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란아.”'미목수려한 사내의 얼굴에 환한 빛이 돌았다.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 사내다움과 기품이 절로 흐르는 반듯한 이목구비. 화운국 황제 사량헌과 그의 소중한 황후 단아유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 사유헌이 정자 아래 반짝이는 햇살처럼 웃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막 열일곱이 된, 세상 어떤 여인보다도 곱고 맑은 누이동생을 바라보는 유헌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가득하다. 어머니를 닮아 작고 아담한 체구에 진귀한 수정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투명한 눈동자, 늘 옅게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앙증맞은 붉은 입술까지 어여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아이다.'“오라버니, 더우실 텐데 시원한 감주라도 드시면서 하셔요.”'유헌은 친우인 태결과 함께 검술을 연마하는 청엽궁 뒤뜰을 찾은 유란의 손에서 이슬 맺힌 차가운 감주 잔을 받아 들었다.'“다른 이들을 시키지 않고.”'유헌과 유란이 어릴 때부터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던 은 상궁과 대진 상선이 노환으로 곁을 떠난 후에는 진아라는 궁녀만을 두고 있는 유란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태결, 이리 와서 감주로 목을 축이게.”'유란의 찰랑이는 까만 머리카락을 큰 손으로 쓰다듬어 주고는, 검을 내리고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태결을 재촉하는 유헌이다.''유헌과 비슷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와 훌륭한 체격을 가진 태결은, 황제의 신임을 얻어 젊은 나이에 화운국 삼태관 중의 한 사람이 된 학자 류석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류석을 닮아 학문에 능하고 그 외모 또한 출중한 태결은, 황태자인 유헌과는 어린 시절부터 누구보다 마음이 통하는 막역지우였다. 바르게 자란 대나무처럼 곧고 다소 차가운 태결의 모습이 보이자, 혹시 불쑥 자신이 찾아와서 수련을 방해한 탓에 그의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닌지 살짝 눈치를 살피는 유란이다.'“…….”'말없이 유란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제 몫의 감주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마시는 태결의 표정은 차가우리만치 단정하다.'“잘 먹었습니다.”'반듯하게 솟은 콧대의 태결이 감주잔을 비우자, 유헌도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내가 가져다주마.”'아직 태결의 손에 있는 빈 잔과 제 손의 것을 보며 유헌이 옅게 미소를 띠운 채 유란을 돌아보았다.'“아니, 괜찮……, 어?”'유헌이 움직이기도 전에 태결이 담담한 얼굴로 제가 마신 잔과 유헌의 잔을 받아 들고 성큼성큼 청엽궁으로 걸어갔다.'“하하.”'차갑고 냉소적인 인상 때문에 오해받는 일이 종종 있으나 태결의 깊은 마음 씀씀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유헌은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라도 편히 이야기를 나누라는 배려인 것이다.'“그래, 오늘은 민 상궁에게 야단맞지 않았느냐?”'유란이 수를 놓다가 종종 치마와 함께 꿰는 통에 민 상궁에게 혼이 나는 일이 많은 것을 아는 유헌이다. 듣자니 어마마마께서도 예전에 은 상궁에게 수를 배울 때 그런 일이 많으셨다 하였는데 유란도 그런 모양이었다.'“후후. 적어도 실수하는 횟수는 줄었다 하셨는걸요.”'낭연한 목소리로 웃는 유란을 보며, 유헌도 이내 따라 웃고 만다.''“감사합니…….”'잔을 가져다 놓고 뜰로 돌아가던 태결과 마주치자 유란은 평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아닙니다.”'태결은 일부러 유란이 돌아올 즈음해서 뜰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뜰에서 청엽궁 안채로 드는 길은 동쪽 길과 서쪽 길, 두 길이 있었으나 유란이라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동쪽 길로 오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던 태결이다. 허나 마주한 유란을 앞에 두고는 긴 말이 없는 태결.'“저…… 그럼…….”'태결의 영민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유란이 살며시 그를 비껴서 걸음을 옮겼다. 황궁 안의 누구에게나 다정한 유란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태결에게는 말을 거는 것이 쉽지 않았다.'‘샤아아.’'한 줄기 바람에 소려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유란의 향기가 묻어 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던 태결의 머릿속을 간질였다. '“이제 더는 아니 되겠군…….”'태결은 멀어지는 유란의 작은 어깨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저 두 주먹에 꾹 힘을 주었다.'차분하던 눈동자에 살짝 즐거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