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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게임 속 악역의 시한부 딸입니다 3권
 
지은이 : 김촉촉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김촉촉, 2025
※ ISBN : 979-11-7408-072-1
※ 가격 : 3,500원
※ 발행일 : 2025년 05월 29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바가지에는 진상이 답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소화를 시킬 겸 느긋하게 시전 거리를 걷다가 성도에서 가장 큰 포목점에 들어섰다.
과연 촉금의 산지답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이 사방 천지에 잔뜩 전시되어 있었는데, 한 걸음 뗄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많은 걸 전부 기계가 아닌 사람이 손으로 직접 만들어 냈다니. 저건 심지어 폴리에스테르 같은 합성 소재가 아닌, 잠사로 뽑아낸 찐 비단이잖아. 대체 누에를 얼마나 키우는 거지?’
과장 조금 보태 사천의 절반 정도가 누에를 키우는 농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창 입을 떡 벌린 채 구경을 이어 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잘 차려입은 사내 하나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뭘 찾으러 오셨습니까?”
“여기 어르신과 아이들 옷을 좀 구매하려 하는데, 어디 안내 좀 해 주겠나?”
“아이고 물론이지요. 편히 앉아서 보실 수 있도록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들어가지.”
우리의 옷차림이 화려했던 탓일까.
자유롭게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둘러보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사내는 우리를 매장 2층의 꽤 널찍한 공간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작은 다탁과 의자, 그리고 청동으로 된 전신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얇은 휘장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제법 은밀하고 아늑해 보였다.
‘일종의 VIP 공간인 걸까? 상술이 제법이네.’
이렇게 특별실을 만들어 손님을 따로 대접하면 왕족이나 세도가 사람들에겐 그들의 특권 의식을 채워 줄 수 있고, 일반 손님들은 안전하고 편안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다.
심지어 보여 주는 물건의 종류를 제한하여, 은근슬쩍 보다 비싼 상품을 사도록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사천 넘버원 포목점답네. 역시 대박 집은 대박 집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니까?’
얼마나 좋은 물건을 제공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포목점의 점주는 아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급사들이 물건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비단옷 위주로 가져오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지요?”
“사천에 왔는데 당연하질 않은가. 촉금의 명성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좋은 물건들로 엄선하여 가져오게.”
“예예, 그리하겠습니다.”
시원시원한 할아버지의 말씀에 점주가 유달리 밝은 낯으로 고개를 숙이며 뒤따라오던 급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여자 직원 둘이 따뜻한 차와 함께 주전부리 몇 가지를 가져와 다탁 위에 차려 주었다.
이 은은하고도 청아한 향은…… 안휘에서 자라는 황산 모봉이네.
왠지 모를 반가움에 작게 할아버지를 부르자, 그가 은근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약선 어르신께 차를 한 잔 올렸다.
“어르신, 차향이 참 좋습니다. 이곳 점주가 꽤 좋은 잎을 쓰는 모양입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점주는 대뜸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하하하. 잘 보셨습니다, 대협. 저 멀리 안휘의 황산에서 자란 여린 잎들입니다. 차 한 잔에 고산의 정취가 듬뿍 묻어 나오니,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암. 황산 모봉은 천하 삼대 명차이니, 그럴 만도 하지.”
평소에도 안휘의 특산물인 차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던 할아버지였다. 먼 사천까지 와서 황산 모봉을 칭송하는 말을 들었으니 기분이 안 좋고 배기랴?
제 몫의 찻잔을 드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한데…… 어디 먼 곳에서 오신 분들이신가 봅니다?”
화려한 아부의 기술로 할아버지의 환심을 사는 것에 대성공한 점주가 은근슬쩍 물어 왔다.
안휘의 억양은 상당히 독특해서 모르기가 더 어려울 텐데, 이런 발 연기를 한다고?
분명 무언가의 빌드업일 것이 분명한 질문에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할아버지는 점주의 말재간에 완전히 넘어가셨는지 조금 섭섭하다는 듯 답했다.
“이 구름 문양을 모르는가? 우린 안휘의 남궁세가 사람이네.”
“아니! 인연이 이리 닿는군요. 어쩐지 오늘따라 이 귀한 차를 내오고 싶더라니. 대협, 먼 곳에서 오신 만큼 제가 최고의 물품으로만 엄선하여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허. 이리 신경을 써 주어 참 고맙네.”
스토리가 있는 아부라니. 이건 또 상상도 못 한 접대 방식인데?
사천 상인들이 유달리 수완이 좋다더니. 역시 실크 로드의 주역들은 정말 남다르구나.
그리고 이 시전의 매출 1위를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 분명한 점주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버리고 만 할아버지는 기쁨의 광대를 감추지 못하더니 급사들이 가져오는 물건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말했다.
“어르신, 가격은 신경 쓰지 마시고 마음껏 고르십시오. 진 공자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편히 골라 보거라.”
그런 할아버지의 적극적인 태도를 진이윤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뭐 아무래도 좋다.
우리 남궁가는 부자이고, 선물에는 본래 돈을 아껴선 안 되는 법이니까.
그에 은근슬쩍 두 사람을 부추기며 화려한 비단옷들을 구경하기도 잠시. 은은한 연보라색 치마 한 벌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그게 마음에 드느냐?”
“어…… 그냥 자수가 참 예쁜 것 같아서요.”
치마에 수놓아진 새하얀 난꽃이 어찌나 섬세하고 사실적인지.
내가 할아버지께 만들어 드린 유사 대파와는 정말 비교도 안 된달까?
보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난꽃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런 자수를 놓을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할까.
어쩐지 조금 아득해져 흐린 눈을 하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무슨 착각을 하신 건지 대뜸 점주에게 손짓했다.
“여기 이거 하나 주시게.”
“예, 대협. 값은 어찌 치르시겠습니까?”
“은자가 있기는 한데 일단 주문 증서를 적어 두게. 아무래도 가져온 돈보다 많이 쓰게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일일이 계산하기 귀찮으니, 일단 주문 증서를 적어 두면, 추후 값에 맞게 신용 전표를 내어 주겠네.”
“알겠습니다, 대협. 그러면 대협을 믿고 상품은 미리 포장해 두겠습니다.”
“그러시게나.”
행여 할아버지의 마음이 바뀔까, 점주가 재빨리 품에서 자그마한 종이 묶음을 꺼내더니 그 위에 무어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색 유군 한 벌, 은자 아홉 냥.
뭐? 은자 아홉 냥?
고작 치마 한 벌에 은자를 아홉 개나 내야 한다는 소리야?
은자 아홉 냥이면 거의 4인 가족의 넉 달 치 생활비다.
내가 성인이라면 또 모를까, 한창 성장기라 몇 달 입으면 작아져서 입지도 못할 텐데 무슨 치마 한 벌에 그 큰돈을 쓴단 말인가.
나는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치마와 주문 증서를 번갈아 보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너무 비싸요, 할아버지. 무슨 치마 한 벌에 은자를 아홉 개씩이나 주고 사요? 저건 안 살래요. 주문 취소해 주세요.”
“아이고, 이건 비싼 게 아닙니다. 최고급 원단에 자수까지 꼼꼼하게 들어가 있질 않습니까. 이만한 물건은 물량이 많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저희 가게에도 겨우 한두 벌 가져다 놓을 정도이지요.”
“그래 봤자 석 달밖에 못 입을 옷인걸요. 할아버지, 저는 아직 어려서 계절마다 옷 새로 사야 하는 거 아시잖아요. 저건 너무 과해요.”
“어허, 우리 남궁세가가 저깟 치마 하나 못 사겠느냐? 그냥 사거라.”
“하지만 영 찜찜한걸요. 여기가 안휘도 아니고 사천인데 비단값이 이리 비싼 게 이상하잖아요. 또 옷의 크기도 작아서 천도 실도 적게 썼을 텐데 어떻게 이 가격이 나오는지 납득이 잘 안 가요.”
오며 가며 지켜본 바로는, 이 동네에서 쇄은(은자) 하나의 값어치는 대략 10만 원 내외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화폐 단위 체계 안에서 그렇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물가가 워낙 저렴하기에 그 값어치가 더욱 컸다.
그러니 고작 여섯 살 꼬마용 치마 한 벌에 쇄은 아홉 개를 달라는 건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지.
때마침 아버지도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영이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 비단 한 필이 보통 은자 석 냥입니다. 하나 이 치마는 한 필의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 아닙니까. 만드는 품을 생각하더라도, 이 가격은 조금 과한 것 같습니다.”
바가지요금도 어느 정도 그럴싸해야 낼 마음이 드는 것 아니겠는가?
선물을 사려고 들어왔던 만큼 사실은 되도록 값을 깎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호구 취급할 건 없잖아.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것이야 중원 땅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이건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았다.
물론, 아버지의 이런 논리적인 설명에도 점주는 절대 이게 바가지요금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더니, 이내 선심을 쓴다는 듯 주문 증서를 고쳐 적으며 말했다.
“아이고, 옷을 만드는 과정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나 만일 가격이 부담스러워 그러신 거라면, 첫 거래이니만큼 제가 특별히 조금 저렴하게 드리겠습니다. 은자 여덟 냥에 가져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니 누가 지금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이러고 있는 줄 아나.
아무렴 중원서 가장 부유한 알짜배기 땅의 대지주인 우리 남궁세가가 은자 아홉 냥이 없어서 치마를 안 사겠어?
불쾌함이 제법 차올랐는지, 아버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아주 엄중하고도 서늘한 어조로 점주에게 말했다.
“점주.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의 문제요.”
평소의 온화하고도 다정한 모습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차갑고 날카로운 경고였다.
그리고 그 경고가 무예를 전혀 익히지 않은 포목점의 급사들에겐 다소 과한 공포였던 것일까. 개중 일부가 흠칫 몸을 떨며 잔뜩 움츠러들었다.
‘아, 이건 좀 난감한데.’
아버지야 죄가 없지만, 점주가 양념을 친다면 자칫 무인이 고작 돈 문제로 양민을 겁박하는 모양새로 비칠지도 모르는 일.
나는 여과 없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아버지의 앞을 잠시 막아섰다.
그러곤 태세를 완전히 바꿔 점주에게 직접 말했다.
“아니에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금액을 깎아 주실 필요는 없어요. 물건 모두 제값에 살 테니 아까 적었던 금액 그대로 주세요.”
내 말에 점주의 안색이 급격히 환해지는 한편, 내 편을 들어 주다 배신을 당한 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허망해졌다.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제게도 다 계획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마음을 담아 간절하게 아버지와 눈을 맞추니, 그가 잠시 동안 나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이곤 고개를 돌렸다.
좋아. 아버지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어디 한번 이 모욕을 되갚아 볼까?
나는 침울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곤, 살짝 코를 훌쩍였다.
“가문의 위신이 있는데, 사천까지 와서 함부로 물건값을 깎다니. 제가 어리석었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한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물이 오른 나의 연기에 제대로 속으신 걸까?
할아버지가 짧은 한숨과 함께 나를 가볍게 안아 등을 토닥여 주셨다.
“먹칠은 무슨. 네가 이 할아비와 아비를 걱정해 그리한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느냐. 되었으니, 마음에 드는 물건 있으면 마음껏 고르거라.”
그러고는 중간부터 엉망이 된 분위기를 어떻게든 되살려 보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약선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께서도 마음에 드시는 게 있다면 뭐든 골라 보십시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내몰렸던 마당에 어떻게 선뜻 옷을 고를 수 있겠는가.
약선 어르신은 조용히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할 뿐, 좀처럼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아, 괜찮아요. 제가 다 뒷수습 할거라니까요?’
아직 전음을 보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그저 어르신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그 의미가 어느 정도 통한 모양이었다.
그는 흘끔흘끔 내 쪽을 보며 눈치를 잠시 살피더니, 이내 새파란 장포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크흠. 나는 저게 좋아 보이는구나. 색이 선명하고 광택이 나는 것이 이윤이가 입으면 아주 맵시가 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