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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 유비 5권
유주의 영웅
“전장군. 이번 전투는 그대의 역할이 컸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아니지. 그대가 원담군의 앞을 막지 않았다면 삼면협공의 형국이 되지 않고, 관장군의 기습도 효과가 줄었을 것이네.”
망치와 모루 이론이 있다.
관우군은 가장 무서운 망치라 할 수 있지만, 모루가 없으면 적이 흩어져 대응하니 파괴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적절한 시기에 전예군이 원담군을 막아 모루 역할을 해 주었다.
그 결과 관우군의 습격은 원담군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유비는 이번 전투의 일등공을 장패에게, 이등공을 전예에게 내렸다.
삼등공은 관우다.
이번 전투로 유비군이 얻은 땅은 아주 넓다.
단숨에 청주의 제남, 제, 낙안의 세 지역을 얻었다.
지역 하나 먹으려고 제후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는 과거 원술이 여강 때문에 몇 년을 허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록 거의 빈 땅이긴 해도 지역 세 개를 한 번 싸움으로 얻었으니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유비는 이번 전투로 북해성 하나만으로는 만일의 경우 서주가 위협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유비는 북해를 둘로 나누어 남쪽을 성양이라 칭하고 새로 군을 설치했다.
강동의 단양을 나누어 건업을 설치한 것과 비슷하다.
이중으로 경계망을 치고, 앞쪽의 세 지역도 대비를 하면 이제 청주 전체를 잃기 전까지 서주가 침략당할 일은 없다.
비가 오면 땅이 굳어지고, 위기를 넘기니 달달한 열매가 따라오는 셈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익이 발생했다.
“전장군,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번에 유주의 공손범 장군이 요동을 통해 동래로 넘어왔습니다. 주군께 사관을 청하고 있으니 거두심이 어떨까 합니다.”
“공손범 장군이! 어서 모시게.”
공손범은 공손찬의 사촌으로 현재 공손가문의 남은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다.
원소가 유주를 장악한 뒤, 공손찬의 병사들을 흡수하여 차남 원희에게 맡겼다.
공손범은 신분을 감추고 몸을 숨겨 때를 기다렸지만, 원희가 점점 유주를 안정시켜 나가자, 신분이 드러날 위기에 처했다.
그때, 유비가 원소에게 격문을 날렸다는 소문을 듣고, 격문을 구해보았다.
당금 천하에 가장 세력이 큰 원소를 사정없이 욕하는 통쾌한 격문은 공손범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했다.
공손범은 즉시 유주를 떠나 요동을 거쳐 동래로 왔다.
그를 따르는 자도 적지 않았다.
차남인 원희가 백마의종 기병대를 흡수하면서 공손범을 따르는 그들에게서 말을 빼앗았다.
최고 정예기병대가 졸지에 보병대로 강제전입 당했다.
말을 빼앗긴 것은 목숨을 빼앗긴 것과 같다.
병사들은 이를 갈며 원한을 키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란 것을 알고 참았다.
그러다가 공손범이 유비에게 간다고 하자 모두 탈영하여 따라왔다.
“백마의종 생존자들을 모두 데려왔다고!”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얼마나 있을까?
말은 있어도, 정예 오환돌기병은 없다.
백마의종은 정예중의 정예로 키운다고 키워지는 병종이 아니다.
유비의 오환돌기병도 백마의종에 비하면 아무래도 한 끗발 떨어진다고 봐야 한다.
이는 관우가 잘 알고 인정하는 부분이다.
유비는 곧 공손범을 불렀다.
공손범은 유비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주군을 대하는 자세로 외쳤다.
“원수인 원본초와 싸울 영웅은 천하에 유장군밖에 없습니다. 유장군이야말로 유주의 대영웅이시니, 불초 공손범, 거두어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 하겠습니다.”
“허허허, 내 스스로 부족함을 잘 아는데, 어찌 영웅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단지, 뜻이 같으니 어려워하지 말고 내 진영에 머무시게.”
유비는 공손범에게 반존대를 썼다.
공손찬 세력의 수장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유비는 즉시 공손범을 상장으로 임명하고, 그가 데려온 백마의종 병사들도 상을 내리고 승진도 시켜서 자리를 잡도록 했다.
이로써 유비는 또 한 무리의 오환돌기병을 얻었다.
병사들의 희생을 각오한다면 당장이라도 천하를 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가슴 가득히 차올랐다.
이런 느낌을 가슴이 웅장해진다고 하던가?
기분이 좋았다.
*
땅을 얻었으니 다스려야 한다.
문제는 사람이 없다.
“이주시켜야겠군. 적당한 난민이 있을까?”
동소가 의견을 말했다.
“서주에 자리 잡은 청주인들 중 이제 나이가 들어 귀향을 원하는 자들이 꽤 있습니다. 그들 중 희망자를 이주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나쁘지 않군. 노인들은 다시 청주로 돌아가고 싶을 거야.”
청주 황건적은 노인과 어린아이들로 나뉜다.
과거 노인들에게 아이들을 맡겨 후일을 기약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중 노인들은 이제 기력이 완전히 쇠하여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렵다.
그들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죽어서 고향에 뼈를 묻고 싶어 한다.
유비는 귀향을 원하는 노인과, 그들을 보살필 자식 중 한 명을 묶어 희망자를 받았다.
희망자는 이주자금과 땅을 준다고 하니 이참에 차남, 삼남들이 노부모를 모시고 독립을 하는 길을 택했다.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니, 장패가 와서 또 다른 의견을 냈다.
“연주는 지금 꽤 위험합니다. 원소군이 언제 어디로 올지 모르기에 다들 불안해하고 있지요.”
“그렇겠지.”
“하지만 조맹덕은 연주의 경계를 철저히 해서 유민들이 연주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최대한 막고 있습니다.”
“흐, 조맹덕다운 일이군. 자기 백성이 타지로 나가는 건 용납 못 하겠다는 거겠지.”
“당연히 연주와 청주의 경계에도 관문이 설치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산은, 태산으로 통하는 소로에는 관문이 없습니다.”
“오, 내가 지나온 그 길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주군께서 허락하신다면 그쪽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이주희망자를 모집해 보겠습니다.”
“나쁘지 않군. 적극적으로 실행하게. 단, 이주자금을 많이 받지는 말게. 내 따로 보상을 할 테니.”
“태산 형제들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 빼먹기!
조조의 음모를 막아냈지만, 이걸 대놓고 표면화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조조와 싸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한 것을 그냥 넘기려니 속에 열불이 나기는 한다.
그런데 지금 장패가 가져온 계책이 유비의 뜨거운 속을 조금은 식히는 듯 했다.
그래, 옆쪽이 전쟁 났으니, 백성을 빼먹자.
조조 때문에 죽어 나간 서주 백성들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갚자.
유비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장패는 즉시 태산 형제들을 연주로 잠입시켰다.
조사해 보니 공손찬군과 원소군이 청주의 패권을 놓고 싸울 때, 적지 않은 청주인들이 연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그들은 이제 전쟁의 위험이 연주를 뒤덮고, 오히려 청주가 유비 때문에 정리되는 듯하여지자 다시 돌아오고 싶어 했다.
밀입국 사업은 크게 흥했다.
유비가 이주수수료를 제한했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 태산을 무사히 넘어 청주로 들어설 수 있게 안내하는 일이니 꽤 큰 수수료를 책정해도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산 형제들이 양심적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더군다나 이번 전쟁으로 창희가 새로 제의 태수직을 받았는데, 이주민들을 우선적으로 제에 들이니 이는 수수료도 받고 세수도 늘리는 이중의 이익이 되었다.
태산 형제들의 살림이 크게 좋아졌다.
이제 내부는 어느 정도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제 남은 건 외교.
즉, 조조, 원소와의 관계 정립이다.
그리고 유표와의 관계도 이번 기회에 다시 다지기로 했다.
*
“청주를 잃다니! 담이가 이번에 큰 실패를 했군.”
“잘된 일입니다. 이는 전화위복이라 할 만합니다.”
“곽군사, 그게 무슨 말인가? 청주를 잃었는데 잘된 일이라니?”
“청주를 잠시 맡겨둔 것에 불과합니다. 조조군만 멸하시면 그 뒤에는 청주가 아니라 유비군의 모든 것을 취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이번 일의 전말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이제 유비는 조조와는 더 이상 협력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 도우러 갔는데, 오히려 뒤통수를 치려 흉계를 꾸몄으니까.”
“그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유비군이 황하를 넘어 하북을 넘보려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유비군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전력으로 조조군을 상대하면 됩니다.”
“듣고 보니 이는 좋은 일이 맞군.”
조조만 상대하는 거라면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는 원소다.
곽도의 명쾌한 설명에 원소는 기분이 좋아졌다.
곽도는 원소의 기분을 되돌리는 데 성공하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작전은 곽도가 적극 지지한 작전이다.
문추를 보낸 것도 곽도다.
그런데 대패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면 군사인 곽도도 벗어나기 어렵다.
더군다나 지금 내부의 정치관계가 복잡하다.
곽도가 원소를 모시고 군권을 장악하여 조조와 싸우는 사이, 군권을 빼앗긴 기주 토박이 세력들이 원상에게 붙었다.
원상은 기주를 좋아했기에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대로라면 옛 원소의 사람들은 대물림을 하는 순간 실권을 잃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동안 견제당한 기주 토박이 출신들이 과거의 원한을 갚으려 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곽도는 과감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기주 세력이 원상쪽으로 갔으니, 곽도는 원담쪽에 붙기로 했다.
지금 상황은 원담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원소가 아예 원담을 호적에서 파내 버리겠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말렸다.
원담도 너무 큰 실패를 해서인지 투지를 잃은 것 같았다.
그래서 곽도는 원담을 택했다.
지금 원담을 지지하여 원담이 후계가 된다면?
그는 곽도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곽도는 원담을 잘 안다.
그는 버릇없고 자신만 아는 성격이지만, 의리를 따지는 면도 있다.
권세가의 순진한 이세가 잘 가지는 성격 중 하나다.
‘적어도 해볼 만은 하다. 장자의 권리는 중화의 전통이니까.’
곽도는 이제 원소가 아닌 원담의 곁에서 천하를 논하기로 결심했다.
곽도와는 반대로 원담을 버리고 원상 쪽으로 갈아탄 모사도 있다.
바로 봉기다.
이는 원담이 이번 패배의 책임을 봉기에게 돌림으로써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