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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게임 속 악역의 시한부 딸입니다 1권
 
지은이 : 김촉촉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김촉촉, 2025
※ ISBN : 979-11-7408-070-7
※ 가격 : 3,500원
※ 발행일 : 2025년 05월 29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프롤로그
 
 
아니, 검법 쓸 때마다 리듬게임 넣자고 한 등신이 대체 누구야?
……나다.
내가 이렇듯 격렬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이유를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무협 리듬게임 ‘창천무림’ 속 엑스트라 캐릭터, ‘남궁영’에게 빙의하기 전으로.
 
* * *
 
‘창천무림’은 무협 RPG 세계관과 리듬게임이라는 다소 괴상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모바일 게임이다.
‘할 말 있으면 랩으로 해’도 아니고 무협 액션 RPG 세계관에 리듬게임이라고?
뭐 이런 게 있나 싶겠지만, 의외로 RPG 세계관과 리듬게임의 조합은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무협’이지.
‘창천무림’은 무공을 리듬게임화한 게임이다. 즉, 적을 해치우려면 리듬게임을 클리어하여 유효타를 먹여야만 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리듬게임들이 그러하듯, 뒤로 갈수록 점점 난도가 올라갔다.
그래, 바로 그게 ‘창천무림’이 탄탄한 스토리와 가성비 괜찮은 과금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명작’이 아닌 ‘괴작’으로 분류되는 원인이었다.
사실, 이게 정통 리듬게임이었다면 별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리듬게임 마니아들은 난도가 높을수록 더 좋아하니까.
하지만 이 게임의 베이스는 무협 RPG 세계관이었다.
멋진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여성 캐릭터들.
악인을 처치하며 명성을 얻는 가슴 두근대는 스토리까지.
그야말로 아재들의 꿈과 로망이 가득한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멋진 세계를 맛보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전투마다 클리어해야 하는 리듬게임이었다.
가뜩이나 눈이 침침한데 복잡한 패턴들이 시야를 교란한다.
순발력은 안 따라 주는데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노트들은 야속하리만큼 빠르다.
심지어는 교묘한 엇박자나 시간차 공격으로 유저를 우롱하기까지 한다.
꿈과 로망이 악몽과 분노로 변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게임사 홈페이지에 분노한 유저들의 악플이 달리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이 XXX들 이딴 걸 지금 게임이라고 만들었냐. 검법 쓸 때마다 리겜 쳐야 하는데 난이도 장난함? 채보 담당자 이 XX는 뭐 손가락이 여섯 개냐?
 
‘뭐, 저번 스테이지가 유난히 ‘잘’ 만들어지긴 했지.’
하지만 자기들이 못하는 걸 왜 남 탓을 한담?
그러게 손가락을 좀 더 민첩하게 움직이셨어야죠.
나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젓고는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이 XXX들 이딴 걸 지금 게임이라고 만들었냐. 검법 쓸 때마다 리겜 쳐야 하는데 난이도 장난함? 채보 담당자 이 XX는 뭐 손가락이 여섯 개냐?
└안녕하세요, 고객님. 커뮤니티 내에서 게임 개발진에 대한 인신공격은 규정상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은 원래 열 개입니다. ^^
 
뭐만 하면 양심 없는 노트입네 어쩌네 떠들어 대지만, 나는 의외로 무턱대고 어려운 패턴만을 양산해 내는 타입의 채보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오히려 캐릭터와 상황의 콘셉트에 맞춰 적당히 난이도를 조절하는 편이지.
다만 근래 업데이트 중인 ‘검성’ 관련 채보들은 캐릭터의 설정상 패턴이 복잡할 수밖에 없어서 유저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규 채보는 클리어 공략 영상과 함께 공개해 달라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아무렴 내가 직접 클리어 하지도 못할 채보를 깨라고 올려놨겠냐고.’
실력과 양심을 동시에 의심받는 것 같아서 분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정말로 공략 영상을 올려 주기라도 하면 불만들이 좀 줄어들까 싶어서였다.
‘그래 봐야 다음 스테이지 나오면 또 욕하겠지만……. 악랄한, 아니 재능 있는 채보 마스터의 숙명이려니 해야지 뭐.’
나는 부루퉁하니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일단 캠코더를 켰다.
그리고 촬영에 앞서 가볍게 손을 풀며 불쾌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기왕이면 퍼펙트 플레이를 보여 주는 게 좋겠지?”
그 누구도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그 정도가 딱이다.
어차피 이 치욕은 다음 스테이지의 채보로 갚아 주면 되니까.
사악하게 입매를 말아 올린 나는 내일 중으로 업데이트 예정인 신규 스테이지 ‘검성의 시험’의 테스터 서버에 진입했다.
“후우…….”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한숨을 떨쳐 냈다.
그러자 아리따운 검성의 실루엣과 함께 신비로운 전주가 흘러나오기도 잠시.
이윽고 나의 역작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화려한 패턴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도 복잡한 구조였지만, 난 두려움 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머리로 패턴을 익히려 들면 안 돼. 중요한 건 결국 흐름이니까.’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노트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되, 전체적인 흐름도 놓쳐선 안 된다.
-따라라 따라란 따라라란
다행히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다음 패턴을 짚었다.
안개비처럼 빠르고도 보드랍게 토도도독 연속타가 울리고, 매끈한 롱 노트가 그 중간중간을 묵직하게 가로질렀다.
호흡이 다른 두 리듬이 부드럽게 뒤섞이자, 쾌감이 올라왔다.
마치 비 내리는 새벽 숲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기분에 취해 나는 그저 스스로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화려한 기술이나 치밀한 계산 없이 그저 감으로만 이어 나가는 폭타의 연속.
무아지경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이윽고 화려한 팡파르 울림과 함께 퍼펙트 콤보라는 글자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내 온몸에는 전율이 일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세상에 넘쳐 나는 온갖 오락거리들 가운데, 하필이면 이 단순한 방식의 게임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노트를 완벽하게 소화해 냈을 때의 짜릿함이 정말 끝내주거든.
특히나 어려운 곡일수록 그 짜릿함은 배가 된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랄까.
“휴……. 이제 이걸로 신곡의 난도 가지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겠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씨익 웃으며 ‘검성의 시험’의 플레이 영상을 저장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불현듯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창 하나가 나타났다.
 
[적합자를 발견했습니다.]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1%… 10%… 25%…….]
 
적합자? 동기화?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람?
“내가 야근을 하다 미쳤나……?”
밤낮없이 컴퓨터 화면만 붙들고 살아서 그런지 별 이상한 환각이 다 보이네.
나는 정신을 차리려 두 눈을 크게 끔뻑였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숫자가 올라갈 뿐, 바뀌는 건 없었다. 뺨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정신병도 병가 처리가 되던가?’
당혹감과 함께 현실적인 두려움이 마구 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100%라는 숫자와 함께 새로운 창이 하나 떠올랐다.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전송을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영아.”
애달픈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슬픔 가득한 눈동자 위로 투명한 눈물이 너울졌다. 떨리는 손길이 뺨에 와 닿았다.
“아가, 내 가여운 딸.”
무엇이 그리도 서글픈지, 여인은 괴로움에 가득 찬 얼굴로 연신 내 뺨을 쓸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이 안타까워서 조심스레 손을 뻗으니, 그녀가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미소 지었다.
“기억하렴. 너만은…… 반드시…….”
여인의 목소리는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지지직거렸다.
마구잡이로 출렁이며 흐려지는 시야는 우리에게 이별의 시간이 당도했음을 알리는 듯했다.
귓가가 멍멍했다. 여인의 달싹이는 입술이 점차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영영 그녀를 놓칠까 싶어 나는 버둥거리며 여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나 매끄러운 비단 자락을 손아귀 가득 움켜쥔 순간.
눈앞이 일그러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세상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기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