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6.
17.
에필로그.
16.
이연화, 기우솔 일로 복잡했던 차라 별로 만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하는 목소리가 퍽 진지해서 대번에 거절할 수 없었다.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했어?’

김서운과는 간단하게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 간단하게.
하지만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대화 주제는 전혀 간단하지 못했다.

‘수아,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질문이 조금 껄끄럽게 느껴졌다. 드라마에서 보면 보통 그런 멘트는 썸을 타는 남녀가 나눌 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껄끄러움의 정체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 너 좋아해.’
‘쿨럭─!’

그대로 입에 있던 것을 뿜어냈다. 허를 찌르듯 들어온 고백 공격은 피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그의 얼굴에 녹차 라테를 조금 묻혀 버렸지만, 수아와 달리 김서운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티슈를 집어 들어 얼굴을 닦아 낼 뿐이다.
하지만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혹시 오해할까 봐 일러 두는데,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거야.’

알아들었다고, 못 알아들었으면 녹차 라테를 뿜었겠느냐고, 그만 말하라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김서운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보며 달아나야 할지 그냥 앉아 있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는 청천벽력 같은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우린 이어질 수 없는 사이야. 왜냐하면 내가…… 국기퍼니까. 국기퍼는 행동에 제약이 엄청나고, 어쩔 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사람의 기억을 지워야만 하니까.’
‘…….’

꼭 시련에 빠진 남주인공 대사 같았다.
오글거리고 괴로워서 그 입 다물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그는 피크를 찍었다.

‘우리 여기까지만 보자.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목매는 건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잖아?’
‘허…….’
‘건강하게 잘 지내, 봉수아.’

그렇게 김서운은 카페를 나갔다.
‘도대체 뭐냐고.’
기우솔로도 모자라 김서운까지 스스로 제 곁을 떠났다.
혹시 깜짝 카메라였던 건 아닐까 싶어 연락을 기다렸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문자 한 통도 오지 않고 있다.
삼인방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마음이 있긴 했어도, 막상 현실로 이루어져 가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뭐, 좋게 좋게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무어라 정의 짓지 못하는 알쏭달쏭 한 기분으로 드라마를 마저 시청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짧은 진동이 울리며 톡이 왔다.

[- 황규호: 내일 뭐해?]

‘아, 얘는 아직 남아 있었지…….’
그 또한 마저 떠나길 빌어야 하는 건가 고민하며 답장을 썼다.

[- 나: 그냥 집에 있을 예정. 왜?]

톡은 빠르게 읽음 처리되었다.
하지만 답장은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다.
꼭 무슨 말을 쓸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다.

[- 황규호: 만나자.]

졸업식 이후 황규호가 따로 보자고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우솔이 떠나는 날에도 황규호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남주인공인 그와 만나는 게 괜찮은 방향인 걸까?
그 또한 만나서 제게 앞으로 보지 말자는 둥, 비슷한 결의 말을 하려는 건 아닐까?
양가적인 마음이었다.
기우솔이 떠날 때까지만 해도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이어 김서운마저 거리를 둬 버리니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잠깐.’
나 설마 지금 고민하는 거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규호가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나오면 두 팔 들어 환영해야 할 일이잖아!
잠시나마 갈팡질팡했던 스스로의 마음에 어이없어하며 수아는 빠르게 답장을 적어 갔다.

[- 나: 그래. 장소랑 시간 정하자.]

* * *

황규호와의 만남 장소는 출발 직전에 공유 받았다. 그리고 그 장소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자, 긴장해 있던 어깨가 맥이 빠지듯 늘어졌다.
‘갑자기 롯버월드라니…….’
그곳은 무려 놀이동산이었기 때문이다.
애인이나 가족, 친구끼리 가는 그 장소.
굳이 따지자면 황규호는 친구에 가깝긴 했지만, 단둘이 롯버월드를 갈 정도의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생물학적 남녀가 롯버월드를 친구 사이로 가려면 동성친구보다 돈독한 감이 있어야 하는데, 객관적으로 그렇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장소 선정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전화까지 해 봤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고, 본인은 이미 도착해 있으니 얼른 오라는 톡만 날아왔다.
‘일단 가 보면 알겠지.’
수아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버스 차창 너머를 물 흐르듯 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를 이동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2월이라 그런지, 밖에 나오니 쌀쌀한 감이 들었다.
대충 입고 나온 패딩을 여미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그가 받았다.
“어디야?”
- “나 너 보여, 잠깐 기다려 봐.”
통화가 끊어졌다. 이후 수아는 대기 줄을 눈에 담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거의 다 졸업생인가?’
북적거리는 사람들 중엔 교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평균적으로 이 시간은 수업 중일 테니, 높은 확률로 졸업한 지 한 달도 안 된 졸업생들이리라.
얼마 전 동창생 단톡방에서 ‘우리도 졸업 기념으로 롯버월드나 에데랜드 같은 데 가 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한 얘도 있었다.
‘그걸 황규호랑 오게 될 줄이야. 근데 얘는 등교 안 하나?’
참 제 입맛대로 아카데미를 다닌다고 생각하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배경처럼 서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나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독보적으로 부잣짓 도련님 스멜을 풍기는 황규호였다.
어디서부터 저를 발견하고 발을 뗀 건지조차 유추되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저 거리에서 자신을 발견할 정도면…….
‘도대체 시력이 얼마나 좋은 거야.’
조금 멍을 때리는 수준으로 그가 걸어오는 걸 보다 보니, 어느새 황규호는 눈앞에 와 있었다.
“오랜만.”
그는 가느스름한 미소를 걸며 인사를 건넸다. 마치 기분 좋아 보이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더불어 눈이 달렸다면 꼭 한번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비주얼.
그의 얼굴 공격에 시선을 비튼 수아는 대략 대답해 주며 곧바로 용건을 물었다.
“응, 그래. 근데 왜 여기에서 보자고 한 건데?”
“왜긴. 놀이공원에서 할 게 하나밖에 더 있어?”
황규호는 뭔가 내밀었다. 입장권이었다.
“아니, 인생이 롤러코스터인데 뭐 하러 놀이공원에까지 왔냐는 거지.”
“그럼 싫어?”
“딱히 좋지는 않아.”
“표 좀 자세히 봐봐. 정말 싫어?”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서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속는 셈 치고 그가 내민 표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표의 정체를 확인하던 수아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며,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손부터 나갔다.
그의 손에 있는 표를 덥석 가져간 수아는 좀 더 자세히 그것을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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