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에에, 여기서 그만두란 말이야?” '“시간 다 됐어. 나리 데리러가야 돼.” '녀석이 풀다만 블라우스 단추를 다시 끼워 넣었다. 녀석은 실망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힐끔, 녀석을 마주보았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허벅지 위로 올라온 치마를 내렸다. 스타킹을 어디다가 놓은 거지. 녀석이 벗겼던 스타킹을 침대 아래에서 겨우 찾았다. 신는 동안에도 녀석의 눈길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와?” '“평소와 다름없이.” '녀석은 대답 대신 입술을 쭉 내민다. 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녀석이 또 스타킹의 구멍을 낸 것이다. 잘 좀 벗기래도. 힘주어 녀석을 노려보다가 스타킹을 벗었다. '“개나리랑 노는 게 그렇게 좋아?” '녀석은 침대에서 내려와 내 팔목을 잡았다. 핸드백을 잡기 위해 뻗었던 내 손을. 나는 건조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진심이다. 날 놓아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녀석의 손을 뿌리쳤다. 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왠지 내 모습이 낯설다. 거칠게 붕 떠있는 긴 머리카락을 어깨 앞으로 넘겼다. 이정도면 되겠지. 나는 뒤돌아섰다. 신발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런, 부츠를 신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규원아.” '자리에 앉아서 부츠를 신으려고 할 때였다. 회색 추리닝 바지만 딸랑 입은 채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녀석의 눈빛이 오늘따라 애처롭다. '“붙잡지 마. 늦었어.” '“10분만 더 있다 가.” '“10분 동안 그 애가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쳇.”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겨우 신고 고개를 올렸다. 녀석은 입을 쭉 내민 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는지 확인한 후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등 뒤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밥도 주고 올 거잖아. 난 또 혼자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 하나.” '“응.” '“……진짜 라면 먹는다?” '녀석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삐졌다. 확실히 삐친 표정이다. 나는 한숨을 후우 내쉬었다. 그리고 힘주어 녀석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 '“……차가운 여자.” '“숙소 가서 먹으면 되잖아.” '“내 마음도 몰라주고. 정말 뷁이삼!”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 쓰지 마.” '양쪽에 팔짱을 끼고 녀석은 내게 등을 보인다. 평소와 다름없는데도 녀석은 매번 이런 식이다. 항상 가지 말라며 나를 붙잡는다. 꼭 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미안.” '“정말 갈 거야?” '“오늘은 빨리 갔다 올게.” '가지 말라고 매번 붙잡는데도 난 항상 이런 식이다. 녀석에게 등을 보인다. 돌아선다. ''입김이 나온다. 하아, 날씨가 추워졌다. 부츠를 신고 나오기를 잘했다. 손이 시렸다.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었다. 두 손을 하얀색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고 버스정류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다행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랜만에 편안히 앉아서 갈 수 있다. 나는 습관처럼 맨 뒷좌석으로 걸어갔다. 누군가가 앉았던 모양인지 따뜻했다. 버스가 출발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 어지러움은 잠시뿐이다. 또 아무렇지 않았다.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냈다. 정전기가 날 것 같아 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최근 들어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자주 만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좋았다. 요새 트리트먼트를 써서 그런가 보다. 차는 미끄러지듯 언덕을 내려갔다. 반대편 버스 옆면에 꽤 낯익은 광고문구가 써져있다. '[ 날아올라라, 뛰어올라라, 프로 게이머 강찬민! ] '갑자기 녀석 생각이 났다. 녀석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저런 문구 마음에 들지 않아. 차라리 세상을 평정하기 위해 나타난 강찬민이라 해주지, 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이런 답을 해주었다. 실력만 있으면 되지 뭘, 라고. 하지만, 결국 녀석의 바람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녀석의 직업은 프로게이머다. 프로게이머 선수들은 숙소에서 따로 지내는데 녀석은 연습을 하지 않을 때에는ㅡ잠자는 것 빼고 두 시간 정도다ㅡ내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녀석이 경기를 하는 모습을 딱 두 번 보았다. 녀석이 말하기를, 내가 나타나면 꼭 진다고 했다. 큰 경기가 있던 그날. 내가 보고 있던 그 경기에서 녀석은 패배했다. 상금 1000만원을 안고. 나는 그날 이후로 녀석의 경기를 보러가지 않는다. 끽,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 했다.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나는 다음번에 내려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을 눌렀다. 밖은 추웠다. 칼날 같은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심하게 휘날렸다. 제길, 묶고 나올 걸…….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어깨를 움츠렸다. 빠르게 걸어갔다. 구두굽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뛰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무조건 뛰었다. '“날씨 한번 더럽게 춥네.” '코가 시려온다. 손은 이미 말도 아니다. 코트 속에 넣고 왔는데도 손끝이 아려온다. 이제 곧 퉁퉁 부을 것 같다. 콩콩 유치원 앞에 섰다. 매번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름 참 유치하네. 문 밖에 나와 있던 유치원 선생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평소라면 나리 녀석도 앞에 나와 있을 텐데 웬일인지 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리는요?” '“안에 있어요.” '귀찮은 녀석. 똥이라도 싸나. '“나오라고 불러 주세요.” '“저기 그게…… 잠시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선생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나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저기……. 이분이 나리 보호자세요.” '“……당신이야?”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코트 안에 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 옆에는 나리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울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나는 한숨부터 내뱉었다. 내 앞에 있는 이 아줌마의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애 엄마냐고!” '“진정하세요, 지연 어머님.”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똑바로 봐. 우리 애 얼굴 좀 봐!” '그 여자는 자신의 아이를 내 앞으로 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곱이 턱 아래에 붙어 있었다. 미간을 찌푸렸다. '“봤어요.” '“봤어요? 그게 다야? 애 얼굴 좀 봐! 당신 눈엔 긁힌 거 안 보여?” '“보이네요.” '“누가 그랬는지 알아?” '“잘 모르겠는데요.” '“당신 애가 그랬어! 당신 애가!” '아줌마의 고함소리에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아줌마는 자신의 아이를 달래기 시작한다. 나는 그 두 모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이를 발견했다. '“나리야. 선생님이랑 나가있어.” '아이는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선생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아줌마는 울음을 쉽게 그치지 않는 자신의 아이를 달랬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자 그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독설을 내뱉었다. '“엄마가 돼가지고 애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킨 거…….” '“저 애 엄마 아닌데요.” '“뭐?”'“애 엄마 아니라고요.”'내 말에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다.'“그럼 대체 저 애 엄마는!” '“죽었어요.” '“그, 그런…….” '“애가 엄마가 없어서 교육이 저따위네요. 미안해요. 대신 사과하죠.” '“…….” '“내가 사과한다고요. 죽은 애 엄마 대신. 그럼 됐죠?” '“……하, 나 참 기가 막혀서.”'이걸로 상황은 종료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기에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드르륵, 문을 열자마자 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선생은 괜찮으세요, 라며 내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커다란 두 눈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나는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손을 뻗어 아이의 두 어깨를 잡았다. '“빛나리.”'“…….” '“나리야.” '“…….” '“야, 개나리!” '“그렇게 부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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