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무겁고 둔탁했다. 어깨가 늘어질 정도로 무거운 백을 메고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꽤 멀어서 아픈 다리를 끌며 걷는 영우는 지치고 힘들었다. 좁은 농로를 따라 걷노라니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 자꾸만 짜증이 났다.

감독이 당장 집으로 가라고, 그 다리로 또 뛰겠다고 하면 선수 명단에서 빼 버리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짐을 싸 들고 나서긴 했지만, 집이라곤 낡고 오래된 시골집이 전부여서 결국 창녕으로 내려와야 했다. 마을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오래 떠나 있어도 여전히 그대로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오게 된 현실이 싫어서 영우의 발걸음은 더더욱 무거웠다.

“젠장! 이곳에 정말 오기 싫었는데…….”

내내 투덜거렸다. 다치고 선수로 뛸 수 없게 되었는데 누구 하나 들여다볼 사람도, 돈 한 푼 가져다줄 사람 없는데 있을 곳이라곤 그곳뿐이라는 현실이 아팠다. 남들은 고향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기분 좋다고 하지만 영우는 달랐다. 영우에게 고향은 늘 가난과 불행을 대변하는 단어였다. 배고프고 힘들고 아팠던 기억뿐인 곳인데 그래도 와야 하는 상황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픈 고향이었다.

“아야!”

걷기 싫은 아이처럼 터벅터벅 걸어가던 영우는 결국 무게 중심이 아픈 다리로 쏠리는 바람에 주저앉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유난히 아팠다. 비포장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기 싫은 고향 땅이어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투덜대며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일어나려는데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농로를 달려와 서둘러 비켜섰다. 누가 얼굴을 알아볼까 걱정되어 모자도 푹 눌러썼다. 그런데 노력은 어디로 간 것인지……. 차가 그녀 앞에 떡하니 멈춰서더니 창문이 내려졌다.

“너 영우 아냐? 서영우.”

“아, 네. 누구신지?”

“나야. 장진우.”

“아! 진우.”

“…….”

“…….”

어색했다. 반갑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영우도, 진우도 그저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 마치 매일 보는 동네 사람처럼 영우가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우도 영우를 두고 달려가 버렸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간 진우의 차가 마을 어귀를 돌아 넓고 넓은 과수원 뒤 아흔아홉 칸까지는 아니어도 그녀가 여전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기와집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영우는 멈춰 섰다.

“자식. 눈썰미는 여전히 좋아서. 그냥 지나가지. 알은척하고 난리야. 살짝 있다 가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 다 알아도 저 자식은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영우는 모자를 다시 푹 눌러썼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지금 영우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처럼 몹시 기분이 상한 것은 진우 때문임을 숨길 수 없었다.

장진우. 그녀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이 졸업한 동창이었다. 늘 전교 1등인 모범생에다 잘생기기까지 해서 여학생의 일방적인 관심을 받는 상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향 동네 제일 좋은 곳에 자리한 장씨 종가의 종손이고 그녀가 다닌 모교 재단 이사장의 아들에다 지금 그녀가 걸어가는 땅이 모두 장씨 소유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물론 돈의 축척과정까지 자랑스럽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의 고향에서 장씨 일가는 그야말로 넘볼 수 없는 부와 명예에 존경까지 받는 집이었다. 그녀처럼 가진 것 없는 빈농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금 전 시골 동네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가의 외제 차를 탄 그와 버스에서 내려 다친 다리로 농로를 걸어가는 자신의 현실이 그 결과물인 것처럼.

“자식. 오랜만에 만난 동창인데 좀 태워 주지. 바로 옆집인데.”

태워 주겠다고 해도 타지 않았을 거면서 괜한 트집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아서 일부러 그랬다. 9년 만의 재회인데 그때보다 더 초라한 모습을 보인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젠장! 이놈의 돌부리…… 아얏!”

화를 참지 못하고 냅다 돌부리를 찼다. 그러다 멀쩡하던 발톱마저 나간 듯 스니커즈 앞부분이 발갛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다시 주저앉은 그녀는 발을 부여잡고 고통을 참아 보려고 애썼다. 정말 재수라곤 더럽게 없는 날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괜히 왔다는 후회가 그녀의 발걸음을 부여잡는 것 같았다.

차를 주차장에 주차한 후에도 진우는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이들 중간고사 기간이라 시험 문제 출제 때문에 다른 날보다 늦은 시간에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마을 입구로 들어오면서 멀리 걸어가는 낯선 뒷모습에 왠지 시선이 갔다. 걸음걸이가 투박하고 커다란 백이 어깨에 걸려 있고 다리를 다친 것인지 약간 절고 있었지만, 운동복으로도 가릴 수 없는 라인이 분명히 여자라고 말하고 있어 더 그랬다.

지난 15년 동안 그녀가 고향을 찾은 것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고 지금은 국가 대표이니 더더욱 초라하고 외진 촌구석에 내려올 일 따위는 없는 그녀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향 방문은 상상도 못했던 진우는 자신의 심장이 그녀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뛰기 시작한 덕분에 가까워져 가는 그림자가 길가로 비켜서는 순간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기적처럼 정말 영우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창문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영우 아냐? 서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