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재워주세요 1권
전하! 재워주세요 1권
전하! 재워주세요
1권
전하! 재워주세요 1권
차 례
1. 공작 영애 샤론 그레이스턴
2. 왕세자 윌프레드 라인하르트
3. 결혼 성사
4. 왕궁 생활의 시작
5. 위험한 밤
6. 로시난드 백작가 파티
7. 라이언의 폭주
8. 왕실의 비밀
9. 감금의 시작
10. 악연의 부활
11. 계략에 빠진 샤론
전하! 재워주세요 1권
1. 공작 영애 샤론 그레이스턴
그날 밤, 샤론은 밤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공작가 영애의 신분으로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검정색 후드를 뒤집어쓴 샤론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가게들의 불이 하나둘씩 꺼졌다. 왕도의 상업 지구를 밝혀주는 것은 휘영청 뜬 보름달과 주점뿐이었다.
샤론은 주점 앞에 멈춰 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덜컹거리는 나무문을 열었다.
연초 연기로 희뿌연 가게 안은 모험가 행색을 한 남자들과 여종업원 두어 명이 있을 뿐이었다.
최근 에른스트 왕국 북쪽의 프카하 산에 마물이 빈번하게 출몰한다는 이유로 왕도에는 수많은 모험가들이 찾아왔다.
그래서 어딜 가든 저렇게 모험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스터, 독한 걸로 한 잔 주세요!”
샤론은 카운터 테이블에 앉아 주문했다.
유리컵을 헝겊으로 닦던 가게 주인은 술을 따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샤론은 그걸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캬! 한 잔 더요.”
빈 잔을 쾅,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서 또 한 잔을 주문했다.
“아가씨가 술 참 잘 마시네. 독한 건데 이거.”
“훗, 이 정도 가지곤 어림없어요. 제가 왕년에는 남자들 못지않은 주당이었거든요.”
“왕년에? 주당?”
어린 아가씨가 쓰지 않을 법한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오자 주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차차, 깜빡했다.
흥분한 나머지 본분을 망각했다. 지금 샤론은 집을 몰래 빠져나와 주점에 들어온 공작 영애 샤론 그레이스턴이었다.
회식 때마다 폭탄주를 신나게 만들던 총무과 여직원이 아닌 것이다.
“하하, 벌써 취했나?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어… 어서 술 주세요, 술!”
샤론은 빈 유리컵으로 나무 테이블을 쾅쾅 치면서 술타령을 했다.
이 모습을 아버지인 그레이스턴 공작이 보면 목 뒤를 잡고 쓰러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모두 그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자, 여기. 주문한 술.”
호박색 영롱한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컵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샤론은 냉큼 그것을 꿀꺽꿀꺽 삼켰다.
“캬, 술맛 좋고! 인생 뭐 있어? 이거 딱 한 잔이면 되지!”
그녀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또 한 잔을 주문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샤론의 코는 딸기처럼 빨개져 있었다.
“어? 이게 누구야, 딸꾹.”
정신없이 마시느라 옆에 사람이 앉은 것도 몰랐다.
어두운색 후드를 둘러쓴 남자였다.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유리컵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잘생긴 청년, 딸꾹. …내 얘기 좀 들어 볼래요, 딸꾹.”
“…….”
술주정하는 여자에게 얽히고 싶지 않았던지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샤론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요… 딸꾹. 되게 불쌍한 애거든요… 딸꾹. 남들이 보면 엄청 행복한 줄 알아요. 그런데 난 하나도 안 행복하거든요. 난 진짜…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울컥한 샤론은 말하다 말고 유리컵을 들어 안에 든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후드가 벗겨져 벌꿀색 머리칼과 얼굴이 드러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명 아버진 약속했어요! 왕립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필든 왕국으로 유학 보내 주겠다고요. 그런데 나 참, 기가 막혀서! 이 인간이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네?”
분노를 참지 못한 샤론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쳤다.
“나더러 결혼을 하래요, 결혼을! 윗선의 명령이라서 거절을 못 한다나 어쩐다나. 그건 자기 사정이지. 왜 나까지 피해를 입어야 하냐고요. 윌프레드인지 알프레드인지 알 게 뭐야…….”
“……!”
그 순간, 후드를 쓴 남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샤론이 주정하는 내내 미동도 하지 않던 그는 고개만 살며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샤론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신세 한탄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샤론은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빛에 따라 색이 변한다는 알렉산드라 라이트. 그 보석이 박힌 반지는 샤론의 어머니인 카밀라 공작 부인의 유품이었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말려 주셨을 거야.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절대 없었을 거야.”
샤론은 테이블에 엎드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긴 속눈썹이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반쯤 가렸다.
자면 안 되는데. 자정이 되기 전에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 그랬다간 아버지에게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천근만근 쇳덩어리가 몸에 올려져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이내 샤론의 눈은 완전히 감겨 긴 속눈썹이 아직 앳된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야, 일어나.”
어렴풋이 목소리가 났다.
“일어나라니까. 여기에서 자면 안 돼. 어서 일어나.”
이번에는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샤론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깊은 심연으로 잠겨 들어가는 그녀의 의식이 그것을 방해했다.
“난감하게 됐군.”
뒤이어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이미 샤론은 완전히 꿈나라로 떠난 후였다.
* * *
샤론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건 8살 때였다.
“샤론, 이 반지는 네 어머니의 유품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 아버지가 샤론을 따로 불러 반지 케이스를 내밀었다.
샤론은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이게 어머니의 유품…….”
샤론은 반지를 보자마자 울컥했다. 오늘 장례식을 치른 어머니가 보고 싶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아버지 앞이라 애써 참고, 반지를 케이스에서 빼냈다. 그리고 반지를 왼손 약지에 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치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이 샤론을 관통했다.
“그 반지를 잘 간직해야 한다. 그건 네 어머니의 유품이야. 평상시에 절대 빼지 않고 다녔을 만큼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는 말이 샤론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샤론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다른 영상들이 폭풍처럼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생에 25살 여자였고, 회사를 다녔고, 어릴 때는 유도를 했고…….’
봇물이 터지듯 기억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충격을 받은 샤론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에메랄드색 눈동자에는 혼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러나 검정 베일로 가린 샤론의 얼굴을 아버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맞아. 난 트럭에 치였어.’
그날은 야근하는 날이었다. 11시가 넘어서 귀가하려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거대한 트럭이 그녀를 덮쳤다.
그것이 전생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후로 샤론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가여워라. 마님이 돌아가신 게 충격이셨나 봐.”,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니야?”라며 걱정을 했다. 다들 샤론이 죽은 공작 부인의 죽음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난 이제 마음대로 술도 못 마시고, 밤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이런 답답한 공작 영애를 해야 한단 말이야?’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뒤 샤론의 감정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답답함, 괴로움, 절망뿐이었다.
그러나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견디다 못한 샤론은 스스로 커밍아웃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요!”
공작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공작은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샤론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샤론, 네가 어머니를 잃어서 충격받은 마음은 잘 안다. 가여운 내 아가. 그래, 그래. 내가 네 마음 다 알아.”
전혀 믿어 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이 충격이라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때부터 샤론은 엇나가기 시작했다. 공작 영애로서는 상상도 못 할 행동들이 속출했다.
“어머나! 아가씨, 뭐 하세요! 빨리 내려오세요! 어머, 세상에!”
정원 나무에 올라간 샤론을 향해 사색이 된 얼굴로 외치던 유모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안 돼! 여기 고양이 있단 말이야. 고양이 구출해야 해.”
파니에만 입은 샤론은 고양이를 구한다는 이유로 나뭇가지에 올라탔다.
나무를 타는 건 자신 있었다. 전생에 유도를 했었기에 몸을 움직이는 건 뭐든 잘했다.
승마, 검술 등 운동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모두 전생의 기억을 찾고부터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샤론에게 되돌아오는 건 꾸중뿐이었다.
“넌 공작 영애로서 소양이 안 갖추어져 있어!”
그놈의 공작 영애로서의 소양, 소양.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
내가 원해서 공작 영애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공작 영애야? 왜 귀족이야?
속박과 법도에 얽매여 하고 싶은 것도 못 할 바에야 차라리 환생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렇게 8살이란 어린 나이에 샤론은 때아닌 사춘기를 겪어야만 했다.
* * *
“아가씨. 아가씨, 아침입니다.”
샤론은 힘겹게 눈을 떴다.
4개의 기둥이 지탱하는 침대 위에는 장미색 덮개가 달려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무표정한 시녀 셀리나였다.
“으, 골이 빠개질 것 같아. 속도 메슥거려.”
공작 영애답지 않은 언행이 쏟아지는데도 셀리나는 놀라는 기색이 없다.
이 집의 집사를 비롯한 모든 고용인들은 샤론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샤론의 이런 모습은 일상다반사라 놀랍지도 않은 것이다.
“어제는 얼마나 드신 거예요?”
“몰라. 기억도 안 나. 셀 수 없을 정도로 퍼마신 것 같아. …그런데 나, 집에 어떻게 왔어?”
주점에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집에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생에 쓰던 말로 필름이 딱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