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에서 힐링합니다 06권
북부에서 힐링합니다 06권
북부에서 힐링합니다
06
파머킴
북부에서 힐링합니다 06권
차례
Chapter 01. 그림애쉬 가의 약혼자 - 2
Chapter 02. 보자보자, 어디 보자
Chapter 03. 결코 꺼지지 않는 잿불
Chapter 04. 공사 칠 시간이다
Chapter 05. 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Chapter 06. 악몽의 밤의 재림
Chapter 07. 희망의 불씨
Chapter 08. 휴식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Chapter 09. 그때까지 부디
Chapter 10. 대륙의 암시장
Chapter 11. 너, 뭐 돼?
Chapter 12. 격의 차이 - 1
북부에서 힐링합니다 06권
Chapter 01. 그림애쉬 가의 약혼자 - 2
약혼, 블레어의 말은 짧고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대로 내가 탁자 위에 서신 하나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얼마 전, 블레어가 내게 보낸 서신이었다.
“약혼 때문이라…그 또한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동시에 꾸욱, 블레어가 아무 말 없이 재차 제 손을 움켜쥐었다.
단정하게 정리한 애쉬그레이색의 머리칼.
고요히 가라앉은 붉은색의 눈동자.
거기다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곧게 앉은 몸까지.
표정, 시선, 자세.
모든 게 여전히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손끝의 떨림만큼은 미처 숨길 수 없었으니.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탁자 위의 서신은 분명 자신이 보낸 것.
그만큼 서신의 내용이라면 그 어떤 누구보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제 손으로 직접 북부에, 좀 더 정확히는 발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않는가.
그리고 서신에 응해 발터가 직접 그림애쉬 가까지 찾아왔다면 그 의중은 단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첫 번째, 만에 하나 정말로 흔쾌히 도움을 주러 왔거나.
‘……혹은 약혹을 파기하거나.’
그와 함께 방금 전 발터가 말한 다른 이유.
그것이 후자에 해당한다는 불안함이 블레어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누군가 천천히 제 심장, 혹은 숨통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이에 블레어가 이를 악물며 몸에 힘을 주었다.
하나 그도 잠시.
그녀가 뭔가 깨달은 듯, 몸에 힘을 쭉 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유였다.
북부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저 겨울의 저주를 받은 혹한지도 아니었으며, 예전처럼 왕도의 징벌병만이 향하는 최후의 땅도 아니었다.
노스메디를 시작으로 웅크려 있던 북부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으며.
비단 왕도를 넘어 대륙에 그 위상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한데 그런 북부가 이제 와서 무엇이 아쉽다고 약혼에 매달리는가.
아니 오히려 약혼이 족쇄였다면 모를까.
북부의 입장에서 약혼을 신경 쓸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야 이제 막 날개를 펼친 북부, 그리고 날이 갈수록 쇠락하는 그림애쉬 가.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약혼을 유지하는 것과 파기하는 것 중.
어떠한 선택이 득이 될지는 이미 정해진 바나 똑같았다.
그녀가 몸에 힘을 뺀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만약 자신이 발터였어도 그랬을 터.
어렴풋이 알고 있던 현실을 다시금 마주한 기분은 생각보다 더더욱 처참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늘 도와준 것 역시 마지막 예우일 터.
“……만약 약혼의 파기를 원하신다면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대로 블레어가 발터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이후.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떼었다.
“하나 마지막으로 이번 한 번만…….”
저희 그림애쉬 가를 도와주십쇼.
블레어가 힘겹게 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부탁 대신.
그저 공허한 숨뿐이었으니.
그녀의 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생각처럼 그 뒷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과연 자신이 무슨 염치로 부탁을 하는지.
그 생각이 쉴 새 없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그러나 머지않아.
줄곧 망설이고 있던 블레어가 뭔가 결심한 듯.
강하게 손아귀를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제 영지를 위해서라면.
응당 그림애쉬 가의 가주라면.
아무리 추하더라도, 아무리 수치스럽더라도 말해야만 했다.
가주에 오른 날 이후로.
어떻게든 제 혼자서 짐을 짊어져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래. 영지를 위해서라면 그깟 고개는 얼마나 숙일 수 있었다.
“저희 그림애쉬 가를 도와…….”
그렇게 블레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 숙이려는 찰나.
내가 탁자 아래를 흘깃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손을 아래로 내리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
이에 블레어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녀, 제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탁자 아래로 내려간 손.
그 모습에 발터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그랬다.
당장 내가 감정을 숨길 때 오른손을 움켜쥐던 것처럼.
그녀는 감정을 숨길 때면 손을 아래로 내리곤 하였다.
“블레어, 그대는 내가 정녕 약혼을 파기하기를 원하느냐.”
그대로 그림애쉬 가의 집무실을 따라.
내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움찔, 블레어가 주춤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그런 그녀는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다소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 한결 자연스러워진 모습.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방금 전과는 달리 이쪽이 훨씬 더 어울렸다.
무엇보다 애초에 이걸 의도한 거기도 하고 말이다.
그대로 내가 옅게 웃으며 입을 떼었다.
“예전부터 내 아버지와 더불어 그대의 아버지가 그리 말했지.”
“…….”
“그대와 나는 닮은 점이 많다고.”
그와 함께 내가 블레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정리한 애쉬그레이색의 머리칼.
고요하게 가라앉은 전과는 달리 지금은 작게 흔들리는 붉은색의 눈동자.
하지만 여전히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곧게 앉은 몸까지.
머리색, 눈동자, 자세까지.
겉으로 보기에 그녀와 나는 어느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렇기에 어릴 때에는 그런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감정을 숨길 때면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한다거나.
설령 제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이 부끄러울지언정.
자신보다 영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라던가.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모든 걸 혼자서 짊어지려는 모습까지.
옛 아버지 말처럼, 그녀와 나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블레어, 혹시 기억하느냐.”
그대로 내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을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고 장례를 치르던 날.
장례를 치르기 위한 모든 비용과 더불어 그 정리까지.
당시 그림애쉬 가는 장례식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만큼 그날의 북부에는 그림애쉬 가의 전대 가주,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와 블레어도 자리하고 있었다.
“…….”
그대로 내가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