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조성미가 얼마나 끈질겨질 수 있는지 잊고 있었다.'“세영아.”'박수은이 그랬던 것처럼 청으로 찾아온 조성미를 보았을 때, 할 수만 있다면 조성미의 손을 잡아끌고 대로로 뛰어들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었다.'“제발 내 말 좀 들어 줘. 응?”'“내가 말했지, 한 번만 더 찾아오면 당신 딸 불러 앉혀 놓고 모두 말해 주겠다고. 지금 그렇게 하라고 이러는 거야?”'“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엄마야. 제발, 그렇게 경멸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날 좀 존중해 달라고.”'“내가 당신을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어쩌지?”'조성미의 손을 뿌리치자, 그녀가 흐느끼며 울부짖었다.'“너도 네 아버지랑 똑같아. 냉정하게 사람 쳐다보는 거 정말 지긋지긋해. 그 눈에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너 모르지?”'세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내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하지만 순순히 사라진다면 조성미가 아니었다. 입구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에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따라와요.”'세영은 조성미와 함께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오자 그 와중에도 조성미는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주문했다.'“넌 뭐 먹을래?”'“먹으러 온 거 아니니까, 적당히 해요. 미안한데 주문은 나중에 할게요.”'서늘한 그녀의 말에 종업원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사라졌다.'“그래, 할 이야기가 뭔가요?”'“제발 내 입장을 이해해 줘. 내가 왜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나, 네 아버지랑 살면서 너무 외로웠어. 겉으론 평화로웠지만 무뚝뚝한 네 아버지랑 살면서 외로워 미칠 것 같았어. 그러다 우연히 대학 시절 첫사랑을 만났다. 그 사람 놓치면 죽을 것 같았어. 정말……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이었어. 그래서 그랬어. 행복해지고 싶었어.”'조성미의 말을 듣는 동안 무릎 아래 놓인 주먹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부르르 떨렸다.'“그래서?”'“아이가, 수은이 말이야. 세영아, 수은인 엄연히 네 동생이야. 그 아이가 학교에 제출한 등본에 담임으로부터 부모가 정식 부부로 등재되지 않은 것에 질문을 들었던 거야. 수은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그건 네가 헤아려줘야 해. 수은인 아직 16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잖아. 넌 사리분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어른이지만 수은인 아니야. 날 위해서 뭐든 하고 싶어 하는 기특한 아이라서, 도무지 말릴 수가 없단다. 그러니 부탁하마. 제발…… 이혼만 해줘.”'세영은 웃고 말았다. 삼류 저질 코미디를 눈앞에서 지켜보는 심정이었다.'“행복해지고 싶었어?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고? 그럼 아버진? 그렇게 아내를 잃은 내 아버지의 배신감은 어쩌지?”'“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세영아…….”'“내가 당신에 대한 일말의 예의라도 지키길 원한다면 그만 해. 아무 말도 하지 마.”'냉수가 담긴 컵을 들어 끼얹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조성미와 똑같은 인간이 되지 말자, 수없이 중얼거린 뒤 조성미의 간절한 눈을 노려보았다.'“당신 말처럼 미안하게 생각했다면, 그래선 안 됐던 거야.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책임이 있었어. 사랑하게 해놓고, 15년을 함께 살도록 해놓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등을 돌려선 안 되는 거였어.”'감정에도 예의가 있다던 태경의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내 동정에 호소하지 마. 이혼? 꿈도 꾸지 마. 계속 그렇게 동거인으로 살아. 당신의 그 사랑이 영원하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당신은 친딸에 대한 친권조차 가지지 못하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사 아버지가 당신 용서한다 해도 난 아니야. 죽는 그날까지 당신 증오할 거야. 그동안은 그래, 무심한 척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당신의 변명을 듣는 순간 알게 됐어, 당신이 얼마나 악질적인 사람인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과 당신 딸이 나와 내 아버지 주위에 맴돌았다간 가만두지 않아. 당신 딸이 태어난 걸 후회하고 자신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만들어 주겠어. 부모인 당신을 더럽게 여기게 만들어 줄 테니 어디 해볼 테면 해봐.”'“세영아.”'“내가 못할 것 같아? 천만에. 내 아버지가 당신 때문에 피를 토하고 생살을 쥐어뜯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어. 그걸 내가 봤는데 내가 못할 것 같아? 어디 해보시든지. 당신 역시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 테니 어디 한 번 해봐.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차라리 바라고 있었다. 속이라도 시원하게 모든 걸 까발릴 수 있게 조성미가 움직여 주는 것을 말이다. 끼익, 힘껏 밀린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카페 안의 시선이 집중됐다.'“당신의 그 기특한 아이가 얼마나 더럽게 태어났는지 알게 되면, 참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하얗게 질린 조성미를 향해 잔인하게 웃어 보인 뒤 돌아섰다. 16년 만에 처음으로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했다. 조성미를 한껏 궁지로 몰아넣고 부들부들 떠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기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최소한 조성미가 그녀를 두려워할 힘이 있다는 게 우쭐했다. 그래서 잊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쥐가 살기 위해 고양이를 문다는 것을……. 저녁 무렵,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세영의 세상이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