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시작되는 봄 축제로 캠퍼스 전체가 살짝 들떠 있는 듯했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 맞는 축제라 유림 역시 가볍게 설레었다. 서녘 하늘에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교문을 향해 걷는 유림에게 곁의 영은이 물었다.'“몇 시랬지?”'“7시.”'“시간 넉넉하겠지?”'“그럼.”'“나 어때, 유림아?”'유림은 영은을 돌아보았다. 영은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듯 제법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좋아. 아주 예뻐.”'영은이 신경을 쓰는 이유는 오늘 있을 미팅 때문이었다. 미팅 따위로 괜찮은 남자를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는 유림이었지만, 그때 그때의 풋풋한 재미는 놓칠 수 없었다. 지금껏 남자애들에게 한 번도 먼저 거절당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만큼 여유가 있어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지금 몇 시야?”'영은이 또 물었다. 유림은 핸드폰을 꺼내려고 청바지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어! 없네.”'“뭐가?”'“내 핸드폰.”'“가방에 넣은 거 아냐?”'유림은 고개를 저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새로 산 핸드폰은 최신형으로 비교적 얇은 편이라 가방보다는 주로 바지 주머니 속에 쏙 넣어 다니곤 했다.'“어떡해. 책상 위에다 두고 왔나 봐.”'30분쯤 전 통계학 강의가 끝나갈 즈음에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곤 다시 챙겨 넣지 않은 것 같았다. 강의실을 나와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뽑아 마실 때도, 그리고 나선 화장실에 가 이를 닦을 때도 핸드폰을 꺼내 쓴 적이 없으니 아무래도 강의실에 두고 온 게 분명했다.'“영은아. 잠깐만 기다려. 나 핸드폰 찾아 갖고 올게.”'“같이 가줘?”'“아냐. 너 다시 올라가기 싫잖아. 다리에 알 배긴다고.”'“고마워.”'영은이 웃음을 담아 말했다. 유림은 그런 영은을 곱게 노려봐주곤 오던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빨리 와.”'뒤에서 소리치는 영은에게 유림은 돌아는 안 보고 손만 들어 흔들어주었다. 저녁이 내리기 직전의 상경대 건물은 빛과 그늘을 반반씩 안고서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유림은 걸음을 빨리 했다. '강의실은 3층으로 웬만한 소극장 정도의 크기였는데, 복도를 걸어온 유림이 문 앞에 서자 무언가 리드미컬한 소리들이 들렸다. 소리들은 처음엔 낮고 담담하다가 점점 힘을 품고서 역동적으로 울렸다. 그 소리의 정체를 유림은 금세 알아차렸다. 드럼. 그건 분명 드럼을 연주하는 소리였다. 유림은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드럼 소리가 다이내믹하게 달려들었다. 유림은 조심스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이 천천히 닫혔다. 소리도 소리였지만 유림의 두 눈을 먼저 사로잡은 건 한 남자였다. '유림이 들어섰는지조차 모른 채 힘차게 드럼을 치고 있는 그는 몸에 꼭 붙는 검정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는데, 이만큼 떨어진 거리에서도 흐트러진 머리칼이 사뭇 섹시해 보였다. 유림의 가슴 안에 애매한 일렁임이 생겨났다.'그의 드럼 연주는 문외한인 유림이 보기에도 상당히 능숙하고 힘이 넘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연주 자체에 심취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유유자적, 연주하는 이 순간을 느끼고 있다고 할까. '그의 그러한 분위기가 주는 묘한 불균형이 유림의 발을 묶어버렸다. 유림은 가만히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연주는 지치지도 않고 한참을 계속됐다.'이윽고 그가 리듬을 타며 내리쳐대던 손놀림을 멈추었다. 유림의 지켜보기도 끝났다. 저도 모르게 숨이 꼴깍 목 안에 가두어졌다. 그가 고개를 약간 들어올렸다. 그리하여 그의 시선이 유림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그 시선이 와서 닿았다 여기는 순간, 유림의 온몸이 잔뜩 긴장했다.'“뭐야.”'물음 같은데도 어조를 말아 올리지 않는 이상한 어투였다. 대답할 말도, 여기 들어온 목적도 잊고서, 유림은 그의 목소리가 드럼 소리보다 조금 더 멋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정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가 유림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갔다. 그리곤 스틱으로 드럼을 탁탁 장난치듯 몇 번 두드렸다.'“아, 저, 찾을 게 있어서요. 네, 그래서요.”'내가 왜 허둥대지? 자신이 못마땅하면서도 달리 어쩌지 못하고 유림은 강의 시간에 앉았던 자리로 걸어 내려갔다. 앞자리에 앉았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 걸음걸음마다 그와 차츰 가까워져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이상하게 설레었다. '그는 유림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드럼하고만 장난질을 계속하고 있었다.'핸드폰은 없었다. 아까 앉았던 자리는 물론 그 근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림은 당황스러웠다. 선생님 앞에서 거짓말을 한 소녀가 되어버린 기분마저 들었다.'“이상하다.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하는데.”'유림은 그가 들어주기를 바라며 중얼거렸다. 그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 핸드폰이고 뭐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이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몇 살?”'유림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몇 살? 지금 날더러 물은 거야? 어린애한테 묻듯이 몇 살이냐고? 유림이 속으로만 되새기는 사이에 그가 또 물었다.'“1학년?”'“네.”'이게 뭐야. 네라니. 어쩌자고 착하게 대답을 한 거야. 김유림 너…….'“드럼 치는 남자 처음 봤어?”'“네?”'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비웃음 같진 않은데 은근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웃음이었다. 오만한 느낌을 주는 웃음.'“나가 봐.”'“네?”'“나가라구.”'“네.”'정말이지 유림은 제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다. 네 밖에 몰라? 왜 이러니, 김유림. 도대체 왜 이래. 정신이 반쯤 나간 거 아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돌아서서 몇 걸음을 떼어 놓는 유림을 그가 불러 세웠다.'“헤이.”'유림은 얼른 그에게로 다시 돌아섰다.'“네.”'또 네야. 으이구, 김유림.'“전화 온다.”'“네?”'쓱 웃더니 그가 턱짓을 했다. 그가 앉은 의자 옆에 또 하나의 의자가 있고 거기 책들이 몇 권 쌓여 있는데 그 위에서 핸드폰이 조그만 불빛을 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건 유림의 핸드폰이었다. '갖고 있으면서 모른 척을 했던 거였어? 유림은 항의라도 하듯 툭툭 걸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영은이었다. 확인만 하곤 주머니에 찔러 넣는 유림에게 그가 물었다.'“안 받아?”'별 관심도 없으면서 쓱 지나쳐가는 그런 물음.'“네.”'“네 하나로 다 해결하는군.”'유림은 기어이 이마를 찌푸리고 말았다. 부끄러웠다. 바로 앞에서 들여다본 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잘 생겼다고 느낄 만큼 선명하고 환했다. 서늘한 이마를 반쯤 가리며 머리카락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눈매며 콧날이며 입술이며 턱선까지 상당히 오만하고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다 봤으면 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