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프롤로그
1.
2.
3.
프롤로그
드르륵.
수아는 ‘GOUL’이란 나무 팻말이 붙여진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가장 먼저는 교실 한쪽 벽면에 가지런히 쌓아 놓은 책상과 의자부터 보인다.
창가 정중앙에는 연핑크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
소파 위엔 곰 인형과 부드러운 재질의 담요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그 흐트러짐이 소파를 더욱더 안락하게 보이도록 했다.
소파를 기점으로, 주위엔 온갖 물건들이 장식품처럼 즐비해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괘종시계.
그 옆에 놓인 흔들 목마.
바닥엔 호두까기 인형.
오후 2시.
햇빛이 나른하게 내리쬐는 시각.
커튼 틈으로 들어온 태양광으로 인해 소파에 놓인 커다란 곰 인형의 일부가 밝혀진다.
한때는 먼지가 덮였던 빈 교실.
이젠 더 이상 허전하지 않은 교실.
물론 그 이유가 교실을 채운 장식물 탓도 있겠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아는 고개를 돌렸다.
세 쌍의 눈과 마주한다.
밤하늘이 비치는 바다. 군청색 눈동자 한 쌍.
먹구름에 뿌려진 빛나는 모래. 회색 눈동자 한 쌍.
어쩔 땐 화려한 보석, 어쩔 땐 수수한 바이올렛 꽃. 보라색 눈동자 한 쌍.
그들의 시선은 소파 위에 놓인 담요와 달랐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모두 수아에게 머물러 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만 보던 수아. 이내 그 입술 끝이 종용히 비틀렸다.
“나 빼고 정모라도 해?”
비꼬듯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를 피해 도망 온 곳이 고작 여기.
제가 만든 GOUL이라니.
어이없지 않은가.
게다가 저 셋은 모두 가슴 앞에 묘한 엑스자를 그리고 있었다. 마치 몹쓸 짓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어쩌자는 건지.
“내가 너네를 잡아먹어?”
답답한 마음에 대놓고 물어봤지만, 누구에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을까.
수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팔짱을 꼈다.
본격적으로 한 사람씩 추궁에 들어가기 위한 빌드업.
“김서운, 넌 내 소꿉친구라며. 근데 왜 날 안 도와줘? 왜 가이딩을 안 받겠단 거냐고.”
“…….”
제일 먼저 추궁받은 그가 어깨를 흠칫 떨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난처하다는 듯 남색 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은테 안경 너머에 있는 군청색 눈동자는 불안하게 일렁였다.
대답해 줄 수 없다는 의미겠지.
얕게 숨을 내뱉은 수아가 타깃을 바꿨다.
“기우솔. 너는 나랑 친구 하고 싶다면서. 손도 안 잡는 게 친구야? 가이딩도 안 받는 게 가이드를 둔 친구의 태도야?”
“…….”
그는 동그랗고 커다란 잿빛 눈동자를 내리깔며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수아보다 한 살 더 많은 연상이었지만, 기이하게도 그 표정이 몹시 잘 어울렸다.
역시 이곳, 해소 아카데미의 아이돌.
솜사탕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으로 인해.
마지막, 라스트.
수아는 결연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황규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짙은 흑발. 오묘한 보라색 눈동자. 그 밑에 찍힌 눈물점.
그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태생부터 타고난 뻔뻔함과 오만함은 숨길 수 없었다.
수아는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으로 토하듯 말했다.
“넌 뭔데 희망 고문이야. 그런 얼굴로 잘해 주면 다야? 가이딩 하게 해 달라는 내 부탁도 안 들어주면서?”
“…….”
뭔가 다를 줄 알았던 황규호마저 대꾸가 없자, 쥐고 있던 패를 모두 변기 물에 빠트린 기분이었다.
가이딩 하지 않겠노라, 절대로 가이드인 것을 들키지 않겠노라- 했던 과거의 봉수아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내가 가이드인 걸 꼭 밝혀야 하니까.’
너희는 나를 위해, 나는 너희로 인해.
손을 뻗었다. 그들과 ‘닿기’ 위해.
“아, 좀 만지자!”
1.
‘꿈인가?’
흐릿한 시야.
눈앞에 얼굴 없는 남자가 있다.
그리고 남자는 몹시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마치 사랑해 마지않던 누군가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왜 나 때문에 우는 것 같지?’
게다가 울음소리는 한 사람의 것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저 여자가 그 G급…….”
“어떡해…….”
G급? 내가 G급이라고?
자꾸 멀어져 가려는 초점을 억지로 붙잡아, 울고 있는 이들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 역시 눈앞의 남자처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남자에게서 울음소리 외에 다른 말이 들린 것은.
“수아야, 그만…….”
화들짝 놀란 심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가이딩 그만해, 제발.”
‘가이딩……?’
수아는 그제야 자신이 남자의 살갗을 꼭 붙잡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닿은 곳에선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 눈앞이 아득해지며─
시야가 완전히 암전됐다.

* * *

“허억!”
수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이상한 꿈. 믿고 싶지도, 현실로 일어나서도 안 되는 꿈이다.
‘이게 뭔…….’
개꿈이야.
정말 개꿈이었다.
비각성자였던 저가 어느 날 갑자기 G급으로 각성해 가이딩 능력을 갖게 된다니.
기계로만 가이딩 가능한 이 세상에 ‘인간 가이딩’이 웬 말일까.
게다가 자신은 그 가이딩이란 걸 하다가 죽을 운명인 게 틀림없다!
‘말도 안 돼.’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
세상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허공에서 느닷없이 열린 검은색 게이트. 그곳에서 마수, 곧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거다.
그것들은 사람을 먹잇감 삼아 활개 쳤다.
거대한 몸집, 선악을 식별하는 이성 따위 없는 괴물.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초반만 하더라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인간계에 나타난 ‘각성자’란 존재.
그들은 여태까지 평화로웠던 세상에 잊고 지낸, 자신만의 고유의 힘을 깨달은 존재들이었다.
그 힘은 포악한 괴물을 무찌를 수 있을 만큼 강력했고, 그리하여 에스퍼(초능력자)라 불리며, 헌터(사냥꾼)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히어로같이 나타난 이들 또한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폭주의 위험에 휩싸이는 것.
혈류를 통해 움직이는 초인적인 힘이 인간의 몸으론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폭주한 에스퍼는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심하게 이성을 잃으면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양가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수를 처리할 수 있는 에스퍼는 꼭 필요하다는 부류와 너무 위험하니 격리를 시켜야 한다는 부류.
그러던 세상에 포션 제조와 기계 개발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각성자가 나타났다.
마수는 죽기 전에 마석을 남기는데, 그것이 에너지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단 걸 발견한 덕이었다.
그리하여 ‘가이딩(guiding) 기계’가 개발되었다.
가이딩은 일종의 길잡이.
각성자들의 혈류를 통해 움직이는 힘을 갈무리해 줄 수 있는 도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에스퍼들은 모두 그 가이딩 기계를 제 목숨처럼 떠받들었다.
그 말인즉, 원래는 기계로만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는 뜻.
사람의 몸엔 마석이 없으니 ‘인간 가이딩’이란 게 있을 수 없고, 꿈에서 본 내용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거였다.
‘오늘 각성 검사 받는 날이라 그런가…….’
세상이 멸망해가던, 각성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각성 검사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고 이름만 남은 위대한 누군가께서 각성자를 구별할 수 있는 기계까지 만들고 가셨다.
각성자는 인류의 무기.
정부는 이들을 전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리하여 각성 검사는 비각성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아는 작년까지 비각성자였던 탓에 이번 연도에도 각성 검사를 받으러 가야 했다.
그게 바로 오늘인 거고.
‘아, 가기 싫은데.’
수아는 검사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꼭 기운에 먹혀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 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싫은들 어떠하리. 거부 권한 따위, 열아홉 살 여학생에겐 없었다.
‘아쉬운 쪽이 뉘에뉘에 해야지 뭐.’
돌덩이 같은 몸을 침구에서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