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큰 병원으로 가야 해요, 아가씨. 무조건이요.”'무영은 너무나 단호했던 올케의 말을 떠올리며 인터넷으로 대학병원을 검색했다. 무영의 올케는 얼마 전 극심한 통증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가 난소에 혹이 발견돼 느닷없이 수술을 받았었는데 그 일이 있기 한 달 전쯤 동네에 있는 작은 병원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고 있었기에 그 후부터 병원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큰’ 병원을 가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무영이 점점 심해지는 생리통 때문에 병원에 한 번 가야겠다며 운을 떼었을 때에도 역시나 그녀의 올케는 ‘무조건 큰 병원’이라는 말을 구호처럼 외쳐댔다.'무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모니터에 뜬 대학병원 홈페이지를 응시했다. 그 병원은 그녀의 작업실과 한 정거장 거리에 있어 다니기 수월한 곳이었지만, 당최 내키지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 대학병원에서 불쾌한 일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영이 고3때 대학병원에 갔다가 생긴 뿌리 깊은 거부감 때문이었다.'고3 시절, 무영은 불면증과 소화불량 등에 시달리다 마침내는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앓아눕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 손에 끌려서 갔던 대학병원이 무영에게 위내시경 검사부터 항문 검사까지 온갖 검사를 다 해보더니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며 무영을 정신과로 보내버린 것이다. 답답한 일이었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내내 계속된 부모님의 언쟁과 싸움으로 적지 않게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으니, 병이 날 만도 하다고 생각했던 무영이다.'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신과라는 말에 사색이 된 그녀의 엄마는 어중이떠중이에게 맡길 수 없다며 국내에서 정신과로 가장 유명하다는 또 다른 대학병원의 정신과를 예약한 것이다. 환자가 너무 많이 밀려 있어 순서를 당기느라 아는 사람까지 동원해 예약한 그 의사는 특진 제도가 보편적이지 않았던 그 당시에도 특진비를 내야 했던 정신과 과장 의사였다.'그 의사를 떠올리던 무영이 콧방귀가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모니터 속의 대학병원을 응시했다. 다른 병원이었지만, 과연 그 진료 방식과 분위기도 다를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이제는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무영은 그 의사가 했던 진료를 똑똑히 기억했다.'진료는 아주 간단했었다. 소화불량에 불면증, 무력증, 설사와 구토 등 무영이 말하는 증상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공부하는 거 힘들어요?”'무영은 뭔가 불쾌한 기분이었지만 애써 차분히 응수했다.'“제일 쉽지는 않죠.”'의사는 무영의 대답에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곧장 인턴과 레지던트로 보이는 다른 어린 의사들에게 넘겨진 후 의도가 뻔히 보이는 심리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한다.'□ 무엇을 해도 의욕이 나질 않는다.''대학을 심리학과나 철학과로 지원하려 했던 무영은 우리나라 정신과 수준이 그 정도인 것에 비로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런 질문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심리 분석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무영은, 온갖 검사에도 답을 내지 못하고 결국은 정신적인 문제로 결론 내고 싶어하는 의료계의 바람대로 우울증이 나올 수 있도록 백 개가 넘는 문항을 하나씩 체크해나갔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솔직히 체크한 게 있었던지 진단은 무영이 예상한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으로 나왔다. 그것도 고3 입시생의 스트레스로 인한 조울증이라고 말이다.'그녀는 단 5분간의 진료로 입시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고3병을 앓는 조울증 환자가 되어버렸고, 주어진 건 부작용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흰 알약뿐이었다.'약은 아주 작았지만 꽤나 비쌌다. 하지만 효과만큼은 가격에 걸맞게 강력했다. 대학병원에서 저명하다는 정신과 의사가 처방한 그 약은 한 알만 넘기면 잠이 쏟아졌고, 갑자기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뿐인가, 모든 생각의 꼬리들이 듬성듬성 잘려나가 수학 한 문제를 푸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렇다. 신경안정제라는 그 약은 무영을 바보로 만들더니 급기야는 입시에 실패, 재수를 하게 만들었다. 결국 무영이 고시원으로 들어가 입시를 마치고 오니, 지난 3년여 동안 죽일 것처럼 싸우던 그녀의 부모가 이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