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검성 04권
역천검성 04권
역천검성
04
말하는토템
역천검성 04권
차례
제19장. 폐관. - 2
제20장. 호북, 무한.
제21장. 차이점과 변화.
제22장. 육검.
제23장. 용봉.
제24장. 휴식.
제25장. 용봉제의 주인공. - 1
역천검성 04권
제19장. 폐관. - 2
그녀의 말에 마음속으로 당가주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구 번 수련동이 있는 곳은 가장 깊은 곳. 긴 복도를 걸어가 수련동 앞에 당도하자, 당서연이 문을 열어주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수련동에 대한 건 들어가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벽곡단은 벽 끝에 있으니,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기간은 이 주. 때가 되면 제가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서연은 수련동의 문을 연 다음 한 발 옆으로 비켜서서 정운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어두운 방, 나는 겁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럼. 이 주 뒤에 뵙겠습니다.”
당서연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원하시는 성취를 이루시기를 빌겠습니다.”
몸이 어두운 수련동에 완전히 들어가자, 문이 닫히며 밖에서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폐관 수련을 하는 도중 미쳐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어, 폐관 후 밖에서 걸어 잠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모든 불을 꺼둔 상태였기에 수련동은 어두웠지만, 시야는 어둠에 제약받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련동의 내부를 확인했다.
커다란 빈방. 두꺼운 돌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었다. 수련동 한 구석에는 여러 가지 약초가 들어있는 서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말린 고기와 벽곡단으로 채워진 궤짝이 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랍의 앞에는 사람의 반만 한 크기의 향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발이 자연스럽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향로로 향했다.
구 번 수련동.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이 향로에 있었다. 약초와 독초를 배합해서 향로에 넣고, 불로 태워낸 연기를 들이마시는 수련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된 향로와 방.
다른 것을 하기 전에 나는 향로의 앞에 놓인 서랍을 확인했다. 서랍의 앞에는 설명을 위한 책자가 있었지만 구태여 펼쳐보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설명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커다란 서랍 안엔 갖은 식물들이 쓰임새나 설명 따위와 함께 보관 되어 있었다. 몇몇 곳은 비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빈 곳은 독룡이 수련할 때 사용했을 독초들. 대부분의 약초는 남아 있으니.’
정운은 약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지는 않았지만, 당가의 향로에 넣을 약초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전생의 전장에서 함께 막사를 썼던 이들 중엔 당가에서 온 무인들도 많았으니까.
그들은 내게 약초와 독초를 구별하는 법과 약초를 넣은 향로를 통해 몸을 정순하게 만들고 약초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방법과 독초를 사용하는 방법 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 가르침 속에는 독초와 약초를 섞어내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환약도 들어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몸의 원기를 보호하는 약초와 혈도를 깨끗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약초를 섞어 만드는 수준이면 충분했다. 이미 찌꺼기는 대환단으로 다 흘려보냈으니까.
나는 몇 가지 약초를 고르고, 거기에 그냥 복용하기는 애매하나 약효가 적절한 것들을 충분히 섞었다. 잘못 배합하면 오히려 독이 된단 걸 알기에, 골라내고 솎아낸 약초를 충분히 빻아낸 뒤, 하나로 뭉쳐 환약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향로의 가장 위에 올린 뒤 내공을 끌어올려 불을 지폈다. 향로의 아래에서 물이 끊어 오르면서 환약과 섞이고, 약효를 머금은 연기가 온 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준비를 끝낸 뒤에는 기운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윗도리를 벗고 수련동 중앙에 가부좌를 틀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관조. 그리고 일주천. 약초에서 빠져나오는 기운을 하나도 남김없이 단전으로 이동시켜, 부족한 내기를 채워내야 했다.
뱉어낸 숨. 그리고 들이마시는 숨.
들이쉬는 숨에는 피워낸 향이 섞여 있었다. 숨을 통해 들어온 기운은 혈도를 단단하게 만들어내면서 청해행에서 쌓아온 노폐물을 빼냈다.
향로에서 나오는 향기에 맑아지는 정신. 호흡을 따라 들어온 향이 몸을 깨끗하게 정화시켰다. 그리고 남은 기운들은 단전에 쌓이기 시작했다.
향을 피워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는 기운을 추가했음에도 소림의 숭산에 고여있던 기운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 많았지만. 그런 자그마한 것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들이쉬고, 내쉬고. 정운의 정신은 천천히 침잠하기 시작했다.
* * *
천천히 내쉬는 호흡과 들이마시는 호흡이 자연스러워졌다. 반복과 반복. 자연스럽게 호흡에 신경 쓰지 않게 되자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이번 청해행에서 있었던 일.
만약 청해로 가지 않았다면. 노개와 귀객은 죽었을 것이다. 만마와 스물의 적. 그리고 검마까지. 아마도 전생에서는 만마는 폭죽을 터트려 알리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검마가 오지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달랐다.
그 이유는 바로, 나. 계속해서 나에 대한 정보를 묻는 암마. 아마도 마교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당가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오히려 내 행방을 놓친 마교. 거기다 화산과 종남도 궤멸하지 않았으니, 전생과는 달리 지금은 그들 입장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지우지는 못했겠지.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아주 작은 것. 회귀. 날갯짓은 커다란 풍랑을 자아냈다. 섬서에서 화산과 종남은 궤멸하지 않았고, 검선의 깨달음은 나에게로 이어졌다.
또한 숭산에서는 불성과 신의와 인연을 쌓았을 뿐 아니라 대환단과 도움을 받았다. 청해에서는 암마를 죽이고 검마와 검을 섞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전생의 기억에 의존한다면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 많으리라는 것. 내가 느리게 움직이면, 전생과 똑같이 움직인 누군가는 죽는다.
이미 마교의 시선에 들어간 상황. 그리고 내 존재로 바뀌어버린 것들. 그것에서 이어지는 마교의 대응의 변화. 마교의 대응은 전생보다 훨씬, 과격해질 것이 분명했다.
죽음.
내가 막을 수 있는 죽음과 막아낼 수 없는 죽음은 무엇이 있을까.
그 생각은 천천히 깊어져 전생에 있던 이들의 죽음을 향했다. 하나씩 보여지는 죽음들. 이전 생에서 전장에서 나와 함께 싸우다 죽은 사람도, 내가 전장을 벗어난 사이 죽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은 일찍 죽는다. 그의 한쪽 어깨에는 명예가, 나머지 한쪽에는 지켜야 할 사람이 타고 있으니.
그러니. 끝까지 살아남아 천마의 얼굴을 마주한 나는 어쩌면 가장 모자라고 어리석은 이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은 그 후회를 지우라는 뜻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회가 주어졌으니. 하지만 솔직히 두려움도 들어있었다. 줄을 타고 있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이 끝에서 만나게 될 그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 그런 생각들 속. 아직도. 잠이 들면 꿈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천마. 저번 생에서 닿지 못했던 그의 검. 이번 생은 더 가파르고 빠르게 산을 오르고 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경치에 닿을 수 있을까. 실망한 듯 나를 내려다보던 오연한 눈. 그 눈과 다시 마주하지 않고. 그의 얼굴에 두려움을 띄우게 만들 수 있을까.
잡생각에 이어지는 잡생각.
…그만.
이어지는 생각의 연쇄를 끊어내고 머릿속에 공백을 만든 뒤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자연스럽게 가라앉는 몸, 그에 따라 정신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하얀 공간. 그 공간에, 나는 여태껏 지금까지 있던 전투를 하나씩 그려가기 시작했다.
만마와의 전투. 검선의 전투. 섬서에서 이뤄졌던 검마와의 전투. 소림에서의 정계와의 전투. 그리고 청해에서 있던 검마와의 전투.
머릿속에 떠올린 전투들에서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들이 내뱉는 호흡. 내뻗는 팔. 내딛는 다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존재감까지 모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선. 그들이 들었던 무기가 그렸던 선 만이 남아 도화지를 한가득 어지럽게 메우고 있었다.
적이 그리던 그림의 끝은 어딘지. 그것으로 알아낼 수 있는 습관은 없는지. 더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은 없는지. 선에서 읽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끝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것을 분해해서 해석한 후, 난잡하게 이어진 선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머릿속은 다시 새하얀 공백으로 가득 찼다.
이제는 마지막. 전투의 회상을 끝냈고 내부의 단전은 천천히 차오르고 있으니,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정리였다.
커다란 공백. 필요한 재료는 셋. 그중 두 개를 얻었으니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눈으로 찍어내는 내공의 흐름. 처음으로 그려 나갈 것은 스승님께서 남겨주신 검. 공간을 점유하고 그 층위를 이루는 내공의 밀도를 다르게 구성해 파동의 방향을 조절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나의 공격을 강화하는 것.
이 공격은 내공을 층위로 나누고 그 밀도를 세밀하게 조절하는 본질적인 내공의 제어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는 검이었다.
여기에 검선이 남겨준 내공의 분할. 하나의 내공으로 동등하게 여러 갈래로 내공을 분할하는 것. 그리고 분할된 두 개의 내력이 멀어지더라도 그 내력이 끊이지 않고 유지되도록.
그리고 소림에서 얻어낸 부동.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서로의 공격이 부딪쳤을 때도 그 내공이 끊이지 않게 만드는 것.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무당의 양의.
그 순간, 공백에서 깨어났다. 회고도 정리도 모두 마치어 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었다.
다시 호흡에 집중했다.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받아 단전에 쌓아야 했다. 만전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주라는 기간은 너무나도 짧았으니까.
* * *
똑. 똑. 똑.
문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 내부를 관조하던 내 정신은 그 소리에 천천히 깨어났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 그리고 약초를 뭉쳐 만든 환약이 완전하게 타버려 불이 꺼진 향로. 수련동은 들어왔던 것과 똑같은 상태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 한 자세를 취해 굳어진 몸을 풀었다. 짧은 폐관이 아쉽기는 했지만, 시간을 맞춰야 했으니 이제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더 오래 폐관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폐관을 너무 오래 할 필요는 없었다.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10년, 100년 폐관을 하면 절대 고수가 된다는 것은 속설에 불과했다.
재능이 없다면 익히고 정리하여 갈무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10년 폐관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재능이 있다면 10년 동안 폐관을 하는 것은 시간을 버리는 것에 불과했다. 폐관은 자신이 가진 것을 익혀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
그것이 확실하게 통할지 어떨지는 결국 실전에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만든 것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와 대어보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폐관은 홀로 두는 바둑과 같았다. 있던 기억을 회상하고 새로운 방안을 창안할 수는 있지만, 너무 홀로 자기 생각에만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아집과 고집에 갇히게 된다.
그러니 폐관은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때만. 사람과 검을 나누지 않고 전장을 나돌지 않는 검수는 발전할 수 없었다.
“당서연입니다.”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목소리를 내어 안부를 확인하는 당서연.
나는 헛기침을 해 잠긴 목을 가다듬고 소리쳤다.
“깨어났습니다.”
“일검 소협. 이주가 지났습니다.”
“예. 나가겠습니다.”
땅바닥에 벗어두었던 옷을 입으며 천천히 문을 향해 움직였다. 발소리가 문 쪽을 향해서 가까워지자, 밖에서 열리는 자물쇠. 밝은 불빛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부셨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밖에 이주 만에 보는 당서연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주 전과 똑같았다.
“원래 당가에 속하신 분이라면 무어라 말씀이라도 올릴 입장인데, 일검 소협께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주제넘은 것이겠지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고개를 흔들어 부정하자,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그럼, 폐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려는 정운의 말에 당서연이 고개를 가까이했다.
“당가가 무림맹으로 출발하는 날짜가 언제인지 알고 계십니까? 당가주님께는 정확한 날짜를 듣지 못해서요.”
“오늘입니다.”
“예?”
당황한 되물음에 당서연이 밝게 웃었다.
“일검 소협께서 폐관을 마치는 동시에, 집무실로 바로 모시고 오라는 당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하루 정도는 쉬게 해주셔도 될 텐데.”
“마차에서 쉬시지요. 이미 맹으로 출발했어야 했는데, 정운 소협의 폐관 때문에 최대한 미룬 것이라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천천히 걸어 나가는 당서연을 따라, 이주 동안 들어가 있었던 수련동을 나섰다.
역천검성 04권
제20장. 호북, 무한.
복도를 지나고, 문을 건너가자 보이는 햇빛. 오랜만에 몸을 비추는 햇볕은 아름다웠고 따사로웠으나, 마냥 한가롭게 그걸 즐길 시간이 없었다.
당서연의 발은 내가 머물던 방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반쯤 뛰어가는 당서연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당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예.”
나는 말없이 입고 있던 옷을 가리켰다.
“언제까지 당가의 옷을 입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분명 제가 청해에서 당가로 돌아왔을 때, 제 옷을 가져갔었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옷은 당가에서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대화가 끝나자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아가는 당서연.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방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문 옆에 섰다.
“옷은 안에 두었습니다.”
“예.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에 놓인 하나의 옷. 탁자에 검을 올려두고 옷을 살펴보았다.
분명 청해로 갈 때 입었던 옷과 똑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새로 짠 옷이었다.
좋은 옷이다. 당가주가 준비해 둔 것이겠지. 검은 무복을 입고, 검을 허리춤에 걸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