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다른 공간이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협죽도의 세상이라고나 할까. 도톰한 꽃잎이 난만(爛漫)하여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활짝 피어올랐다. 갈래갈래 피어난 꽃잎들은 제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듯 밑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한 잎, 두 잎 소록소록 떨어지는 붉은 꽃눈이 아래에 서 있던 여인 위로 내렸다. 여인은 꽃눈이라도 맞는 듯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위로 향하고 있었다. 무심하기만 하던 환의 표정이 지워졌다. 치켜뜬 망막 속으로 협죽도에 살고 있는 꽃 요정이 박혔다. 딱 두 번 마주쳤던 요정은 요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꽃에 취해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지은 채. 지은 듯 만 듯한 그것은 하나의 선으로 그려진 미소임에 틀림없었다. '환은 그 미소에 흠뻑 빠졌다.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미미한 한 줄기의 미소가 지금까지 그녀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와 인상을 뒤바꿔놓았다. 저런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여자였단 말인가? 미소라고는 지을 줄 모른다는 듯 볼 때마다 그 자신보다 더 무표정하고 딱딱한 얼굴이었는데 저런 표정을 감추고 있었단 말인가. '환은 왠지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해낸 장사꾼의 심정이 되었다. 아름다운 여자만 골라서 납치했다는 오랜 민담에 전해져오는 가국(猳國)이라는 요괴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탐을 내어 납치해갔으리라. 슬그머니 그 자신이 요괴가 되어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환이 막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였다. 유리 천장을 가로 세로로 가로지르며 교묘히 감춰두었던 스프링클러가 철컥 돌아가더니, 삽시간에 물을 뿜어냈다. 가는 세우(細雨)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는 온실이라는 작은 세상을 뿌연 몽환의 세상으로 바꿔놓았다. 앞으로 나서려던 환은 내디딘 발걸음을 도로 세웠다. 그를 가려주던 커다란 잎새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줄기가 어깨를 적셨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앞만을 응시했다.'진한 다홍빛 꽃눈은 붉은 꽃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한 잎씩 떨어지던 꽃잎은 두둑거리는 물줄기를 맞아 더욱 많은 꽃잎을 아래로 떨구었다. 땅에는 젖은 꽃잎들이 사방으로 흐트러졌고, 물기를 머금은 진한 협죽도의 향기는 사방으로 퍼져갔다. '여인은 떨어지는 꽃물을 희롱이라도 하듯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 있었다. 하나로 묶어 훤히 드러난 목덜미 사이로 작은 물방울들이 또르륵 굴러 떨어졌다. 조금씩 젖어드는 얇은 흰 블라우스 밑으로 여린 살결이 어릿어릿 비쳤다. 이슬처럼 잦아드는 물줄기가 여인을 촉촉이 적셨다.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간 한 줄기의 물줄기가 그녀의 흰 이마를 적시며 가녀린 볼로 미끄러져 고집스런 턱에 맺혔다. 긴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풀잎에 달린 아침 이슬 같았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은 물을 머금어 더욱 새까만 빛을 발하며 반들거렸다. 옆으로 삐져나온 잔머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싫은 듯 그녀는 가는 손을 들어 물을 훔쳤다. '순간, 환이 움직였다. 놓치면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는 환상 같아서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놀란 새가 달아나지 않도록 소리도 없이 움직여 작은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살짝 벌어진 여인의 선홍빛 입술의 유혹을 반기듯 주저 없이 그 입술을 훔쳤다.』''『요사스런 밤바다는 사람을 깊은 심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일렁이는 작은 물결 소리마저 유혹하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상처를 자신의 품으로 감싸 안으며 모든 것을 받아줄 듯 반짝이는 바다 빛.'바다에 혼을 뺏긴 듯한 가은의 모습에 갑자기 두려움을 느낀 환은 그녀의 어깨를 낚아챘다. 그의 손에 이끌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가은이 의아한 눈길로 돌아보자, 환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순간 그녀가 파도치는 검은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내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가듯이, 들리지 않는 속삭임에 불려가듯이 그녀가 사라질까봐 황급히 붙들었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환은 그녀를 등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알 수 없는 적에게서 그녀를 지키려는 듯 가은의 작은 몸을 가슴 깊숙이 꽁꽁 틀어 안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그렇게 있었다. '헝겊인형처럼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가은이 혼잣말처럼 천천히 속삭였다.'“왜 이러는 거죠?”'“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갑자기 당신이 바다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서…….”'그의 말에 가은이 소리 없이 웃었다.'“내가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보이던가요?”'그렇게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는 듯 힘없이 되묻는 목소리에 환은 그녀의 작은 몸을 덮어쓰듯이 더욱 깊숙이 안았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 있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뜨거운 열기로 감쌌다.'“잊고 싶은 기억을 가져본 적 있나요?”'“아니, 없소.”'“너무너무 소중해서……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겠죠?”'환은 침묵했다. 가은은 애초부터 그의 대답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는 듯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난 있어요. 가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텐데. 아무리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라도 지금은 이렇게 아프기만 한 기억일 뿐인데, 왜 난 잊지 못하는 걸까요? 잊고 싶은데, 잊혀지길 바라는데도 어째서 더욱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거죠?”'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달콤하기만 한 추억들. 그리고 그만큼 괴롭고 아픈 상실감. 마음속에 이중 삼중으로 쳐두었던 두꺼운 벽이 수습할 사이도 없이 연달아 때린 충격에 자잘한 금이 가면서, 참고 참았던 슬픔의 조각들이 하나둘 새어나왔다. 잊을 수만 있다면 잊고 싶은 기억들. 행복했던 만큼 아프기에 잊고 싶었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추억들. '가은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눈물 없이 울었다.'“정말로 잊고 싶소?”'흠칫 놀란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환의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돌린 가은은 검은 장막처럼 서 있는 어두운 눈빛의 그를 보았다.'“대답해보시오. 진심으로 잊고 싶소? 비록 지금은 잠시 잠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게 시작일 수도 있소. 한 번 잊기 시작하면 점점 더 쉽게 잊혀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자 말해 봐요, 그 기억들을 잊고 싶소?”'가은은 검게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강한 눈빛으로 그녀를 붙드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잊을 수 있다면, 잠시라도 잊을 수만 있다면…… 이제는 잊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 깊숙이 숨겨둔 본심이었다. 지치고 힘들어 더 이상은 그 기억들을 붙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네, 그래요. 잊고 싶어요.”'환이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볼을 쓸어내리는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그의 눈 속에 일렁이는 강한 불길을 발견한 순간, 가은은 그가 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받아들여지기만 했다. '환은 이미 그녀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은은 그 대답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는 그 한 단어를 내뱉은 것이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