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초현(楚炫)은 방문에 바른 찢어진 비단 사이로 죽어가는 부모님의 모습을 고스란히 시선 속으로 담고 있었다. 늙은 유모는 비명을 지르려는 초현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현(懋炫)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마님께서 어떻게든 두 분을 살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놓아라. 나는 부모님을 구해야 한다.”' 무현은 이제 겨우 열 살 남짓 어린 소년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른 못잖은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유모는 고개를 흔들며 속삭였다.' “아니 됩니다. 무현 님. 지금은 아니 됩니다. 하지만 저들을 잘 보시고 기억하소서.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훗날 저들의 죄를 물으시고 목을 치셔야 할 분은 바로 무현 님이십니다. 그리고…….”' 유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초현에게 눈을 돌렸다. 무현보다 세 살 어린 초현은 마치 온몸이 마비가 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리실 분은 바로 초현 님이십니다. 무현 님. 반드시 초현 님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초현 님은 이 나라의 여황이 되실 분이십니다. 저 간악무도한 자가 다음 대의 여황이 되실 사촌 누이들을 모두 죽였으니 이제 대를 이을 분은 초현 님만 남은 것입니다. 무현 님. 지켜주십시오.”' 무현은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있는 누이동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 ' “알았어. 초현이는 내가 지킬게.”' “예. 그러셔야지요. 자,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저들에게 발각되는 날엔 이 송제국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몸을 따라오십시오.”' 유모는 얼른 침상 뒤로 돌아가 선반을 밀쳤다. 그러자 조그만 입구가 보였다. 유모는 손짓을 하며 재빨리 소리쳤다.' “무현 님. 어서 이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길을 따라 가시면 태산(泰山)이 나온답니다. 그리로 가세요. 어떻게든 깊은 산속으로 몸을 숨기세요.”' 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초현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자신도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 “유모. 얼른…….”' 그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닫힌 문을 뚫고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유모의 방은 화살 밭이 되어 버렸다.' “유모!”' 그러나 이미 유모의 등에는 저들의 화살이 처참하게 박혀 있었다. 유모는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태산천모(泰山天母)님. 부디 두 아기씨를 지켜주십시오. 부디 두 분을 천모님의 품 안에 보듬어 주십시오. 부디…….”' 유모는 말을 마치고 손을 들어 문을 닫고는 선반을 제자리로 돌렸다. 그리고 털썩 숨을 놓고 말았다. ' 유모의 손에 의해 문이 닫히자 희미한 빛조차 모두 사라져 버렸다. 무현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현은 손을 더듬어 초현의 손을 찾아 쥐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어른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어두운 통로였다. ' “가야 한다. 유모 말대로 태산으로 가야 한다.”' 무현은 보이지 않는 초현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떻게든 목숨만은 보전해야 했다. 그것이 지금 무현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목표였다.' “초현아. 뒤돌아보면 아니 된다. 가자.”' 얼마나 걸었을까. 무현은 좁은 길이 점점 넓어지는 것을 깨닫고는 초현을 돌아보았다. 희미한 동생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오자 표정이 밝아졌다. ' “초현아. 다 온 거 같아. 저길 봐.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아.”' 무현은, 초현이 자신의 손을 꼭 쥐는 것이 느껴졌다. ' “오라버니. 어머님, 아버님도 함께 와야지.”' “초현아.”' 초현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 “우리만 도망가면 안 돼.”' 초현은 마치 정신이 나간 아이처럼 무현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무현의 손에 어깨를 잡히는 바람에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초현아. 정신 차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무현은 초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초현을 끌어당겨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빛이 점점 더 밝게 비추기 시작하자 무현의 표정이 비로소 조금 밝아졌다.' “초현아. 다 왔어. 뛰어.”' 무현은 초현을 잡아끌며 뛰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든 동생의 안위를 살피고 몸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그런 무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두 아이의 몸은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으, 으악.”' 두 아이가 빠져나간 동굴의 끝은 깊은 낭떠러지였다.''' “단주(團主)님.”' 다급한 시녀의 목소리에도 가진(佳珍)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뒤꽂이(머리장식품)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를 한줌 틀어 올린 곳에 꽂았다.' “단주님. 서두르세요. 황제 폐하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가진의 손놀림이 딱 멈추었다.' ‘황제라……. 황제 폐하란 말이지.’' 가진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가락지를 들어 양쪽 손가락에 끼고 손바닥을 펴 보았다. 단아한 옥색 가락지가 가진의 손가락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가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어떠하냐?”' 그녀의 시녀인 월이는 황홀한 눈빛으로 가진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우십니다. 어찌 이리도 농염하십니까?”' “하, 농염이라.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그리 말하는 게냐?”' 월이는 고개를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