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재 이야기>''“나 선봤다.”'“선?”'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엽이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그게 좋았다. 이런 반응을 보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지만. '“응. 선.”'최대한 담담하게 대답을 이었다. 정엽이 조금 더 반응을 해주길 바라면서.'“선이란 거는 소개팅이랑 다른 의미인 거지?”'“응. 그렇대.”'마치 남의 일인 듯 무심한 말이 뱉어졌다. 사실 정엽이 놀라면 그걸로 된 것이다. 효재에게 선이란 건 소개팅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사람은 어때?”'뭐라고 대답을 해줄까. 솔직하게 대답해줄까, 아니면…….'“소아과 의사야. 서른네 살. 성격도 좋고, 외모도 준수하고. 후훗, 그 남자 이름도 준수다. 나준수.”'“대놓고 준수한 남자구나.”'객관적으로 괜찮은 남자이긴 하지만 확 끌어당기는 매력은 없었다. 하지만 정엽에게 곧이곧대로 말해주기 싫어서 살짝 살을 덧붙였다. '“모난데 없이 수더분하고, 괜찮은 거 같아.”'“……만나 볼 거야?”'짧게나마 내쉰 한숨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을 수가. '효재는 설레는 가슴을 살짝 밀어 넣고 표정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싫진 않으니까.”'“뭐 그러냐?”'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이죽거리는 특유의 비아냥거림이 반가웠다. 바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담배를 찾는 것도 반가웠다. 웬만한 답답한 일이 아니고서는 담배를 입에 물지 않는 정엽임을 알고 있기에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그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압력솥에는 밥도 못하는 게 무슨 결혼이야.”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길게 필터를 빨아들인 정엽이 하늘을 향해 길게 연기를 뱉어냈다. '“누가 지금 당장 결혼한대? 몇 번 더 만나봐야지.”'검지와 중지사이에 끼운 담배를 엄지 끝으로 톡 때리자 담뱃재가 바닥에 떨어졌다. 정엽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지 않았다. 한껏 꼰 다리 위에 손목을 걸친 채 그대로 멀뚱히 눈만 끔벅였다. '“내 허락 먼저 받아. 한번 데려와 봐.”'정엽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효재는 그런 정엽의 미소가 참 싫었다. 못마땅한 것을 수긍할 때 짓는 예쁜 그 미소. 가슴 떨리게 만드는 그 입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대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욕심이란 녀석은 늘 저만치 앞장서서 달음질 치고 있었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알지. 대놓고 준수한 그 나준수 의사 선생님도 어딘가 하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내가 보기엔 멋지던데.”'순간 정엽의 눈썹이 꿈틀거린 것 같았다. 곁눈질로 살짝 훔쳐본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 '멋지단 이야긴 괜히 한 건가.'“신효재 눈에도 멋져 보이는 남자가 있어? 눈이 안나푸르나 정상에 달렸다는 신효재가 멋지다고 하니까 기대되는데?”'윤정엽 말고는 멋진 남자가 없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다른 남자들을 멋지다고 해 본 적 없을 뿐이란 말을 해줄 수가 없어서 효재는 답답했다. '“다음 데이트는 우리 가게에서 해라.”'오늘 선 본 남자와 다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돼 버리면…….'“알겠어. 네가 한번 봐 줘.”'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런 거짓말 정말 정신건강에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왜 하게 되는 건지. '그냥 떠보고 싶었을 뿐이다. 소개팅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고, 결국 선택한 선. 그런데 이번에도 정엽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짓 너무 비겁한 거 같아서 더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엽의 반응을 보고 난 후에는 어김없이 또다시 투지가 불타오른다.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내가 선 봐서 결혼한다는데, 정말 아무 상관없는 거야? 넌 참 속도 좋다. ……속상해. 비참하고 서운해.'“너는 너의 그녀와 잘 돼가고 있어?”'들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 이야기를 또 묻는 요놈의 입술. 하지만 궁금한 걸. '효재는 죄 없는 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걷어찼다.'“내가 매력이 없나 봐. 매력적인 남자가 나타났다고 또 한눈을 파네.”'말도 안 된다. 윤정엽에게 매력이 없다니…….'사실 효재는 정엽의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윤정엽 같은 남자를 곁에 두고 그렇게 쉬지 않고 한눈을 파는 건지.'윤정엽이 꼭꼭 숨기고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그 여자.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효재는 정엽의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외로운 걸 견디지 못하는 정엽인데 그런 정엽을 늘 외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나쁜 여자. 자주 만나주지도 않고 다른 남자와는 수시로 만나는 아주 나쁜 여자. '도대체 그런 여자가 어디가 좋은 건지. 그렇게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왜 그 여자를 놓지 못하는 건지. '“너무 불안해하지 마. 그래도 결국엔 늘 네 곁으로 돌아왔잖아.”'비단 정엽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한번 쏟아내고 나면 미련 없이 그녀의 곁으로 간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결국 내 곁으로 돌아오는 녀석이니까. '“알면서도 불안한 걸 어쩌겠냐.”'정엽이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자 그 길을 따라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효재는 정엽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쌓인 눈을 바라보던 효재의 시선에 정엽의 발이 걸렸다. 발끝으로 툭툭 쌓인 눈을 걷어차던 정엽이 동작을 멈추자 효재는 다시 정엽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엽은 괜찮다는 듯 웃었지만 입가가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모습, 정말 보고 싶지 않은데.'효재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미련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처럼 늘 한걸음이 늦었다. 친구인 정엽에게 우정이 아닌 다른 낯선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도 늦게 알아차렸고, 1년 전 자신보다 먼저 그런 마음을 잠시 가졌던 정엽이 연애를 해보지 않겠냐고 수줍게 손을 내밀었을 때도 나중에 관계가 틀어지면 단 하나뿐인 친구를 잃게 될까 재고 따지느라 내민 그 손을 그대로 놓쳐버렸다. '결국 지금, 정엽의 곁에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늘 정엽을 힘들게 하고 가슴 아프게 만드는 그 여자. 그리고 그런 정엽을 지켜봐야하는 자신. '돌아올 걸 알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불안한 마음,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정엽과 이렇게 짧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한 달쯤은 혼자서 기다려야 한다. 혹시라도 정엽에게서 전화가 올까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도 못하고, 컴퓨터를 켜면 메신저부터 로그인 해두고, 정엽이 운영하는 카페테리아를 지나칠 때마다 그렇게 정엽의 흔적을 찾으며 먼저 연락해 올 때까지 지루한 기다림을 인내해야 한다. '이제 그만 헤어지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어 오늘도 이렇게 목구멍 안으로 불필요한 말들을 밀어 넣어 버렸다. '무슨 자격으로 헤어짐을 권할 수 있을까. 저렇게 힘들어하다가도 그녀와의 관계가 회복되면 자신과는 얼마의 시간동안 연락이 끊겼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또다시 푹 빠져버리는 빌어먹을 윤정엽인 것을.'벌써 1년 째. 정말 못해먹을 짓이다. '의미 없이 지어보이는 정엽의 미소를 붙잡고 또다시 한 달 남짓을 버텨야 하는 이 못난 마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까. '''<정엽 이야기>''괜찮을 줄 알았다. '그래. 여자나이 스물아홉, 결혼적령기지. '하지만 그것은 효재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여자는 몰라도 효재는 절대 결혼적령기가 아니다. 김 빼는 소리가 무섭다고 압력밥솥으로는 밥도 못하는 여자가 무슨 결혼적령기. '가끔 소개팅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효재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얼굴 반반한 놈들이 무척이나 많이 꼬인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효재는 그어놓은 선 그 이상으로는 발을 내딛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을 봤다고 한다. 사람도 수더분하고 괜찮단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만나보고 결혼할까 한단다. '도대체 이게 무슨…….'나설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1년 전, 나름 진지하게 연애를 제안했지만 효재는 무척 망설였다. 효재에 비해서 부족한 남자란 걸 알고 있다. 친구로서는 즐거운 시간을 줄 수는 있지만 연애, 더구나 멀리 결혼이란 걸 생각하자면 진지한 구석 없고 책임감도 없어 보이는 인간이 바로 자신이란 걸 알기에 농담하지 말라는 효재의 말에 힘없이 웃고 말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거절을 했더라면 회복불능이었을 텐데. 이렇게라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남아 있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효재는 알까?'“너무 불안해하지 마. 그래도 결국엔 늘 네 곁으로 돌아왔잖아.”'그래. 늘 그랬듯이 효재는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잠시 방황하고 있는 걸 거다. 조금 더 당당하게 효재의 앞에 선다면 분명 그땐 효재의 마음이 변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1년째 연애 카운슬러를 자청해준 덕에 효재의 마음을 조금씩 훔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다정하게 이야기 해줄 때마다 정엽은 효재의 호흡하나 표정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정엽은 오직 효재만을 위한 맞춤형 연인이 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