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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 유비 4권
패왕의 본능
“이이이, 죽일 놈들!”
후방을 지켜주면 뭐 하나?
죽지 않아도 자기 발로 도망가 버리는데...
밤새 병사의 절반이 사라졌다.
장막도 사라졌다.
여포는 분노해서 부하들을 매질했다.
잘 지키지 않고 뭐했냐는 이유다.
그다음 날, 여포의 오랜 수하들인 후성, 송헌이 남은 부하 중 절반을 이끌고 도망갔다.
문제는 이들이 보병이 아닌 기병이라는 데 있다.
기병도 절반이 사라진 것이다.
이틀 만에 여포군의 군세가 삼분의 일로 줄었다.
사기는 바닥이고, 남은 장수인 고순과 장료, 성렴, 위속이 밤에 지키지 않으면 더 도망갈 게 뻔했다.
그때 진궁이 왔다.
진궁은 여포군의 꼬락서니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군이 일만은 남았으니, 수성은 가능합니다. 수춘성에서 농성하다 보면 조조군은 군량이 떨어져 물러날 것입니다.”
여포는 진궁이 오자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여포군은 겨우 수춘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포는 장료와 고순, 성렴, 위속을 보았다.
이들은 자신이 불리할 때 도망가지 않았으니,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너희들 네 사람이 내 진정한 충신이구나. 나 여봉선, 기필코 오늘의 위기를 넘기겠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면 너희들이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 옆에 있어 주었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
뒤늦게 철이 든 것일까?
여포는 웬일로 부하들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했다.
진궁은 그 모습을 보고 아직은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장료, 고순은 성격상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고, 성렴 또한 여포의 어릴 때부터 친구라 배신할 가능성이 극히 작다. 또한 위속은 여포의 친척이다.
“자고로, 믿을만한 사람 다섯 만 있으면 능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 온후께서는 능히 재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나 여봉선, 아직 죽지 않았다!”
여포는 용기백배하여 끝까지 싸울 의지를 세웠다.
그런데 그날 밤, 여포의 친척인 위속이 여포가 잠든 틈을 타서 여포의 방천화극과 적토마를 훔쳐냈다.
“여봉선, 네놈이 내 부인을 겁탈하고도 그냥 끝날 줄 알았지? 내 네놈이 가장 힘들 때 배신하려고 지금까지 참고 버텼다.”
여포는 무력 면에서는 천하제일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인성은 바닥을 뚫고 지하실에 파고드는 수준인데, 그중 제일은 수하의 부인을 겁탈하는 습관이 있다.
애초에 양부인 동탁의 첩인 초선과 사통하고, 이게 걸릴까봐 동탁을 죽인 것만 해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어지간히 막장인 군주들도 수하들 부인은 안 건드린다.
잘못하면 배신당할 수 있으니까.
당사자 말고도 다른 수하들 역시 그런 주군에게는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포는 그런 기본적인 개념조차 없는 최악의 난봉꾼이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위속은 이를 갈았지만, 이걸 항의하는 순간 죽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알아도 모른척하고 참고 버텼다.
오히려 충성을 다했다.
오직 한순간, 치명적일 때 여포를 배신하기 위해서. 
“이제 어떻게 하지?”
위속은 서쪽에서 오고 있는 조조군을 보았다.
“조조군은 싫은데...”
연주에서부터 워낙 치열하게 싸웠다.
위속이 죽인 자들이 적지 않다.
항복하면 조조는 받아줄 것이다.
하지만 수하 중 위속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없다고는 말 못 한다.
“그냥 서주로 가자. 적토마도 있고, 유주 사람이 그래도 병주 사람을 박대하지는 않으니까.”
유주 출신인 유비는 병주기병의 장점을 잘 안다.
병주기병과 유주기병은 서로 장단점이 있으니, 유비는 새로 병주식 기병대를 가지고 싶어 할 가능성이 크다.
위속은 마음을 굳히고 서주로 향했다.
*
“위속! 위속! 어째서!”
여포는 기가 막혀 방안의 기물을 모두 부수며 난동을 피웠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냥 도망간 게 아니다.
방천화극과 적토마를 가지고 도망갔다.
진궁은 위속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료와 고순은 위속이 떠났다는 말을 듣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위 장군 부인도 건드렸었나 보군.”
“저와 장군이 혼인을 안 해서 다행입니다.”
장료와 고순은 이미 나이가 꽤 있는데도 혼인을 안 했다.
여포의 나쁜 습관을 알고 있기에, 문제가 생길 상황을 아예 안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그날부터 여포는 기력을 잃었다.
할 마음이 싹 사라진 듯 매일 술만 마시며 ‘위속...위속’ 하고 중얼거렸다.
농성의 지휘는 진궁과 장료, 고순, 성렴이 맡아야 했다.
드디어 조조군이 수춘성을 둘러싸고 공성을 시작했다.
조조군은 식량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 부족하진 않았다.
수춘성은 그렇게까지 튼튼한 성은 아니다.
성의 보강도 그다지 되어 있지 않다.
조조는 늦어도 석 달 안으로 수춘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군사 곽가도 동의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순욱이 허도에서 보급을 보내올 것이다.
계산해 보니 대충 견적이 나온다.
“서두를 필요 없다. 무모한 피해는 줄여라. 착실하게 성문을 부숴라!”
조조는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지겨운 여포를 드디어 잡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조조는 이게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았던 큰 장애물을 하나 치우는 것이라 느꼈다.
여포군은 하루하루 확실하게 멸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살아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
유비는 서주의 하비성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매일 같이 관우, 장비와 겨루고, 조운도 강동에서 불러 수련에 참여시켰다.
관우의 일격은 은밀하면서도 날카롭다. 
동시에 만근의 힘이 실리니 유비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장비의 찌르기는 궤적이 지저분하면서도 강력하다. 
사모의 무서운 점이 날이 구불구불하여 막아도 이쪽 검날을 타고 밀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막으면 안 되고 쳐내야 한다.
조운의 창은 이미 경지에 달해 변화가 무한하고 빠르기가 벼락과도 같다. 
속도와 정교함에 있어서는 관우와 장비조차 닿을 수 없는 수준이다.
서로 다르지만 각자 최고인 셋과 대련을 하고, 사이사이 몸을 단련한다.
유비의 몸에 약간 껴 있던 살이 모두 강철 같은 근육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경이 날카롭게 벼린 칼날과도 같아서 ‘역발산기개세’가 발동하지 않아도 조운의 창날이 보일 정도다.
“후아, 형님, 못 당하겠습니다.”
장비가 뒤로 물러나며 패배 선언을 했다.
지금 유비는 관우도 장비도 전혀 이길 수 없는, 그야말로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
“근데, 왜 갑자기 수련을 하는 겁니까? 조조군과 여포군이 싸우는 걸 구경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유비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몸이 자꾸 나를 자극하네. 여봉선하고 한번 붙어보라고.”
“형님, 군주 된 몸으로 적하고 직접 겨루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관우가 정색하고 말했다.
유비의 강함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여포다.
만에 하나, 유비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순간 유비군의 대업은 끝나버린다.
“차라리 제가 대신 나가겠습니다. 형님하고 수련하는 동안 저도 한 단계 더 강해진 것 같으니, 능히 여봉선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됐다. 여봉선만큼은 내가 직접 상대한다.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유비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관우와 장비는 안색을 굳혔지만, 더 말하지는 않았다.
조운은 말릴 생각도 안 했다.
드디어 스승님이 정진정명 유일한 천하제일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유비는 하늘을 보았다.
누군가 그에게 패왕의 힘을 주었고, 이 세계로 보냈다.
다 좋은데, 이놈의 힘이 가끔 투정을 부린다.
과거 손견과 싸울 때도 이랬다.
피할 생각이 전혀 안 들고, 그냥 싸워서 이기는 것만 생각했다.
이는 유비가 마음속으로 손견을 싸워볼 만한 적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포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놈의 심장이!”
여포를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불이 붙은 듯 격해진다.
싸우고 싶다고 몸속에 담긴 힘이 울부짖는 듯하다.
참으려 했다.
그런데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여포가 조조에게 잡혀 죽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유비는 일부러 둘 사이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포가 조조에게 죽으면, 내 안에 있는 힘이 실망하지 않을까?
이 힘은 유비 자신의 힘이다.
남을 실망시키는 것도 슬픈 일인데, 자기 내면을 실망시켜도 되는 것일까?
어느 순간 유비는 모든 잡념을 버렸다.
오직 그의 머릿속에는 여포와 결판을 내겠다는 결심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