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운을 걸쳐 입고 당황해 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환은 곧장 침실로 향했다. 침대주위엔 여자의 빨간 원피스와 붉은 빛깔의 속옷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필요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침대위에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공포감 서린 얼굴로 환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환은 순간 자신의 심장이 정말 얼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아무런 동요를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공식적으로 자신의 여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자신을 이런 거지같은 상황 속에 밀어 넣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만큼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눈앞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던 여자가 몇 시간 전 자신이 보고 싶어 죽겠다며 전화를 걸었던 여자와 과연 동일인물일까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오……빠……?”'자신을 부르는 시연의 목소리에 환은 정신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처음으로 여자라는 이성과 진지한 만남을 가져 보려던 그의 작은 계획이 산산조각 난 것이었다. 한 차례의 태풍이 얼어버린 마음까지 쓸고 가버리길 바랐다. 환은 조용히 눈을 내리 깔며 지금의 상황을 재빨리 마무리 지은 뒤 끈적끈적하고 소름끼치는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히며 환은 심장을 베어 낼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라.”'경멸하고 경멸하는 삼류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 같아 환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화가 났지만, 침대 위에 남녀가 뒹군 흔적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화를 내는 것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화를 억누르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말을 마친 다음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따라 들어온 하얀 가운의 남자가 욕을 하며 환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채자 환은 가볍게 남자를 밀쳐내며 바닥에 넘어진 남자를 향해 냉정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말을 하며 방을 나섰다.'“넌 상관 마.”'차를 향해 몸을 옮기는 환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뉴욕의 최고급 호텔을 나온 환은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몰며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다짐했다.'‘제길! 두 번 다시 여자는 믿지 않는다! 절대로!’'''[미리 보기]''“뭐야…….”'시끄럽게 틀어져 있는 TV, 테이블 위에 지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는 책과 프린트, 먹다 남은 라면, 과자봉지 그리고 소파위에서 침까지 흘리며 자는 이상한 여자. 환은 곧장 소파에서 자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희도는 오랜만에 달콤한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지금 희도는 그 숲속에 잠들어 있는 공주님이었다. 넓은 침대에 누워 오지도 않는 왕자님을 기다리느라 온몸이 쑤셔왔다. 문밖에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희도는 얼른 눈을 꾹 감으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낯선 남자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잡더니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왕자님, 살살 좀 흔들어요! 그러다 어깨 빠지겠어요.’'희도는 어깨를 잡고 흔들어 대는 환의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사람의 얼굴이 점점 형태를 잡아가며 희도의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짙은 눈썹과 약간은 이국적인 느낌이 도는 듯한 아름다운 깊은 검은색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과 남자다운 입술, 거친 듯 곱게 뻗은 얼굴선은 영락없는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센스 있게 세워 넘긴 완벽한 왕자님을 보며 희도는 천년 묵은 삼산을 발견한 기분으로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왕자님?”'“침이나 닦지? 추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