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홀린 늑대 1권
달에 홀린 늑대 1권
달에 홀린 늑대
1권
달에 홀린 늑대 1권
차 례
1. By accident, 우연히
2. 어떤 관계
3. 끌림에 관하여
4. 미묘한 온도
5. 우리가 가진 것들
6. 그와 그녀의 역할
7. 그들의 사정
8. 그들의 비밀
달에 홀린 늑대 1권
1. By accident, 우연히
끼이익, 도로 위로 울려 퍼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이미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세인은 서둘러 현장을 에워싼 사람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잠깐만요!! 들어갈게요!!”
마주한 장면은 끔찍했다. 중앙선을 넘은 트럭과 충돌한 승용차는 충격을 전부 흡수해 난파되어 있었고 찌그러진 차체 밑에선 선혈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세인은 황급히 운전석 문을 열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남자의 뺨을 내리쳤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하아.”
남자는 힘겨운 신음성과 함께 감은 눈을 간신히 떴다. 흐트러진 초점 위로 세인의 얼굴이 맺혔다.
“살고 싶으면 여기서 나와야 해요. 나한테 안겨요.”
세인은 안전벨트를 풀고 남자의 상체를 일으켰다. 잔뜩 늘어진 남자의 몸이 세인을 향해 허물어졌다. 세인은 거의 안다시피 하며 남자를 차량 밖으로 천천히 끌어냈다.
안간힘을 써 정신을 붙들고 있던 남자는 바깥으로 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세인의 품에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새 연락을 받은 경찰의 출동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세인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남자를 반듯한 자세로 눕히곤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어 내렸다. 복부로 내려갈수록 셔츠가 피에 젖어 축축했다. 이미 복부 출혈과 머리 출혈이 상당했다. 빨리 병원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 남자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의사입니다. 구급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요?”
“아, 네. 곧 도착할 겁니다.”
사납던 경찰의 목소리가 의사라는 신분 하나에 누그러졌다. 세인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급하게나마 남자의 복부를 지혈했다. 회색 카디건이 검붉은 색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상처가 심했던 터라 복부 압박만으로는 지혈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남자의 심박동수와 호흡이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어!! 구급차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구급차가 들어올 길을 열어 주었다. 세인과 안면이 있는 구급 대원이 베드를 들고 달려 나왔다.
“어? 이 선생님!”
“이분 혜성병원으로 이송할게요.”
어차피 다른 병원이라 해봤자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오히려 환자를 먼저 발견하고 조치를 취한 세인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게 환자에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네, 알겠습니다. 혜성병원으로 콜 넣겠습니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구급 대원은 베드에 남자를 싣고 구급차에 태웠고 보호자 자격으로 동승한 세인은 구급차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구급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내달려 수술실까지 들어간 세인은 외과와 마취과 전문의와 함께 일반외과 강 교수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선생이 응급조치한 건가?”
“네, 교수님.”
“환자가 널 만난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라고 봐야겠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상당히 기뻤을 강 교수의 칭찬을 들으면서도 모든 신경이 베드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가 있었다.
수술은 장장 4시간 동안 이어졌다. 간헐적인 기계음, 감정이 없는 목소리, 오차 없이 정확한 손짓, 예민하면서도 기민한 눈빛, 옷깃을 스치는 서늘한 소리가 수술실을 가득 채웠다.
“타이 해. 다들 고생 많았어.”
끝을 알리는 선언에 곳곳에서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교수가 먼저 퇴장하고 남은 레지던트들이 수술실을 정리하는 동안 세인은 베드에 누워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은 여전히 잃은 상태였지만 혈색이 돌아온 얼굴엔 생명의 기운이 돌고 있었다. 남자가 옮겨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 수술실을 나와 군데군데 피가 묻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벗어 던진 수술복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태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넋 빠진 걸음으로 응급실을 가로질러 가던 세인의 앞으로 평소에 친분이 있던 응급의학과 박채은 선생이 다가왔다.
“황금 같은 오프에 수술이 뭐야.”
“그러게요. 별 의미가 없는 오프네요.”
“옷 꼴이 그래서 어떡해. 외투라도 빌려줄까?”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걱정 가득한 얼굴의 박채은 선생을 뒤로 한 채 병원을 나선 세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밀린 빨래를 돌리는 동안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봐 끼니를 해결하려던 모든 계획이 엉클어졌다.
‘아, 맞다, 빨래.’
세탁기 안에 널브러져 있는 빨래들을 다시 한번 헹궈 널어놓은 세인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남아 있는 음식이라곤 유통기한 지난 우유에 깎아 먹기 귀찮은 과일들, 그리고 냉동실에 있는 만두 한 봉지뿐이었다. 또다시 마트에 가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진 세인은 배달음식 책자를 집어 들었다.
‘황금 같은 오프는 무슨. 정말 의미 없다.’
* * *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폰을 집어 든 세인은 찍혀 있는 부재중 전화 목록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병원, 병원, 병원 죄다 병원에서 온 것들이었다. 목도 가다듬지 않은 상태로 허겁지겁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통화가 연결되었다.
“이 선생님! 어디세요?”
일반외과 레지 1년 차인 수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집이지. 병원에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다마다요. 선생님, 병원으로 좀 와주시면 안 될까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요.”
응급환자가 그렇게나 많이 몰려온 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 세인은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알겠어.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 나니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 5시 반. 어제 쓰러지듯 잠든 게 초저녁이었으니 많이도 자긴 했다. 대충 씻고 옷을 챙겨 입은 채 병원에 도착하니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건지 입구에서부터 간호사들이 자신을 반겼다.
“이 선생님!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제 그 환자분이… 아휴, 말도 마세요. 일단 가보시면 알아요.”
이끄는 손길에 무작정 따라가다 보니 VIP 병동까지 오고야 말았다. 무려 VIP 병동에서 레지 2년 차를 이렇게나 급하게 찾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의아할 무렵 간호사의 발걸음이 멈추었고, 병실 앞엔 일반외과 4년 차 치프 조준영 선생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살짝 찡그린 미간과 거칠게 쓸어 넘겨 흐트러진 긴 머리가 현재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조 선생님!”
간호사의 부름에 고개를 든 준영은 세인을 보자마자 반색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당황한 세인이 티 나지 않게 주춤거렸다.
“유 간호사, 수고했어요. 이세인!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무슨 일이에요?”
“어제 TA(교통사고) 환자 기억하지? 네가 데리고 온 환자.”
준영을 시간을 다투는 사람처럼 긴박한 얼굴로 세인에게 물었다. 당연히 기억했다. 자신의 황금 같은 오프를 날린 주범이 아닌가.
“네. 그 환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있지. 아주 큰 일.”
준영은 등 뒤로 문을 흘긋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문 너머로 들리지 않을 거란 건 잘 알지만, 저 뒤에 있는 게 무엇인지 정체를 안 이상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너 데려오라고 난리야. 이 선생이 데리고 왔으니까 처리 좀 해 봐.”
“네? 절 왜요?”
“난들 알겠어? 네가 오기 전까진 협조할 수 없다면서 진료도 거부하고 검사도 거부하고 있어.”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 세인이 황당해하면서 병실 문 앞으로 걸어가자 준영이 진절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세인이 들어갈 수 있게끔 몸을 비켜 주었다.
“네가 들어가서 얘기 좀 해 봐.”
상당히 지쳐 보이는 준영의 안색에 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1초, 2초, 3초.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맞군요.”
“…네?”
“그쪽이 맞다고요.”
뭐가? 의아해하는 세인을 향해 재미있다는 듯 웃던 남자는 시선을 내려 가운에 수놓인 푸른색 글자를 보고는 입안에서 굴리듯 작게 여러 번 발음했다. 이세인, 이세인. 이상하게 그 목소리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름이 쓰다듬어지는 느낌. 묘한 기분에 세인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할 말이라면 좀 있습니다만…….”
남자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졸음 운전하던 트럭 운전수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와 광장에서 제 차를 박았다죠.”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럼 광장 주위에 다른 병원도 있었을 텐데 굳이 혜성병원으로 온 이유가 뭡니까?”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걸까. 전혀 예상 밖의 질문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이내 제 페이스를 찾은 세인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지점에서 청운 병원과 혜성병원의 거리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청운 병원 주변에 관공서가 많아서 점심시간에 많이 막힙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인지라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곳으로 갔을 뿐이에요.”
남자의 고요한 시선을 마주하며 세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는 잠깐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보더니 눈썹을 구기며 인상을 찡그렸다.
“보호자 동의는요?”
“환자분 아버지께서 하셨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열었다.
“그래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나 보군요.”
의미 모를 말을 내뱉고서. 그리곤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얼굴로 저를 보았다.
“제가 혜성병원과 인연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남자의 형형해진 눈빛이 세인의 시선을 잡아챘다. 그리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옭아매고 비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세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다른 의사들은 됐고. 당신이 날 담당해줬으면 합니다.”
“죄송하지만 환자분은…….”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남자의 태도는 부탁하는 사람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려앉은 목소리는 강압적이었고 바라보는 눈빛엔 힘이 실려 있었다.
“병원 규정이야 정하는 사람 마음인 거고. 제 말 한마디에 집에 있다던 당신이 불려올 정도면 그다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텐데요.”
굳이 세인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일이 잘 해결될 거라는 걸 알기에 나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남자에게 세인이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었다.
“정 힘들다면 제가 얘기하죠.”
남자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만큼 세인의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세인이 여기서 부정의 대답을 하지 못하리라는 걸 이미 알고 한 말이 틀림없다. 그런 남자가 윗선에 얘기하면 쉽게 끝날 일에 자신을 부른 건 자신에 대한 통보이기도 했고, 이보다 더한 짓도 할 테니 좋은 말 할 때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 달라는 윗선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정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세요.”
존중이라고는 없는 태도로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는 사람에게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기분 나쁜 세인의 시선에 남자의 짙은 눈썹이 구겨지는 것도 잠시, 원하는 바를 이룬 남자는 이내 위협적으로 구기고 있던 눈썹에 힘을 풀고 입술을 늘어뜨리며 짓궂게 웃었다.
“온 김에 진찰하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준영과 수민에게서 들었던 말과 달리 남자는 얌전히 베드에 누웠다. 준영과 수민 두 사람이 붙어도 진료를 하지 않겠다던 남자가 순순히 진료를 받겠다고 나오니 의심부터 들었다.
‘이 남자가 대체 저와 뭘 하자는 걸까?’
준영도 쩔쩔매던 남자가 저에겐 바쳐진 제물처럼 다소곳했다. 세인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면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진료를 해달라는 말에도 멍청하게 환자를 내려다볼 정도로 사람을 흔들어놓은 주제에 잔잔한 물결처럼 편안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얄밉기만 했다. 돌이라도 던져 물살을 일으키고 싶은 욕구가 충동적으로 들었다.
“왜 하필 접니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혜성병원과 인연이 썩 좋지 않다고.”
“저도 혜성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인데요.”
남자는 나른하게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느긋한 태도로, 여유로운 목소리로.
“글쎄요. 당신은 좀 다른가 보죠.”
그 말을 끝으로 굳게 닫힌 남자의 입술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옮겨 남자의 옆으로 다가간 세인은 베드에 걸린 진료 일지로 시선을 내렸다. 날짜와 이름만 덩그러니 적힌 종이에 미간을 찌푸린 세인은 벨을 눌러 간호사를 호출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몰랐다.
한신혁, 세 글자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간단한 검사가 끝나고 처방만 남겨두고 있을 때였다.
“한신혁 환자분, 알레르기 반응은 없죠?”
간호사가 친절하게 웃으며 묻는데도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해버리는 그의 태도에 미소 짓고 있던 간호사도, 옆에서 보던 세인도 서서히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세인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세인에게 고정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세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놓고 귀찮은 얼굴을 한 채 물었다.
“하아, 알레르기 반응은요?”
“없습니다.”
이렇게 쉽게 나올 말을. 민망해진 간호사가 뻘쭘하게 웃으며 차트를 들고 나갔다. 진짜 이게 다 뭐 하자는 거야? 세인이 불만스럽게 찡그린 얼굴로 일지를 작성하고서 나가려 하자 신혁이 세인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머리랑 배, 수술했다고 들었습니다. 잘됐는지 확인도 안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