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홀린 늑대 2권
달에 홀린 늑대 2권
달에 홀린 늑대
2권
달에 홀린 늑대 2권
차 례
9. 잊혀진 시간
10. 찬란했던 시간들
11. 평행선
12. 어른이 된다는 것
13. 불꽃
14. 청춘
15. 달이 뜨는 밤
에필로그
달에 홀린 늑대 2권
9. 잊혀진 시간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도 많이 했고 학부 때도 들어보지 못했던 꾸중도 심하게 들었다.
오늘이 첫 촬영이라고……. 촬영 첫날과 막날에 회식을 한다던 신혁은 퇴근 이후로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전체 회식이니 당연히 이혜란도 같이 있겠지. 그 자리에 해성과 정원도 함께 있다는 걸 알지만 여자주인공인 혜란과 붙어 앉아 있을 신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불쾌해졌다.
회진을 끝내자마자 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와 집에 도착한 세인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내 입으로 직접 대역을 하겠다고 한 영화가 이혜란이 주연으로 처음 선보이는 영화란다.
멍해진 머리는 그 어떤 생각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어이없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이혜란이 출연하는 영화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신혁이 무슨 입바른 소리를 하더라도 한사코 거절했을 것이다.
‘안녕? 난 이혜란이야.’
그게 그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저와 비슷해 보이는 또래의 여자아이. 그리고 비슷해 보이는 생김새. 그 아이를 보자마자 해변에서 아빠와 진한 스킨십을 나누던 여자 사이에서 생긴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 언니 대신 이 집 외동딸 노릇을 하게 됐어. 그러니까 이제 언니는 이 집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란 말이지.’
그 아이와 여자가 들어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박 실장이 저를 데리러 왔다.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엄마와의 추억이 가득한 집에서 세인은 그렇게 도망치듯 쫓겨났다.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자 수면 아래 겨우 잠재워 놓았던 기억들까지 주르르 따라 올라왔다. 이대로 있다간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만 하고 있을 게 뻔해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올 요량으로 튕기듯 소파에서 일어나자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훅 밀려오는 어둠에 세인이 잔다고 생각했는지 들어서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이윽고 거실 벽에 위치한 스위치를 켜고 환해진 거실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세인을 본 신혁은 곧장 세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불도 다 꺼놓고 뭐해. 무슨 일 있었어?”
신혁의 옷엔 싸한 알코올 냄새와 함께 진한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여기에 이혜란의 것도 섞여 있겠지.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신혁을 마주 보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맞춰오는 자신을 계속 피하는 세인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신혁이 세인의 어깨를 잡으며 다그쳤다.
“무슨 일이야.”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왜 이혜란이 나오는 영화에 날 출연시켰느냐고? 왜 이혜란이 나온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냐고? 그때의 세인에게 있어 누가 출연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신혁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과 해보면 좋은 경험이 되긴 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수술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한 부담감만 있었을 뿐이다. 아무리 혜란이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지만 신혁의 부탁을 혜란과 연관 지을 만큼 혜란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니었다. 그랬기에 오늘 일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형체 없는 대상을 향한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갈 곳을 잃은 분노는 자연스레 눈앞에 있는 신혁에게 향했다.
“…나가줘.”
그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 선택을 한 건 자신이면서 나약한 마음은 자꾸만 신혁의 탓으로 돌렸다. 원망과 미움, 증오가 섞인 눈으로 보자 신혁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왜,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해서, 왜 그런 말로 사람을 홀려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가라앉히려고 해도 자꾸만 치고 올라오는 감정이 그의 눈에도 보일까 싶어 세인은 신혁을 볼 수가 없었다. 신혁에게 이런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그가 자신에게 실망할까 두려웠다.
“부탁이야. 나가줘.”
냉랭한 축객령에도 신혁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줘야 알아.”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좀 나가.”
잔뜩 예민해진 신경은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처럼 곤두섰다. 세인이 입을 꾹 다문 채 밀어내기만 하자 답답해진 신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내며 세인을 밀어붙였다.
“내가 지금 여길 나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야?”
아니,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말할 기분이 아니다. 분노로 차게 식은 머리는 온몸을 차갑게 만들었고 끝내 그에 대한 감정까지 차갑게 얼어붙게 했다.
“나가라는 말 못 들었어?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이게 무슨 행패야.”
“뭐? 행패?”
세인의 입에서 멋대로 뱉어진 단어가 거슬린다는 듯이 잔뜩 구겨진 그의 얼굴에도 세인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아, 완전히 지쳐버렸다. 빛을 잃어 공허해진 세인의 눈동자에 신혁 역시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일 얘기하자.”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쓸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을 왜 켜선… 그나마 남은 온기마저 사라진 집엔 불빛이 비치는 곳곳마다 공허함이 부유했다. 스위치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불을 끈 세인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날의 일이 잔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 * *
엄마를 보낸 지 1주일이 채 되지 않았던 날이다. 상주인 아버지와 함께 빈소를 지켰지만 말 한마디 섞기 싫어 지금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부쩍 몸 상태가 나빠진 엄마와 요양하러 들린 별장에서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느라 엄마를 소홀히 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허망하게 엄마를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의사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일시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진단하였지만 그저 말을 하기 싫어서 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인이 받을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례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 여자와 혜란이 집에 들어와 생활한 지 며칠이 지난 뒤였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며칠 동안 말을 하지 않아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듣기 흉측했지만 세인은 개의치 않았다. 저 여자의 흉측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야 나았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재호가 놀란 것도 잠시 이내 평온한 얼굴로 여자를 세인에게 소개시켰다.
‘…인사해라. 새어머니 되실 분이다.’
엄마를 보낸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저 여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인 아버지란 존재가 신물 나게 역겨웠다.
‘첩이면 첩답게 살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세인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알싸한 통증이 지나간 자리엔 붉은 손자국만 남아 있었다. 세인은 뺨을 감싸 쥔 채 재호를 노려보았다.
‘어디서 그따위 말버릇을 배워서는!’
‘내가 있는 한 안주인 노릇 하려고 들지 마세요. 몰래 만나온 걸 보면 집안도 변변찮아 보이는데 감히 누구 자리를 꿰차려고 해요. 안 그래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여자와 그 여자를 안쓰럽다는 듯이 감싸던 아버지.
‘이세인!’
더 볼 것도 없다는 생각에 세인은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신경이 닿는 곳에 아무것도 두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 아무도 2층에 올라오지 말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고 감당해내고 있다고 여겼지만 전혀 감당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휴식이 너무나 간절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산산이 깨졌다.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이었던 2층에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안녕? 난 이혜란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올라와. 당장 안 꺼져?’
형형한 눈빛에도 혜란은 가소롭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내 방이 저기인데? 언니 엄마가 죽은 덕분에 이 집에도 다 와보고. 웬일이래.’
어린아이가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 아이가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제대로 밟아줘야겠다는 충동이 강하게 치밀었다.
‘평생 숨어 지내다가 내 앞에 나타나니까 좋지? 돈 많은 아빠에 대궐 같은 집이 꿈인가 싶을 거야. 그치?’
‘…….’
‘내 말 한마디면 네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설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내연녀 자식이라는 소문이 도는 순간 넌 끝이야. 이 바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거든. 어디에 줄을 잘 서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들이 선진기업 외손녀인 나를 두고 쥐뿔도 없는 네 앞에서 살랑살랑 움직일 것 같아?’
이제 갓 중학생이 되어 보이는 아이한테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스스럼없이 한 것은 일종의 분풀이였다. 혜란의 얼굴이 조금 전 그 여자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분에 찬 두 눈엔 시뻘건 눈물마저 고였다. 그럼에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할퀴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라고. 위나, 아래나 분수를 알고 설쳐대야지. 내가 장담하는데 넌 절대 너를 드러내고 살지 못해. 한없이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 웃기지 말라 그래. 병원 이미지에 누구보다 치명적인 너를 그대로 내보인다고?’
이번엔 세인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꿈 깨. 내가 지금이라도 외가에 전화해서 네가 꼴 보기 싫다고 하면 아버진 널 쫓아낼 수밖에 없어. 외가에서 아버지한테 지원해주는 금액이 얼만지나 알아? 네가 평생을 바쳐도 벌 수 없는 돈이 한 달에 오고 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그래. 내가 너무 말만 심했지. 당장 1층으로 옮기지 않으면 예전에 살던 집으로 쫓아낼 줄 알아.’
하지만 이 집에서 쫓겨나는 건 그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었고,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는 것도 그 아이였다.
‘어머 못 들었나 봐? 오늘부터 언니 대신 이 집 외동딸 노릇을 하게 됐어. 그러니까 이제 언니는 이 집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란 말이지.’
의기양양하게 웃던 그 아이 앞에서 자신은 패배자일 뿐이었다. 며칠 전, 할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세인아,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어떻겠니?
‘저더러 도망쳐 나오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말이 아니다. 더 이상 그 집안과 상종하지 말자꾸나. 이 할아버지의 품으로 오렴.
상종하지 말자던 말이 이 뜻이었나. 알고 보니 엄마가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 그 여자와 혼인신고를 한 아버지는 결국 자신을 외가에 보내는 조건으로 선진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이었다.
‘그래. 축하해. 근데 내 말이 맞았네? 넌 평생 내 대역으로만 살아야 할 거야.’
지금은 모르겠지. 내 자리를 꿰찼단 사실에 행복감에 젖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 그게 얼마나 비참하고 가혹한 일인지 네가 선택한 그 자리에서 한 번 깨달아봐.
그래서 그때 세인은 두말 않고 제 발로 그 집에서 걸어 나왔다. 그랬던 자신이 이혜란이 주연인 영화에 대역을 하다니. 세인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 * *
그로부터 3일이 지났지만 세인에게선 연락 한 통 없었다. 전화나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지금 만나면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자신은 다그치고, 세인은 피하기 급급하고. 아직도 그날 보았던 세인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세상에 어둠이란 어둠은 다 끌어온 듯 빛이라곤 전혀 없던 눈동자.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몰아세웠다간 세인마저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만 같아 세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리지 않는 폰을 붙잡은 채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비행기 도착할 시간 다 되었습니다.”
정원의 말에 신혁의 시선이 손목으로 향했다. 11시 도착이라 했던가. 지금 출발해야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신혁은 차 키를 챙겨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청사로 들어가자 이제 막 여행에서 도착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 샌프란시스코 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와 함께 게이트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어이, 아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요 며칠 보지 못했던 미소가 엷게나마 한 자락 걸렸다.
“아버지.”
근 2년 만에 이루어진 부자 상봉이다. 흔한 포옹 한번 없이 눈짓만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은 두 사람은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차에 올랐다.
“근데 너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집으로 가는데요.”
“그러니까 내 집이 어디인지 알고?”
신혁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준호를 보았다.
“당연히 제 집이죠. 마침 어제 인테리어 공사 끝났어요.”
“허, 됐다. 성수동으로 가.”
“집 구하셨어요?”
“그럼 다 큰 아들놈 집에 얹혀살리?”
못 말린다. 2년 동안 변한 게 전혀 없으시군. 신혁은 고개를 내저으며 핸들을 틀어 방향을 돌렸다.
“서울도 많이 변했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어느 시점을 회상하고 있는 준호의 얼굴은 아련했다. 미국으로 도망치듯 가버리고 나서 처음 밟는 한국 땅은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낯섦이 싫기도 하지만 낯설어서 다행이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11층에 도착한 두 사람은 커다란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오른쪽 복도 끝에 위치한 집 앞에 섰다. 6자리 비밀번호와 함께 문이 열리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가구까지 주문을 마쳐 놓았는지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점심은 어떻게 하실래요?”
“일단 자고 일어나야겠는데. 늙어서 그런지 14시간 비행도 이젠 못 하겠어.”
“그러세요, 그럼. 쉬세요.”
꾸벅 인사를 하는 신혁을 준호는 복잡한 얼굴로 보았다. 아들 녀석은 언제 저렇게 컸는지 저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에 한 뼘은 넓은 더 어깨를 가진 건장한 성인 남성이 되었다.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에 제 슬픔에 못 이겨 신혁을 방치했던 건 아닌지 요즘 들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영화 촬영 시작했다며?”
“네. 올해 안에 개봉하려고요.”
“…그래, 수고했다.”
어른스러운 낯을 하고 있어도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다. 꿈을 꾸며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도 되는 나이에 많은 것을 내려놓고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 준호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한편, 아파트를 나온 신혁은 정원에게 점심을 먹고 들어간단 문자를 보내고 곧장 촬영장으로 향했다.
“NG! 다시!”
벌써 10번째 NG다. 해성은 생수병을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낮게 욕을 뇌까렸다. 그러게 강서라로 가자니까. 하아,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린 해성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스탠바이, 큐!”
큐 사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혜란은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미간과 고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 그리고 옅게 떨리는 신음소리가 만족스럽다 여길 즈음이었다.
“컷! NG!”
다시 NG 사인이다. 혜란은 분에 못 이겨 입술을 짓이겼다. 이 정도 되니 많은 스텝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일부러 저러나 싶을 정도다. 여배우 기죽이기 뭐 이런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뭔데 지금 이게!!
“이혜란 씨, 지금 칼 맞았어요? 왜 부복하면서 쓰러져! 캐릭터 분석이 그렇게 안 됩니까?! 할 줄 모르면 다른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라도 배워왔어야 할 거 아니야!”
해성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촬영장에 퍼졌다. 완전히 얼어붙은 스텝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펴댔다. 해성이 이 정도로 화를 내면 이날 촬영장 분위기는 말 그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하면 너그럽게 넘어갈 일도 하나하나 지적하며 걸고 넘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