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평원은 검은 장막을 거둬들이며 붉은 태양을 토해 놓았다. 지상의 피조물들은 하나씩 하나씩 붉은 빛에 취해 제 빛을 찾아갔다. 빛은 싸라기를 훑어내리 듯 낱낱이 손길이 닿는 구석구석까지 어둠을 내쫓았다. '태양은 마침내 흉폭하게 빛을 발하는 칼날까지 쓸고 지나갔다. 보병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툭 하고 땅 위로 떨어졌다. 일렬로 줄지어 선 보병들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빛을 발하는 수면처럼 줄지어 선 적군의 병장기가 금방이라도 피를 부를 듯 번쩍였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밝은 순간 평야는 숨 쉬기가 버거울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짓눌렀다. 선두에 선 기수들은 부릅뜬 눈으로 말에 올라타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각 편장들이 어깨 위로 치켜 올린 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둥!'긴장으로 신경을 바싹 곤두 세웠던 이들에게는 단순한 북소리가 아니었다. 신경 줄을 일일이 긁어내는 날 조각이 되어 병사들의 혈관을 들끓게 했다. 침묵을 깨버리는 북소리가 들리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편장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기수들은 기가 찢어져라 깃발을 휘둘렀다. 공기의 압력과 천지사방을 뒤흔드는 고함소리, 먼지와 진동을 한껏 받은 깃발은 팽팽하게 허공에서 몸을 부풀렸다. '귀청을 찢어발기는 듯한 나팔소리가 울리며 열을 지어 선 두 군대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이 선 병기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고 공평하게 살을 뚫고 뼈를 부쉈다. 보병에 손에 들린 도끼는 뼈를 취했고 창은 피를 마셨다. 다시 대지의 것이 된 시체들이 무정물이 되어 곳곳에 나뒹굴었고 아직 흙으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이들은 부서진 육체를 추슬러 기고 걷고 달렸다.'공기는 피비린내와 쇠 냄새, 땀내와 먼지내가 뒤섞여 참혹함을 더해갔다. 하루 동안 계속되던 전투는 태양이 다시 대지 속에 감금될 무렵에야 그쳤다. 2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오늘의 전투는 역사가들의 붓 아래 단 한 줄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 기록 속에는 한 팔이 떨어져 나간 채 나뒹굴다 적의 발목을 셋이나 베어버린 병사도, 저돌적으로 적의 진영을 휘젓다 낙마해 숨진 어느 기병군도, 만삭의 아내를 두고 출전해야만했던 어느 청년의 사연도 들어 있지 않았다. 승패와 함께 기록되어야 마땅할 무수한 비명과 피와 목숨과 원한은 단조로운 문장 속에 가두어져 전쟁이 가진 비정함을 은폐했다. '단우 무진은 전투가 끝난 풍경을 둘러보았다. '전투는 끝이 났으나 사망자들의 시신과 부상병, 그리고 전리품을 수습하느라 진영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승리의 기쁨은 사지가 온전한 이들의 것이었다. 아군의 승리에는 일조했으나 기쁨을 누릴만한 경황이 없는 부상자들은 살아남았다는 후회를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무진은 수하에게서 막 전후 보고서를 받은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