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강남병원. '호화로운 대리석이 깔린 병원복도에 요란한 발소리가 울렸다.'눈부시게 하얀 드레스 셔츠에 진녹색 타이를 하고 있는 장신의 남자는 여전히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단정히 매고 있던 타이를 거칠게 풀어 내렸다.'잘 그을린 얼굴과 남자다운 이목구비는 분명 매력적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격한 분노로 인해 사납게 일그러져있었다. '마침내 703이란 번호가 걸려있는 특실 앞에 멈춰선 남자는 거칠게 문을 열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창가에 놓여있는 커다란 휠체어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볕을 쪼이고 있던 노신사를 향해 다짜고짜 서류봉투를 디밀었다. 남자의 기세에는 아랑곳없다는 듯 노신사는 아이보리색의 도톰한 카디건을 걸친 어깨를 여유롭게 으쓱였다. '“뭐가 문제란 말이냐? 적힌 그대로다. 그린힐의 소유권을 넘겨받으려면 오늘부터 정확히 석 달 안에 결혼을 할 것.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소유권을 신유 녀석에게 넘기는 수밖에. 너도 알다시피 그 위인이 그린힐에 이만저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아니질 않느냐? 하하하.” '노신사는 여유롭게 웃으며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젊은 날의 자신을 그대로 닮아있는 외모, 불같은 성정, 차가운 척하지만 의외로 따뜻한 심성. 그는 잘생긴 손자의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제길! 작은아버지는 분명히 그 땅을 골프장으로 개조해서 망가뜨릴 테지요! 그 땅이 어떤 땅인데!” '참지 못한 남자는 주먹을 틀어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대가 병약한 -병약한 게 맞긴 하나?- 짙은 눈썹이 의문스럽게 올라갔다.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닌 그린힐을 놓고 이따위 야비하고 유치한 장난질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노인네가 혹시 망령이 드셨나?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자 서릿발 같던 남자의 얼굴에 얼핏 근심이 서렸다. '“걱정 마라, 아직은 멀쩡하니.” '남자의 생각을 읽은 노인이 허옇게 세어버린 머리통을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노인의 모습은 영락없이 함정을 파놓고 누군가가 빠지기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악동의 그것이었다.'놀림을 당했다는 불쾌감을 참아내느라 잘생긴 얼굴이 사납게 뒤틀렸다.'“그 꼴을 보는 게 싫다면 석 달 안에 결혼하면 될 거 아니냐? 듣자하니 네놈 주변에 여자들이 널렸다던데 그중 하나를 알아보던가 말이다.” '놀리듯 손자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노신사는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불만스럽게 자신을 쏘아보는 손자의 잘생긴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고는 또 한 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네 녀석, 고맙다고 큰절을 하게 될 게다. 기대를 하려무나.’ '햇살이 따가운 초여름 오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