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황제가 되려는 건 아니었다 03권
이 세계의 황제가 되려는 건 아니었다 03권
이 세계의 황제가 되려는 건 아니었다
03
백원도둑놈
이 세계의 황제가 되려는 건 아니었다 03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이 세계의 황제가 되려는 건 아니었다 03권
Chapter 01.
나는 왜 제르우스가 칼리토스와 바이사르의 정체를 말하는 것을 주저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둘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정도의 문명 수준에서 ‘노예’라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주인의 소유물이자 재산이다.
그런 존재를 왕세자인 내가 ‘그분들’이라고 표현하고 농장과 시장 건축의 운영자나 관리자로 중용하려 했다고 하니 제르우스로서는 어색해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리라.
‘그런데 난 솔직히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노예라는 것 자체는 별 상관없는데.’
내가 원래 있던 세계, 지구의 ‘중국’의 경제 발전을 이끈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이 한 말이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라는 말이다. 즉, 무슨 일이든 결과만 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뛰어난 자라는 것은 인정한다.
여하튼 지금 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노예든, 평민이든, 귀족이든, 몬스터든, 짐승이든 상관없다.
성과만 내면 된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제르우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혹시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노예라는 걸 모르고 계셨습니까?”
몰랐다. 하지만 ‘완벽한 왕세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내가 그 둘이 노예라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중용하시려고 했다는 겁니까?”
“네.”
“…….”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능력이 있다면, 그들이 노예라는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능력만 있다면 노예라도 상관없다……?”
“네. 저는 검은 말이든 흰 말이든 잘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말’의 역할은 달리는 것이니까요. 사람을 짐승에 비유하는 건 옳지 않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예든, 평민이든 설령 귀족 출신이더라도 능력만 있다면 쓸 겁니다.”
“검은 말이든 흰 말이든……! 그, 그렇겠습니다. 일을 하는 데에는 능력이 중요하지 다른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내 말에 제르우스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검은 말, 흰 말 논리’가 꽤나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남의 말을 베낀 것이라 조금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어차피 이 세계에서 덩샤오핑을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별 상관없겠지.’
일단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 왕국에 노예가 많나요?”
“현재로서는 왕국에 노예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노예는 마족과의 전쟁에 노예병으로 차출되어 죽었습니다.”
“그럼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둘은 전쟁에 나갈 수 없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나갈 수 없는 몸이요?”
“예. 칼리토스는 꼽추이고 바이사르는 사시입니다. 아시겠지만 꼽추와 사시는 불행을 상징하는 저주로 알려져 있고, 다른 사람에게 옮을 수 있는 저주이기에 전쟁에 차출하지 않았습니다.”
“꼽추 칼리토스, 사시 바이사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칼리토스의 주인이었던 판신 공작과 바이사르의 주인이었던 바이말 공작은 그들을 자신의 농장과 공사장에 항상 투입시켰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노예들의 장으로서 여러 작업을 지휘한 것으로 압니다.”
꼽추는 허리가 휜 사람을 말한다. 예전에 비타민 D가 부족해서 걸리는 병이라고 어느 건강 프로에서 봤던 것 같다. 그러나 감기처럼 전염되는 병은 아니다.
사시는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꼽추와 마찬가지로 저주가 아니다. 그저 몸이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일 뿐이다.
그런데 꼽추와 사시가 불행의 상징이자 다른 사람에게 옮을 수 있는 저주라니…… 나로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니 중세시대에 마녀사냥 같은 게 있었던 거려나.’
“단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꼽추와 사시가 불행을 가져온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옮는다는 것을?”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꼽추와 사시가 전염되는 저주였다면 칼리토스와 바이사르와 함께 있던 노예들은 전부 꼽추와 사시가 되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이말 공작과 판신 공작의 노예들 중 꼽추와 사시는 그 둘뿐이었습니다.”
제르우스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우리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의 대부분이 꼽추와 사시를 멸시하고 경멸합니다. 그래서 그 둘은 전쟁에 차출되지 않았습니다. 명색이 ‘인류 연합군’인데 그런 자들을 데려가 사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으니.”
“그렇군요.”
제르우스의 말을 정리해보면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노예로서 갖은 노동을 해온 인물들인 것 같았다. 심지어 다른 노예들을 이끌고 자체적으로 일도 했던 것 같다.
그런 인물들이 하필이면 꼽추이고 사시여서 전쟁에 차출되지 ‘못’했고, 덕분에 아직 살아있다.
‘나에게는 천운이다. 운이 좋군.’
“단장님, 혹시 그 둘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예,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지하 감옥?
“왜 감옥에 있는 거죠? 무슨 죄를 지었나요?”
“아닙니다. 둘은 노예로서 지하 감옥에서 청소와 같은 잡일을 하고 있습니다. 둘의 주인이었던 바이말 공작과 판신 공작이 숙청당한 후 딱히 머무르게 할 곳이 없었기에, 감옥에서 머물게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단장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단장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어떤 인물들인가요?”
<미래 일기>에는 제르우스가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를 추천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니 제르우스는 아마 둘을 좋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내가 제르우스에게 칼리토스와 바이사르의 평가를 묻는 이유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기 위함이었다.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어떤 인물이냐고 물으신다면…….”
제르우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왕국 재건에 꼭 필요한 인물들입니다. 그 둘만큼 노역을 잘 알고 잘하는 자는 왕국에 없습니다. 저 또한 어렸을 때는 농사를 지었고 군에 들어온 후로는 전장에서 여러 공사를 지휘해왔지만, 그 둘의 실력에는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
“판신 공작과 바이말 공작이 그 둘에게 자신들의 노예들을 지휘할 권한을 괜히 준 것이 아닙니다. 둘의 능력은 확실합니다, 전하.”
제르우스의 극찬이다.
채용해야겠다.
* * *
플란크 왕궁 지하 감옥.
똑…… 똑…….
냄새나고 더러운 감옥 이슬이 바닥에 떨어진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한 기운이 가득하다.
간수들이 돌아다니는 복도는 좁지만, 그보다 각 수감자들이 갇혀 있는 감옥이 더 좁다. 각 수감실은 성인 남자 한 명이 편히 눕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감옥은 여러 수감자들을 한곳에 가둬둔다. 하지만 왕궁의 지하 감옥은 모든 감옥이 독방이다.
그리고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오랫동안 독방에 갇혀 있으면 마음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밤낮을 알 수 없게 항상 일정하게 흔들리는 횃불과 계속해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른 죄수의 불안한 숨소리.
감옥의 쥐조차 먹지 않는 끔찍한 맛의 식사.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간수조차 들어가고 싶지 않은 그곳.
그곳을 가능한 깨끗하게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을 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꼽추 칼리토스’와 ‘사시 바이사르’였다.
슥― 슥―.
칼리토스가 헝겊 쪼가리나 다름없는 걸레로 지하 감옥 복도를 닦는다. 걸레로 닦는다고 이 더러운 지하 감옥이 깨끗해질까 싶지만, 놀랍게도 칼리토스의 손길이 머문 곳은 유독 깨끗했다.
웬만한 남성의 허벅지만 한 팔뚝을 가진 칼리토스의 걸레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
“…….”
또 다른 지하 감옥 청소부, '사시 바이사르'가 말없이 걸레질을 하고 있는 칼리토스의 옆을 지나쳤다.
지하 감옥에서 죄수들은 간수들보다 바이사르를 더 껄끄러워 하고 있었는데, 그건 바이사르의 외모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두 눈을 가진 바이사르를 똑바로 마주보는 건 비슷한 처지인 칼리토스 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끼익……!
멀리에서 지하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간수가 들어와 말했다.
“칼리토스, 바이사르. 외출할 준비를 해라.”
“……?”
“……?”
간수의 ‘외출’이라는 말에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하 감옥에 배정된 후로 둘은 단 한 번도 이곳에서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은 식사는 물론이고 잠도 이곳에서 잤다.
“…….”
“…….”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 하던 일을 멈췄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청소 도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간수에게 적당히 다가갔다.
둘이 다가오자 간수가 손으로 코를 막았다. 둘의 냄새도 냄새였지만 둘의 ‘저주’가 자신에게 옮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간수가 칼리토스와 바이사르의 행색을 보며 묻는다.
“……오늘따라 더 지저분한 것 같군. 냄새도 유독 심하고. 혹시 오물을 처리했나?”
―끄덕.
―끄덕.
“젠장, 하필이면 오늘……. 어쩔 수 없지. 그분께서 부르셨는데 그 꼴로 데려갈 수는 없다.”
“……?”
“……?”
“일단 따라와라.”
간수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번에도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간수를 따라갔다.
저벅― 저벅― 저벅―.
그렇게 한참을 간수를 따라 걷자,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감옥 출구까지 다다랐다.
지하 감옥에 들어올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출구였다.
“……!”
“……!”
그 문을 보자 두 노예는 마음이 동했다. 저 문을 나간다고 해서 자신들이 자유인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하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가 생긴 것이다.
자신들의 주인들이 숙청당하고 나서 지하 감옥에 배속되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평생 밖을 나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끼익―!
출구를 연 간수가 지하 감옥 맞은편에 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들어가서 씻어라. 깨끗한 물로 확실하게.”
간수의 지시에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수가 가리킨 건물로 향했다.
둘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깨끗한 물로 씻는다.’
‘……얼마 만이지? 홍수 때문에 농장에 물이 쏟아졌을 때 이후로 처음인가?’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몸을 씻었다.
* * *
툭―.
“먹어라.”
칼리토스와 바이사르가 씻고 나오자 간수는 둘에게 빵을 던져줬다. 고작 빵 하나였지만 칼리토스와 바이사르는 군침이 돌았다. 지하 감옥에서는, 아니, 노예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부드러운 빵이었기 때문이다.
왁― 와구―!
뱀이 쥐를 삼키는 것처럼 단숨에 빵을 흡입하는 두 노예.
간수는 둘을 최대한 쳐다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