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잘 팔릴 남자
2. 베르겐의 연인들
3. 새로운 여름
4. 사랑으로의 초대
1. 잘 팔릴 남자
“대공은 정말 잘 팔리겠어.”
기꺼운 미소로 말을 마친 모드가 사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제 아가씨의 환한 얼굴과 달리 사라는 사색이 된 낯으로 두 손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거의 빌고 있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아가씨이…….”
하지만 모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법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그 웃음이 파도의 물결치는 소리와 한데 얽혀 초여름의 밤을 아득히 울리고. 밤이 물든 모드의 아마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옅게 물든 그녀의 장밋빛 뺨이 드러났다.
무엇이든 들뜨기에 좋은 여름밤. 우거진 녹음 가운데 자리한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대공을 바라보는 모드의 눈에 생기가 비쳤다. 이틀 전, 수도인 네스를 출발해 베르겐에 도착한 이래 처음 내비치는 열의였으므로 그녀의 얼굴에 햇살 같은 웃음이 흘렀다.
반면에, 사라는 몸서리를 쳤다. 어째서 저와 제 아가씨가 이리 숨어 대공을 훔쳐봐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던 터다. 그녀가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였다.
“그리아 여왕의 재혼 자리도 가능할 것 같은데……. 대공은 초혼이니, 그건 좀 아까운가?”
“아가씨 제발……. 제발! 나가서 이야기해요. 이쪽이에요.”
아가씨의 해맑은 언사에 사라의 손발이 달달 떨리는 지경까지 이른 것과 달리 모드는 언제나처럼 느긋했다. 어디 그뿐인가? 살랑살랑 콧노래를 흥얼거릴 여유까지 있던 터였다.
“아직까지는 훌륭해.”
노랫소리를 따라 모드의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편한 셔츠 차림의 대공은 중앙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곧게 뻗은 긴 다리가 퍽 우아한 사내. 앉은키가 그 정도니까 제법 장신일 테고.
어깨도 그만하면…….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를 떠올린 모드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의 시녀인 사라만이 울상 짓고 있을 뿐이었다고.
모드는 사라의 손에 붙들린 채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대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지않아 성 입구에 이르자 사라가 조심스레 모드의 손을 놓고 수그려 앉았다.
“호텔에 도착하면, 목욕물부터 받아 드릴게요.”
사라는 모드의 치마 밑단을 정리한 뒤 일어나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엉겨 붙은 나뭇잎을 조심스레 떼어 내었다.
“고마워.”
이에 질세라 모드도 부드러운 손길로 사라의 머리칼에 걸린 나뭇잎들을 정리해 주었다.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제 아가씨의 상냥함. 그 상냥함에 웃음을 짓는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사실 좀 재밌었지?”
수채화 빛으로 물든 모드의 뺨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뇨?! 전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려요!!”
사라가 울상인 얼굴로 입술을 샐쭉거리자 모드가 푸스스 웃어 버렸다.
“확실히, 내기로 손해 볼 일은 없겠어.”
아직 웃음기가 어린 어조였지만 제법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는 유능한 사업가로 사업을 키울 기회라면 절대 흘려보내는 법이 없던 터였다. 모드가 희열에 눈을 빛냈다.
* * *
한 시간여를 달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 이곳은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 ‘벡포드’로, 여름이면 휴양을 목적으로 모여든 인파가 북적이고는 하였다.
벡포드는 특히 ‘한밤의 태양’이라 불리는 호텔 라운지 커피 하우스가 유명했는데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한 조명과 빛나는 샹들리에가 압도적인 면모를 과시하는 곳이었다.
‘한밤의 태양’이란 이름에 걸맞게 어둠이 내리지 않는 이곳은 자정을 넘긴 시각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라운지가 객실로 향하는 계단과 맞닿아 있는 탓에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지 않던가. 귀부인들의 대화 소리에 계단을 오르던 모드의 시선 또한 한 곳을 향했다.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는 사에나 양이니, 사에나 양에게 주시려던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누가 봐도 모드 양에게 마음이 있으시니 모를 일이죠.”
샹들리에의 꼭대기. 가장 빛나는 곳에 자리한 다이아몬드 위로 그녀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얼마 전, 사교계를 뒤흔들었던 문제의 다이아몬드였다.
귀한 유색의 핑크 다이아몬드로 황후가 곧 책봉될 황태자비의 티아라를 위해 구매하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니, 이를 두고 임박한 황태자비 책봉과 그 자리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가 연일 화제였다.
하지만 무난하게 황후의 품에 안길 것으로 예상됐던 다이아몬드의 행방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튀면서 이야기의 주제도 달라지고야 말았다.
난데없이 다이아몬드 경매에 나타나 원하는 만큼을 주겠다는 펠릭스 벡포드 공작의 배포에 황후의 대리인 자격으로 나섰던 스튜어드 백작가의 차남도 더 이상 피켓을 들어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스튜어드 백작가의 차남이 오른손이 잘린 채 국경의 험지로 치워졌다는 소문이 수도에 파다했지만 늘 그러했듯 잠시의 소란과 함께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펠릭스 공작이 차지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한밤의 태양에 자리하게 터다. 다이아몬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이들이 벡포드의 유명세에 힘을 보태고, 가지지 못할 것을 구경이나 하라는 펠릭스 공작의 조롱은 다이아몬드에 빛을 더했다. 문득 다이아몬드와 제 이름으로 가득 찬 싸구려 타블로이드지를 떠올린 모드가 혀를 찼다.
재수 없는 다이아몬드…….
그녀는 이내 건조한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다이아몬드도 펠릭스 공작과 황후의 쓸데없는 신경전 따위도 관심사가 되지 못했으므로.
지금 그녀의 관심은 온통 황제와의 내기에 쏠려 있었다. 작은 머릿속이 온통 내기 생각으로 가득했다.
모드는 체스 자체에 큰 흥미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황제인 레오폴드 라이즈웰과의 체스 내기를 좋아했다. 내기에 이겼을 때 주어지던 보상과 성취 때문이었다.
보상은 책으로만 보았던 이국의 달콤한 사탕에서부터, 남쪽 휴양지에 자리한 별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모두가 그녀의 성취를 자극하는 유일하고 아름다운 것들임이 분명했기에. 그 보상과 성취는 언제나 모드를 체스판 앞으로 이끌었다.
이 즐거운 체스판이 황궁에서 하블레인 저택의 별관으로 옮겨진 것은 황제의 새 황후가 모드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때였다. 황궁의 유리온실에서 두는 체스가 좋다는 그녀의 말에도 황제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으니.
주빈실을 가득 메우던 웃음소리와 함께 지속되던 내기가 잦아든 것은 모드가 숙녀로 자라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빛나는 사교계 입성과 더불어 그녀의 사업까지 성공 가도를 달리며 지나치게 바빠졌던 탓에 실로 오랜만의 내기였다.
때문에 모드가 얼굴 가득 기쁨을 드러내며 황제를 맞이했으나 즐거운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체스판을 채 펼치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쏟아진 그의 전언 때문이었다.
“이번엔 체스가 없는 내기란다.”
“체스가 없는 내기는 처음인 듯해요, 폐하.”
모드가 레오폴드를 향해 살갑게 웃어 보였다.
“하하. 그랬던가?”
덩달아 부드러운 웃음을 짓던 레오폴드가 본론을 꺼내 든다.
“이 내기는 건국제 연회에 카일을 대동하는 쪽이 승자가 되는 것이지.”
난데없는 이름과 함께 등장한 파격적 제안이었다. 모드가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자 레오폴드도 기꺼이 눈을 마주했다.
“베르겐에 계신다던 대공 전하……. 말씀이시죠?”
하여 채 펼치지 못한 체스판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이게 된 터였다.
“그래. 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을 테지.”
소파에 기대앉은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고. 황제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화를 이끌었다.
“단순하지만 난항이 예상되는 내기이니…….”
난항. 그의 본심이 묻어나는 단어.
“지는 쪽은 봐주고 이긴 쪽에게 몰아 주는 것으로 하는 것이 공평하겠지? 모드, 네가 이긴다면 너에게 투자하마. 내 사비로. 네가 원하는 만큼.”
황제가 대공을 사교계의 매물로 내놓으려 한다.
“내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야. 너의 선택을 존중한단다.”
“네, 폐하.”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치고는 앞뒤의 문맥이 눈에 띄게 상충하는 말이었다.
“다만, 이긴다면 투자금과 상징성까지 전부 손에 넣겠지. 물론, 그 가치는 네가 더 잘 알 테지만.”
모드가 미처 숨기지 못한 황제의 초조함을 엿보았다. 대공이라면 그 태생부터가 어떤 매물과도 비교조차 안 될 우위를 점한 사내일 터.
‘그런 아들을 가지고도 저리…….’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황제의 태도에 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말처럼 황제의 사비로 이루어질 투자와 상징성이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 건국 이래 황제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비를 내어 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유일한 영예를 가지게 되는 일이다.
모드는 이것이 자신의 일생에 한 번뿐일지도 모를 기회임을 확신했지만 이 내기를 바로 수락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으니까.
어쩌면 대공이 하자가 있는 매물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녀는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았다.
“허락해 주신다면 먼저 대공 전하를 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폐하.”
단숨에 서늘한 눈빛을 지워 낸 모드가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하하!”
대공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맹랑한 태도였으므로. 레오폴드가 주빈실이 크게 울리도록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부디, 이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보통의 경우라면 황제의 언짢음과 노여움을 살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녀가 하블레인이라는 점이 예외로 작용하였다. 막역한 클레브의 딸이며 또한 자신도 아끼는 모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허락하지.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으마.”
그는 모드의 영민함과 당당함을 좋아했다.
지금도 황제를 상대로 저런 여유 있는 태도라니.
“감사합니다. 폐하.”
자신이 넘치지만 무례하지 않고, 빈틈없이 우아하다. 레오폴드의 시선이 오래도록 모드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그만 환궁해야겠구나. 저이의 표정이 영 좋질 못해.”
레오폴드가 짓궂게 코를 찡그리며 출입문을 지키고 선 무표정의 근위대장을 가리켰다.
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큰 창 위로 그의 시선이 닿았다. 어둠이 스민 도시 사이로 내린 불빛들이 밤을 두드리고 있었다. 황제는 신소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일어났다.
근위대장의 채근을 받으며 주빈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레오폴드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선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미처 매듭짓지 못한 말이라도 떠올린 모양새로 불쑥 모드를 돌아보았다.
“대공은 다음 주면 또 어딘가로 사라질 테니, 이번 주에 베르겐에 도착해야 만날 수 있을 테지.”
레오폴드가 가볍게 구긴 눈썹과 함께 골치가 아프다는 듯 오른쪽 관자놀이를 짓누르자, 모드가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늦지 않게 출발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폐하.”
주빈실을 나서는 황제를 뒤따르며 모드가 싱긋 웃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태운 마차가 하블레인 저택의 정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짧은 배웅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녀의 눈빛이 건조하다.
저택 중앙에 자리한 그레이스 홀을 지나, 방으로 향하는 2층 계단을 오르는 모드의 얼굴에는 더 이상 웃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저와 제 아비를 향한 황제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모드는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에서 보았던 그는 평생을 바렌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온 정 많고 온화한 성품이었으니까.
속내야 어찌 되었건 제 자식을 향한 마음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핑계 삼아 직접 나선 것일테지. 자식 일 앞에서만큼은 모두가 평등한 것임을 모드는 단언했다.
황제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아끼지만 이용하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나.
평소처럼 사용인들을 물린 채 능숙한 손길로 환복을 마친 모드가 제 방 오른편으로 나 있는 큰 창 앞에 섰다. 아름다운 가로수 길과 국립 바렌 오페라 극장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었다. 오페라 극장은 본격적인 사교 철을 맞아 어느 때보다 붐비고 있던 터였다.
모드가 무감한 얼굴로 사교장으로 변모한 극장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자 극장 중앙에 자리한 분수 광장은 짝을 지은 신사 숙녀들로 가득했다. 때맞춰 대미를 장식할 색색의 불꽃들이 밤하늘을 물들였다.
‘과연 황제의 돈과 영예를 내게 줄 수 있는 사내일지…….’
불확실한 물음에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한동안 감흥 없는 낯빛으로 여름밤의 불꽃놀이를 관망하던 모드가 생각을 마친 듯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곧 돈이며 투자였으므로 그녀는 길게 망설이지 않았다.
황제의 목적은 대공의 성공적인 사교계 입성. 모드 하블레인을 이용해 대공을 사교계에 선보이려 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내기가 황제의 성공 전략이 될 수 있을지가 모두 그녀의 손에 달린 것이다.
모드는 결정을 마친 순간부터 모든 것을 뇌리에서 지웠다. 대공의 성공적인 사교계 입성 뒤에 그녀가 얻게 될 명성과 추문도, 자신을 향할 황후의 날이 선 반감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 * *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모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베르겐에 도착한 지 3일째. 대공에게선 똑같은 내용의 답장만이 오고 있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공을 대신해 그의 집사가 보내온 편지였다.
비슷한 말머리로 시작하는 내용은 끝맺음도 대부분 비슷했다. 여름휴가를 보내고 계신 전하께서 직접 답장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이를 이해해 달라는 뭐, 비슷한 내용.
<레이디 모드께.
안녕하십니까. 보내 주신 편지들은 잘 보았습니다.
라이즈웰 대공 전하께서는 여름휴가 중으로 직접 답장하지 못하게 된 점에 대하여
무척이나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이해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머무는 동안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집사 밀튼 드림.>
해군 기지로 정시 출근을 하고 있으면서 여름휴가? 세상 무성의한 거짓말이었다. 모드가 소파에 누워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하…….”
그녀는 들고 있던 편지들을 왼편에 자리한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대충 놓으며 작게 탄식했다. 워낙 알려진 것이 없는 대공이시라 각오는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으므로. 그저 떠도는 이야기들로만 그를 추측해 볼 뿐이었다.
모드의 눈에 비친 대공은 마치 표류하는 듯 보였다. 제국이 자랑하는 유능한 군인인 것과는 별개로 그는 육지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었다. 크고 작은 해전부터 먼 해역의 순찰까지 도맡아 하며 일생을 전시처럼 살고 있는 남자였다.
그런 이유로 장성한 대공을 제대로 마주한 이가 거의 없었다. 물론 입대하여 그를 마주한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떠벌리던 무용담과 함께 수장되어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소득이 있는 만남은 아니었다. 이렇게 호사가들의 눈에서 멀어진 대공이 그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니까.
하여튼 가십지 한 줄이 아쉬운 날이 다 있고…….
모드가 실소와 함께 짜증 섞인 얼굴로 객실 천장의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어. 때 이른 추문은 사양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정이 생겼어.”
모드가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움직임에 덩달아 분주해진 사라가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오늘 말씀이시죠? 급한 일인가요?”
“응. 한 시간 뒤면 해군 기지 앞에 도착해 있을 거야.”
“해군이라면……. 대공 전하를 뵈러요?”
눈치라면 빠지지 않는 사라가 한발 빨랐다.
“그래, 더는 못 기다려. 시간도 없고 네스도 너무 오래 비웠어.”
그녀는 제 아가씨가 저보다 먼저 캐비넷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빠르게 그 앞을 막아섰다.
“어……. 얼른! 준비할게요.”
사라가 종종걸음 치며 캐비닛 속의 옷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던 터였다. 물론 가늠해 본다 한들 별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막을 수 없는 가십이라면 제 아가씨를 마주한 모든 이들에게서 경탄이 터지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사라의 야심 찬 계획이었다.
모드의 앞으로 세밀하게 주름 잡힌 시폰 드레스가 내밀어졌다. 파도를 닮은 청람색과 우거진 초목이 한데 어우러진 듯한 고급 드레스였다. 한데 모드는 드레스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입으니까 눈에 띄는 거야. 아 저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