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셋째 주 주말. 인천국제공항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예정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뉴욕발 KE086비행기편에 관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전광판에 비행기도착을 알리는 빨간불이 들어왔다. 그러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출구로 몰려들었다. '그 시간, 짐을 찾고 간단하게 수속을 마친 사람들이 출구로 가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다크그레이 솔리드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을 확인하는 걸로 보아 약속시간에 늦은 모양이었다. 기상변화로 예정시간에 맞추기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된 상태였다. 남자는 짐도 별로 없는지 프리다 블랙 비지니스백 하나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저기요, 잠깐만요.”'남자가 출구로 향하는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옆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 목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에 힘 있는 검은 눈동자, 거기다 곧은 콧대와 굳게 다문 선명한 입술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만 돌려 쳐다봤을 뿐인데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180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잘 빗어 넘긴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과 깊은 눈매에선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자신감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불러 세운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내릴 수가 없었다. 남자의 시선이 여자의 얼굴을 배회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좀 전까지 비행기에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였다. '“무슨 일입니까?”'생김새만큼이나 지독히 낮은 톤의 저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를 불러 세운 여자가 한걸음 더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저, 한국분 맞으시죠?”'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작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남자는 여자가 왜 자신을 불러 세웠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여자는 갑자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그대로 들어왔다. 어깨 밑으로 내려온 웨이브진 다갈색 머리와 갸름한 얼굴형에 까무잡잡한 피부. 거기다 검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자였다. 한눈에 보아도 이상한 여자 같지는 않아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보는 걸로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때서야 여자가 마음을 먹었는지 질끈 깨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초면에 실례라는 건 알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요.”'“부탁이요? 저한테 말입니까?”'“네. 좀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제가 사정이 좀 급해서요.”'여자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심각해진 표정으로 보아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끌고 오던 커다란 가방을 바로세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남자를 다시금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자 그녀가 훅하고 숨을 들이켰다. 얼음처럼 차갑지만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 그녀가 다시금 깊은 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무슨 부탁입니까?”'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지극히 사무적인 낮은 저음이었다. 그 목소리에 그녀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만 같아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굉장한 위압감이었다. '“예의가 아니란 걸 알지만 눈 딱 감고 부탁드릴게요. 출구까지만 함께 가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공항을 빠져나갈 때 까지만요.”'여자의 말에 남자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 공항 빠져나갈 때까지 애인인 척 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리는 거예요.”'“애인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