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은 혼절한 채린을 침대에 눕히고 옆에 앉아 그녀의 파리한 손을 잡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채린을 보면서 계속해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채린의 손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연신 눈가를 훔쳐 내고 있지만 좀체 눈물이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에 몰아친 감정의 격랑에 재인 자신도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곁에서 누구도 그를 말려 줄 수도, 위로의 말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같이 채린의 이야기를 들었던 민서나 시후도 그 모습을 보며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제삼자인 자신들로 견디기 힘든 감정을 겪고 있으니 당사자인 재인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민서는 채린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울음을 삼키는 재인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두 사람만을 남겨 둔 채 민서와 시후는 말없이 침실을 나왔다. ' 소파에 앉아서도 두 친구는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민서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이렇게 길고 피곤한 하루를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시후는 자신이 가지고 온 책을 다시 펼쳐 들고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전에는 이해도 되지 않던 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자 읽어 내리는 시후의 눈가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시후를 보며 민서가 길게 또 한숨을 쉬었다. 당사자인 재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친구들에게도 두 사람의 이야기의 충격은 무척이나 컸다. 꿈만 같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믿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 “그……태왕은 어떻게 됐을까? 기록이 남아 있어?” ' 민서가 시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내가 가서 다시 확인은 하겠지만 채린 씨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느 왕인지 대충 짐작은 가. 전에 본 것 같아. 역사에 잠깐 기술된 적 있는 왕인데. 고구려 초기쯤이었다고 기억해. 고구려가 강성해지는 그 시점이지. 부족 연맹체였던 고구려가 왕권을 중심으로 강성해지는 그 시기에 잠깐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부족 연맹체 중에 가장 강력했던 부족 중의 하나인 소노부의 성씨는 ‘해’씨였어. 소노부는 그냥 힘만 강했던 부족이 아니야. 소노부 왕족은 계루부 왕족하고 대등했었고 계루부 전에 왕을 배출했던 말 그대로 왕족이야. 계루부에서만 왕이 선출된 다음에도 절노부와 함께 이 세 부족은 왕족으로 ‘고추가’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스스로 종묘도 가진 부족이었어. 그러던 소노부가 왕족으로서의 권위가 격하된 사건이 있었어. 그저 모반이라고만 기술되어 있을 뿐 누가 어디에서 일으켰는지 아무런 흔적도 어떻게 진압되었는지 상황도 나와 있지 않아. 그저 그 일로 소노부가 왕족으로서의 공식적 지위를 잃게 되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어. 그런데 그 왕이 오래 집권하지는 못한 걸로 알아.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빈번하던 부여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걸로 나와. 그런데 조금 이상스러운 것은 그 당시 고구려의 병력을 생각해 볼 때 분명 이기는 싸움이며 굳이 왕이 앞에 나설 필요도 없는 전투에서 전사해. 그래서 측근에 의한 암살이라는 설도 학계에서는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어. 나도 후자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어. 그런데 채린 씨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암살이 맞는 것 같아.” ' 친구의 설명을 듣던 민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 “자업자득인가? 동하라는 장군을 옆에 두었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야.”' 민서의 말에 시후도 수긍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주치의가 진료 후 극심한 피로만 해결한다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라며 링거를 놓아주고 돌아간 다음에도 재인은 채린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애를 태웠는지 듣던 자신도 힘이 빠져 버리고 몸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이야기를 전하는 채린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더구나 기억이 없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기억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좋은 기억도 아닌 슬픔과 아픔만이 있는 그런 기억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모든 기운을 소진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재인이 파리한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채린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첨단 과학 문명의 세계에 살고 있는 전자화된 인간의 전형인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 사람으로 몰려 정신병원에 감금조치가 되고도 남을 이야기인 것이다. 시간 여행은 물론 전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동하라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인물인데 그가 자신의 가슴을 잡고는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들을수록 알지도 못하는 그 남자에게 빠져 들었다. 그 남자의 절망을 맛보고 그 남자의 애절함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리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마지막 그 남자의 말이 그냥 머릿속에서, 아니 가슴속에서 떠올랐다. 처음엔 자신이 아닌 채린이 뱉어 낸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분명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었다. ' ‘내 반드시,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그 남자가 죽어 가며 약속했던 말. 쏟아지는 화살 속에 사랑하는 여인을 감싸 보호하며 마지막으로 토해 낸 말이 그의 가슴속을 뚫고 나와 입으로 뱉어진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그의 말이 기억이 났다!'' 재인이 거실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은수는 민서와 시후의 이야기를 듣고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은수는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재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 “애들이 한 말이 사실이야?” ' 다급한 은수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재인이 피곤한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수가 재인의 곁에 다가 앉으며 물었다. ' “정말이냐구?” ' “그래. 정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