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슥. 슥슥. 스스슥.'‘저런 아들을 낳은 엄마는 뭘 먹었을까? 미역국으로는 턱도 없겠네. 하아. 그놈 참 잘생겼다.’'새하얀 수학 노트를 초상화로 도배한 양숙이 연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우리 멋있는 선도부 부부장은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대충 그려도 각이 나왔다. '먼 길 떠나간 임을 기다리다 벼랑에서 망부석이 되어 버린 여인의 심정이 이럴까? 그녀가 창가 가운데 자리에 앉은 원진을 그윽하게 쳐다봤으나, 야속한 임은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다. 양숙은 지루해서 인간 수면제가 된 수학선생님에게 꽂힌 원진의 시선이 탐이 났다.'똥배가 솟은 늙수그레한 남자보다 이팔청춘 팔팔한 여고생이 훨씬 매력 있지 않니? 돌아봐라. 돌아봐라. 돌아봐라.'“조양숙. 침 떨어진다.”'“…….”'따사로운 봄 햇살이 원진의 몸 위에 눈부신 오라를 만들었다. 포토샵으로 손본 듯. 원진에게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장면은 양숙의 애를 태우며 감질나게 괴롭혔다. 한 손으로 턱받침을 하고 그녀는 아예 몸을 틀었다. 수학선생이 아무리 불러도 먼 세계로 간 양숙은 돌아오지 않았다.'“양숙아. 선생님이 너 부르잖아.”'“으응? 왜?”'보다 못한 짝 정예가 확 양숙의 턱받침 한 팔을 잡아 뺐다. 양숙의 머리가 책상 위로 떨어지며 턱을 세게 찧었다.'“아이코.”'아픈 턱을 손바닥으로 감싼 양숙이 정예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교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윽. 죄송합니다. 선생님.”'수십 개의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양숙은 목을 아래로 푹 접으며 수학선생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빨리 선생을 달래서 관심을 돌리고 싶었다.'“바람났냐? 조양숙.”'“네?”'“창가에 앉은 누구 얼굴을 넋 놓고 바라봤잖아. 아니야?”'이 양반, 오늘 날을 잡았나. 적당히 사과를 하면 그냥 넘어갈 것이지. 수학은 손에 든 책을 탁상에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양숙을 심문했다. 반 아이들의 눈이 호기심에 불을 밝히더니 일제히 창가를 쳐다봤다. 창가에 앉은 남학생 네 명 중 세 명이 동요(動搖)를 하며 양숙을 곁눈질했다. 그녀와 원진만 수학을 보고 있었다.'“아. 아……아니에요. 저기 창문 밖으로 뭔가가 지나가는 것 같아서 이상해서 봤습니다.”'“그래? 아무튼 곧 중간고사다. 네 성적은 수업시간에 한눈팔아도 괜찮은 수준이 아니잖니, 조양숙? 집중해라.”'“아. 네.”'수학이 그녀의 변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진드기처럼 따져 물을 때는 언제고. 도무지 어른들의 속을 알 수가 없다. '마무리로 부실한 양숙의 학습 능력을 꼬집은 수학은 다시 책을 들고 수업을 시작했다.'수학과 달리 아이들은 그대로 믿지 않았다. 졸음이 오는 수업시간에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연애스캔들은 귀가 번쩍 열리는 흥밋거리였다. 더구나 조양숙으로 말할 것 같으면 통통한 몸집에 귀밑 3센티미터의 단발머리, 무릎을 덮는 교복치마 아래 오래되어 누리끼리한 단화 운동화를 신은 비호감 인물이었다.'남학생들은 양숙의 구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지만, 창가라는 특정 지역으로 좁혀지자 재미있어 했다.'“진짜 밖에 뭐가 지나갔어?”'“독수리가 참새를 잡으려고 열나게 날더라.”'정예가 말소리를 낮추고 양숙에게 꼭 달라붙었다.'정예는 생긴 것이 그녀와 비슷해서 둘이 같이 있으면 유유상종이란 말이 따라왔다. 비호감 인물이지만 양숙은 성질이 괴팍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심해서 왕따와 상관없었다. 누가 보기 전에 수학공책에 그린 초상화를 지우개로 박박 지웠다. '“에잇. 거짓말이구나. 선생님 말씀이 맞는 거지? 누군데? 나만 알고 있을게.”'“말 안 한다는 인간이 제일 먼저 퍼트리지. 헛다리짚었다. 아무도 없어.” '“맹세해?”'시시콜콜 친구의 사소한 것까지 알려고 하는 여자들. 비밀이 많아서 입이 무거운 양숙에게 여자 친구는 버거웠다. 그래도 없는 거보다는 나아서 정예에게만 유일하게 곁을 내주었다.'얘가 원래 진드기 과였나.'양숙은 확인을 받으려는 정예의 얼굴을 밀어내고 입술을 비틀었다.'“내가 왜 믿지도 않는 남의 신한테 맹세해야 하는데? 정예야. 나 공부할 거야. 조용히 해 줘.”'“기집애. 친구 사이에 무슨 비밀을 만드나. 난 너한테 전부 다 말해 주었는데. 섭섭하다.”'“하아. 진짜 아니야. 내 주제에 무슨 남자를.”'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양숙이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정예가 칠판을 보며 필기를 하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네가 어디가 어때서?”라고 한번 말해 주면 덧나냐. 너 참 솔직하다, 칫…….'어깨를 으쓱하며 양숙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운수가 사나워서 수업시간에 조심해야지. '양숙은 칠판에 쓰인 글씨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굳은 머리를 쥐어짰다. 이미 콩밭에 가 있는 마음이 어디 쉽게 돌아오랴. 강한 자기력에 끌려 그녀의 눈은 또다시 창가의 원진을 향해 돌아갔다.'‘흡.’'편안히 잘 쉬던 숨이 목구멍에서 턱 막혔다. 심장이 두근두근, 난타를 하는 가슴은 부여잡지 않으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런. 좋은 징조일까? 나쁜 징조일까? 꽃미남. 왕자님. 어떤 수식어도 부족한 킹왕짱 잘생긴 원진이 양숙을 쳐다보고 있었다. '텔레파시가 통한 거야. 수학한테 욕먹어도 주야장천 창가를 노린 보람이 있었어. 저, 저, 칼로 자른 것 같은 매끄러운 콧날 봐. 눈썹 아래 깊은 그림자 속에서 잠자고 싶네. 입술은 어떻고? 원진이는 물을 많이 먹나? 입술이 어쩜 저리 촉촉해. 양숙은 공부하기로 한 다짐을 훅 날려 버리고 아예 상체를 틀었다.'원진이 이 몸을 봐 주신다는데 나도 기꺼이 응해야지. '‘응? 뭐라고? 선도부교실?’'원진의 야시시한 입술이 뭐라고 뻐끔거렸다. 진한 분홍색 입술 틈으로 살짝 모습을 드러낸 그의 혀가 예뻤다. 양숙이 대답을 하지 않고 헤벌쭉 웃으며 얼굴 근육을 풀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원진이 이마에 석삼자를 그리며 인상을 썼다. 임의 화난 표정에 양숙은 그제야 표정을 조신하게 바꾸고 원진에게 집중했다.'‘선도부실. 이 시간 끝나면 오라고? 아하, 알았어.’'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확인하고 나서야 원진은 양숙에게서 시선을 치웠다. 그녀도 얼른 얼굴을 책상으로 감추었다. '대박이다. 짝사랑 상대 앞에서 창피를 당해 난감해 하고 있었다. 주제를 모른다는 아이들의 곱지 않은 비아냥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역시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었다.'혹시 원진으로 가득 채운 가슴이 장난질을 치는 게 아닐까? 너무 보고 싶으면 환상을 볼 수도 있잖아. '양숙의 뇌세포들이 백만 가지 갈등을 만들며 토론을 벌였다. 새끼 제비처럼 파닥이던 심장에 불이 지펴졌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따뜻함이 순환했다. 기대에 부푼 양숙의 얼굴이 꽃분홍 진달래보다 더 붉게 폈다. 한 번 더 확인을 하려고 어깨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는 음악소리가 스피커 가득 메워졌다. '“밥 먹자.”'수학시간 다음은 점심시간이었다. 수학에게 대충 인사를 한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짝 정예도 빨리 식당으로 가자고 양숙의 팔을 잡아끌었다.'“정예야. 그게, 나 잠깐 볼일이 있어서. 너 먼저 먹어.”'“늦게 가면 먹을 거 없어. 네가 점심까지 미루면서 봐야 하는 일이 뭔데? 같이 가 줘?”'탁!'원진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우당탕, 시끄럽게 밖으로 달려 나가는 아이들 틈에서 유독 그의 소리만 정확히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