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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게임 속 악역의 시한부 딸입니다 4권
 
지은이 : 김촉촉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김촉촉, 2025
※ ISBN : 979-11-7408-073-8
※ 가격 : 3,000원
※ 발행일 : 2025년 05월 29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약선의 제자
 
 
며칠간은 고생해야 할 것 같다 싶더니. 정말 죽다 살아났다.
이렇게나 심한 한증은 빙의 직후 때나 겪었던 것 같은데.
주화입마 직전 단계까지 간 여파가 생각보다 훨씬 더 거셌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폭설과 함께 본격적인 한파가 시작되기도 했다.
초가을부터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다며 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하더니, 정말 무지막지하게 추웠다.
습도 유지를 위해 떠다 놓은 물이 얼어붙는가 하면, 창호지에도 성에가 낄 정도였다.
이런 와중 화로의 불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데다 중간중간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기까지 해야 하니. 겨울을 나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고되었다.
약선 어르신이 직접 조제해 주신 탕약과 하루 두 번의 온천욕으로 몸을 뜨겁게 데우지 않았다면 진즉 얼어 죽지 않았을까?
그나마 오리털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추운 날씨 덕에 외롭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냐고?
어차피 화로에 불을 잔뜩 때야 하는 김에, 온기를 더할 겸 내 방으로 식구들이 죄다 몰려왔다는 뜻이다.
약선 어르신과 당평 할아버지, 심지어는 두 사람과 함께 온 진이윤도 떡하니 내 방에 자리를 잡고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원래 내 방엔 고정 멤버가 정해져 있었다는 거지.
이번 사건 이후 과보호가 훨씬 더 심해진 아버지와 사교성이 0에 수렴하는 백무현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내 최대의 고민거리는 바로 백무현과 진이윤의 은근한 신경전이었다.
“영아, 여기 이 군고구마 좀 먹어 볼래? 껍질 다 까 놨어.”
“차라리 이 알밤을 먹어. 고구마 먹으면 배불러서 저녁 먹기 힘들잖아.”
“따끈한 차를 곁들여서 조금만 먹으면 괜찮을 거야.”
“차는 좀 식혀서 마셔. 지난번처럼 또 혀 델라.”
……이럴 거면 차라리 치고받고 싸움을 해.
대체 왜 나를 가운데 끼워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건데? 그것도 쓸데없이 빙빙 돌려 말하면서!
시종일관 서로를 노려보며 은근한 기 싸움을 벌여 대는 통에 마음이 불안해서 도무지 쉴 수가 없었다.
무공 수련을 쉬고 있는데도 주화입마가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키면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둘 다 그만 좀 할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정말 왜들 그래. 기운이 그렇게 뻗치면 차라리 밖에 나가서 수련을 해.”
“영이 네가 아픈데 어떻게 그래. 나는 네 오빠잖아. 오라비가 여동생을 챙겨 줘야지.”
이걸 넉살이 좋다고 해야 해 아니면 여우 같다고 해야 해?
천연덕스러운 진이윤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방문 판매 같은 거 하면 정말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잠시.
백무현이 어쩐지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약선 어르신과 네가 혈연관계인 줄은 몰랐는데.”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과 삐죽 튀어나온 입술. 누가 봐도 나 삐졌소, 라고 광고하는 듯한 모습이다.
‘얘 토라지면 은근히 오래 가는데, 큰일이네.’
어찌 달래 줘야 하나 싶어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그에 황급히 당과라도 하나 집어 입에 물려 주려는데, 아뿔싸. 진이윤이 먼저 선수를 쳤다.
“영이 어머님께서 저와 같은 진가였습니다, 백 소협. 그러니 영이와 저는 사촌 같은 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니, 초면에는 낯을 많이 가린다면서요. 수줍어서 말씨도 사내애답지 않게 조심스럽다면서요.
조곤조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상대에게 비수를 날리는 건 대체 뉘 집 손주랍니까?
약선 어르신의 소개가 거의 사기급일 줄은 몰랐다. 내 앞에서도 얌전하고 순하기만 해서 감쪽같이 속았어.
상상을 초월하는 진이윤의 내숭 레벨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와중에 백무현은 어디 당장 해명이라도 해 보라는 듯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우, 우리 어머니가 진씨인 건 맞아. 촌수는 좀 멀지만, 크게 봤을 땐 친척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윤 오라버니 말이 영 틀린 건 아니긴 한데…….”
아니 근데 내가 왜 이걸 이렇게 진땀 빼며 해명하고 있는 거지? 막말로 우리 어머니가 월족인 게 내 잘못도 아닌데 말이야.
뭔가 억울해져서 울컥 목이 막혔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 해명 아닌 해명이 효과가 있었는지 백무현이 한결 너그러워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쨌든 친사촌은 아니라는 거네. 그러면 사형제 관계인 우리 사이가 더 가깝지 않나? 스승은 아버지와 같으니, 우리는 한 아버지를 두고 있는 셈이잖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아니 근데 누가 누구와 더 가까운지 그거 따져서 대체 뭐 하게요.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친사촌이자 사형제인 남궁진과 가장 가까워요. 비록 지금 이 자리엔 없지만!
하지만 이 별것도 아닌 게 나름의 자존심 싸움이라도 되었던 모양인지, 약선 어르신이 갑자기 이 유치한 언쟁에 불쑥 고개를 들이미셨다.
“크흠! 뭐, 사제 지연과 사형제 지연은 천륜 그 이상의 인연이긴 하지. 천살성인 네가 그 소중함을 어찌 알지는 의문이다만.”
아니, 그냥 천살성인 백무현이 아니꼬워서 시비를 건 것일지도 모르겠다.
백 세 넘게 사셨으면서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에게 못되게 굴지 말라고 말려야 하나.
하지만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난감한 듯 지켜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좀 그렇단 말이지.
차라리 딴소리를 해서 화제를 바꾸기라도 해야 하나 싶던 찰나. 백무현이 아주 당돌하게도 약선 어르신께 정면으로 맞섰다.
“스승님은 제게 하늘과 같고, 영이는 제 은인이니 마치 몸과 같이 소중합니다.”
“말은 잘하는구나.”
“말뿐이 아닙니다.”
“증명할 수 있느냐? 네가 천살성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 설령 천살성일지라도 위험하지 않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집요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백무현에게 쏟아졌다.
화경의 경지를 아득히 넘은 노고수의 압박에 겁을 집어먹을 법도 하건만, 백무현은 여전히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평생에 걸쳐 지켜봐 주겠다고 했습니다.”
“뭐야?”
“제가 엇나가지 않도록 곁에서 일러 주고, 이끌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모르는 제 안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알려 주고 가르쳐 주겠다고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내뱉는 말들은 깊은 신뢰의 방증.
처음 그가 아버지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잘 지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거야 원. 괜한 걱정이었잖아?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적응을 마친 듯한 백무현의 모습에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기도 잠시. 약선 어르신이 못 이기겠다는 듯 짧은 숨을 뱉으며 볼멘소리를 하셨다.
“……거참 대단한 스승 났구나. 네가 스승 복은 타고났어.”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속으론 내심 감탄하시는 거 다 알아요.
그래도 일이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된 것 같아 기뻐하려던 차.
백무현이 불쑥 한마디 덧붙였다.
“스승님이 아닙니다.”
그러더니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미처 상상조차 못 했던 폭탄 발언을 쏟아 내었다.
“영이가 그리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예? 내가요?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었다고?
난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황당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나는 입안에 든 알밤을 미처 삼킬 생각조차 못 하고 급히 물었다.
“그, 너 뭔가 착각한 거 아냐?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자 백무현은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불퉁한 목소리로 답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거든. 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뿐이니, 앞으로 내가 잘 알려 줄게, 라고.”
뭐지? 그렇게 말하니 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백무현을 교화시키는 것은 구음절맥을 치료하는 것만큼이나 공들여 진행 중인 계획이었다.
그러니 그런 말로 녀석을 설득하려 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래도 평생에 걸쳐 지켜봐 주겠다고까지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거기까지 가면 너무 프러포즈 같지 않은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는지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살짝 발끈하며 나섰다.
“무현이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냐? 너 정말로 저 녀석과 미래를 약속한 게야?”
“도, 도와주겠다고 한 건 맞는데 평생이라고는 말 안 했어요.”
애초에 나는 시한부 인생이다. 당장 내 앞가림을 하기도 버거운데 어떻게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하겠어. 그것도 열 살짜리 꼬맹이와!
하지만 백무현은 오히려 내 이런 대답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하지만 너 언제까지만 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 그건 평생 책임지겠다는 소리 아니야?”
야! 그 말이 어떻게 그렇게 되냐!
요즘은 보험도 사망 보험금 나오는 생명 보험을 제외하면 평생 보장형이 거의 안 나오는 판국인데!
제품 보증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옛날에나 가전제품 10년 보증 20년 보증이었지, 요즘은 3년도 잘 안 해 주더라.
물건의 내구도와 책임감이 함께 떨어지고 있달까.
어쨌거나 세상은 그렇게 각박하다. 그리고 그건 여기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힘 있는 놈이 아니고서야 아무것도 보장받을 수 없는 세계가 이곳 무림인데 그런 말장난 같은 논리가 통할 것 같냐고.
아니, 오히려 그래서 통하는 건가? 백무현은 여차하면 내 모가지를 꺾을 수 있는 강자이니까?
뭔가 어이가 털리는 기분이었지만 달리 반박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에 나는 아예 이 자리에서 발언을 좀 더 명확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책임지는 건 힘들지. 그리고 아무리 한 식구가 되었대도 우리가 혼인할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평생 붙어 있겠어?”
아직 어린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잘생긴 그였다. 특별히 성격에 큰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대로 잘 자라 주기만 하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테지.
나는 쓸데없이 백무현의 연애 사업을 방해하다가 뭇 여인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 싶지 않았다.
이 동네는 여자도 칼 들고 다닌다. 하나뿐인 목숨인데 아끼며 살아야지.
하지만 나의 이런 배려가 백무현에겐 오히려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꽤나 불쾌하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그 말은 언제고 나를 버리겠다는 뜻이야?”
아니 말이 또 왜 그렇게 되나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이 녀석 은근히 극단적이다. 뭔 말만 하면 그렇게 홱홱 끝장을 보려고 해?
나는 군밤을 먹느라 텁텁해진 입안을 찻물로 깨끗이 씻어 넘긴 뒤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