 죽은 거라 각인시키며, 그녀는 이렇게 조롱하듯 쉽게 떠나버린 것인가.'그대를 잃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대란 사람, 늘 외면만 돌려주었으니 죽었다고 해도 나는 차라리 웃어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절대 참담하지 않다. 비참하지 않다. 괴롭지도 쓰리지도 않다. 그대가 곱다 생각한 일 따위 한 번도 없었다. 그대를 은애한 그런 마음 따위, 절대 가진 일이 없는 것이다.'미워한다. 오로지 절망한다. 그립지도 않다. 아프지 않다. 슬픔 따위 더더욱 있을 리가 없다.'휴의 텅 빈 시선은 타버린 별채 앞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절망을 넘어선 허무가 그를 오히려 웃게 하고 있었다. 하하……, 하하하……, 광증에 걸린 사람처럼 그는 타들어가는 전각 앞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눈물도 흐르지 않는 참담함에, 더 이상 쥐어뜯지도 못할 정도로 지친 피로에, 눈앞의 현실을 두고서도 차마 믿어버리지 못하는 이 비참함에 사지가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오로지 지쳐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가 사라질 때 이 심장까지 함께 덜어간 겁니까. 적어도, 괴로워라도 하도록 두고 가지 그랬습니까. 이 사내는 그대를 잃은 슬픔조차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조차 이 사내에게는 허락하고 싶지 않았습니까.'“사실입니까…….”'낮은 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내가 그리도 미워서…… 차라리 죽을 때 웃지나 않으셨습니까. 드디어 이 사내를 벗어날 수 있다고…… 오히려 행복하셨습니까.”'이미 형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불길이 먹어 치워버린 붉고 검은 재 덩어리가, 숯덩이가 그를 비웃듯 공격하고 있었다.'“아니요. 그대는 죽을 리가 없습니다. 그대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그리도 괴롭게 한 이 잔인한 사내를 살려 두고 그대가 그리 쉽게 죽겠습니까. 복수도 하지 않고서, 그대가 죽었을 리가 없지요.”'허허로운 웃음소리가 나무가 탁탁 타오르는 소리에 섞여 들었다. 똑바로 눈을 들어 전소된 별채를 노려보았다.'“나는, 그대를 찾아냅니다.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그 뼈에 다시 칼을 꽂겠습니다. 이것이 복수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수란 말입니다!”'참지 못한 분노가 검(檢)에 고스란히 묻어 잿더미를 관통해 날아가 정 중앙에 꽂혀 진동했다. '“으아아아!”'품안에 담겨 있던 꽃 한 송이를 잃은 것으로 하늘도, 땅도, 그 자신마저도 모두 잃어버린 사내의 참담한 비명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제1장> ''홍무(洪武)국 496년, 묘통사(妙通寺) 인근의 산기슭은 말발굽 달리는 소리로 요란했다. 선두를 달리는 청년은 금색꽃이 장식된 첨두철발혈(尖頭鐵鉢型) 투구와 화려한 갑주로 그 기상이 남달랐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얼굴은 관옥처럼 아름다웠고 근육이 발달한 어깨와 팔은 건장하면서도 날랬으며 등은 곧게 뻗어 마상에 앉은 모습이 더없이 용맹스러웠다. 청년의 활시위 끝은 노루 떼를 겨냥하고 있었다. 싸리나무 살대에 학의 깃, 순록의 뿔로 깍지(哨)를 만든 청년의 활과 화살은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게 방향 전환을 했다.'활과 화살을 쥐고 또 하나의 화살은 허리에 꽂은 채 시위를 당겨 쏘려는 그때, 하필이면 눈앞에 얼음이 언 큰 연못이 나타났다. 노루 떼가 연못을 가로질러 도망가자 청년의 수려한 얼굴에 잠시 난감한 기색이 돌았다. 그러나 청년은 이내 말고삐를 힘껏 당겨 그대로 속도를 높여 연못가를 돌아 노루를 쫓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달리는 노루를 향해 시위를 힘껏 당기자, 공기에 부딪혀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첫 번째 노루를 명중시켰다. 찰나를 두지 않고 이어진 화살도 연이어 다른 노루들을 명중시켰다. 노루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질 때마다 구경하고 있던 휘하의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곧 군졸들은 청년의 성공에 힘입어, 달아난 나머지의 노루 때를 뒤쫓았다. 그러나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뛰어 간 보람도 없이 쓰러진 나뭇등걸이 가로막혀 있어 나무 밑으로 빠져 달아나는 노루들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황망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선 군졸들의 뒤로 어느새 청년이 따라붙었다.'“비켜라.”'언제 온 건지 등 뒤로 바짝 달라붙은 청년이 말은 그대로 나무 밑으로 통과시키고 자신은 몸을 날려 나무 위로 훌쩍 뛰어 넘었다. 한 마리 비호처럼 나뭇등걸을 넘어간 날렵한 몸은 정확히 착지해 다시 말을 잡아타고 동시에 노루의 엉덩이에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목표물을 꿰뚫어 또 한 마리의 노루를 쓰러뜨렸다. '“명중이오!”'나뭇등걸에 막혀 아무 것도 못했던 군졸들이 급기야 감탄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용맹과 과감한 결단력이 두루 갖춰진 청년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天才)였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과 용맹을 사랑하는,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겨지는 존재였다. 여기저기에서 감탄과 환호가 그치질 않자 그때까지 자신의 형님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이찬(李贊)이 기쁜 얼굴로 자랑스럽다는 듯 웃었다.'“과연 인력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지.”'청년은 이휴(李携), 자(字)는 건록(乾綠)으로 후사 없이 승하한 전대 왕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을 옹립시키고 또 폐위시키며 다시 올리는 등 왕권까지 아우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도(司徒) 이겸의 셋째 아들이었다. 날 때부터 무인 출신 부친의 근골(肩骨)과 모친의 빼어난 자색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아름다운 용모와 범처럼 건장한 체구를 지녔다. '이렇듯 선천적인 무예 능력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걸음마를 뗄 때부터 부친과 휘하의 장수들과 어울려 검술과 지략을 익혀 이미 열 살이 되었을 때는 말을 다루는 속도가 바람을 갈랐고, 대초명적(大哨鳴鏑)에는 따를 자가 없었다. 십오 세에 건록이라는 자(字)를 받고, 십육 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뛰어난 천재성과 발군의 실력을 바탕으로 군사 요직의 수장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비록 셋째였지만 휴에게 거는 부친 이겸의 애착과 기대도 적장자(嫡長子)를 뛰어 넘을 정도였다.'한 번은 왕이 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한 일이 있었다. 설치된 과녁은 겨우 2치(寸) 적경으로 더욱이 거리도 50보(步)나 밖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많은 무신들이 과녁을 맞히려 했지만 협소한 공간을 뚫기란 어려웠다. 백이면 백 도전에 실패했지만, 오로지 휴의 박두(樸頭)만이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구경하던 모든 이가 감탄하고, 그 중 한 백관이 부친인 이겸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귀랑(貴郞)은 참으로 비범하십니다. 공(公)의 가업을 번창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드님일 것입니다.”'그 말처럼 이겸에게는 전처소생의 네 아들과 후처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지만 셋째인 휴가 가장 이겸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장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좀 더 후의 일이고, 당시의 휴는 아직은 열일곱 앳된 기운이 남아 있는 단정한 이목구비의 미청년일 뿐이었다.'군사들이 노루를 갈무리하는 걸 흘끗 쳐다본 휴(携)는 곧 활과 화살을 거두고 수고했다는 듯 말의 등을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자 긴 속눈썹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광대뼈에 그늘을 만들었다.'“노루를 잡아 오늘 반찬을 하시자더니 이미 그 이상인데요. 형님의 활솜씨는 역시 비범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