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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가 나를 시한부로 착각한다 3권
지은이 : 오촘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오촘, 2025
※ ISBN : 979-11-7313-923-9
※ 가격 : 3,900원
※ 발행일 : 2025년 04월 14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1>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라트는 케드릭을 진심으로 죽이려 하고 있었다. 케드릭이 그 사실을 눈치챈 건 제라트가 조를 배정해 주고 나서였다.
케드릭과 같은 조가 된 건 전부 평민이었다. 맥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케드릭에게 명복을 빈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와 같은 조가 되었다.
그는 그 사실에 좌절했다. 그건 다른 평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누가 나랑 조 좀 바꿔 줘.”
“내가 왜 저 자식과 같은 조가 되어야 해.”
다른 수련 기사들은 케드릭과 엮인 기사들의 시선을 피했다.
제라트는 케드릭을 보며 말했다.
“다들 걱정하지 말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급 기사가 함께할 테니, 경들은 그저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면 돼.”
하지만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죽건 말건 제라트는 끼어들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제라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기사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수련 기사들은 저들이 죽을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맥스는 후덜덜 떨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머니, 아버지. 말 안 듣는 쌍둥이 동생들, 라라랑 루리.’
그들은 모두 기사가 된 맥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레더스 가문의 훌륭한 기사가 되어 멋지게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내곤 했다.
‘난 살아야 해!’
맥스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그는 지켜야 할 가족들이 많았다.
맥스의 조는 다른 조보다 숲속 깊숙이 들어갔다. 조금씩 하급 마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맥스는 기계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그의 옆에 있는 케드릭과 다른 수련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 생각보단 잘 싸우네?”
검에 마나를 담지 못하면 하급 마물이라도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케드릭은 어렵지 않게 마물들을 베며 나아가고 있었다.
맥스는 케드릭을 보며 생각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제외하면 확실히 뛰어난 놈이야.’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악신의 힘이 담긴 상급 마물부터는 마나와 신성력이 있어야만 죽일 수 있었다.
아무리 검을 쓰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한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검사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어쩌면 생각보다 아무런 일 없이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맥스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그의 시야에 한 마물이 보였다.
지금까지 나타난 하급들과는 달랐다. 놈은 거대한 덩치에 근육질이었으며, 얼굴엔 눈이 여섯 개가 달려 있었다.
맥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올!”
상급 마물인 하올이었다.
케드릭은 뒤를 돌아보았다. 제라트와 상급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제라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시나 제라트는 그들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하올 한 마리라면 여기 있는 수련 기사들을 전부 죽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케드릭은 몸을 굴려 맥스를 공격하려는 하올의 팔을 잘라 내려 했다. 하지만 평범한 검으로 마물을 자를 수는 없었다.
치이잉!
그의 검은 하울을 베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하울은 다리를 들어 케드릭을 짓밟으려 했다.
[왼쪽으로 굴러야 한다.]
[저 다리에 맞으면 당장 내장이 파열되겠군.]
케드릭은 간발의 차로 몸을 왼쪽으로 굴려 놈의 공격을 피해 냈다. 머릿속의 목소리들이 그를 향해 경고했다.
[도망쳐라.]
[혼자라면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힘을 사용해라.]
머릿속에서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알고 있다. 목소리의 명령과 함께 신성력을 사용하면 마물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이리나 님이 사람들의 앞에서 신성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어.’
그렇다면 이들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나?
맥스와 수련 기사들은 어느새 검도 놓친 채 모든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 케드릭밖에 없었다.
목소리들이 그를 유혹하는 듯 말했다.
[도망치면 너는 정체를 숨길 수 있다.]
[이리나란 꼬맹이와 함께 있고 싶은 거 아닌가?]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 녀석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마 이들을 버리고 간다면, 그는 편하게 도망칠 수 있겠지.
케드릭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선 미친 듯이 목소리들이 떠들어 댔다. 그리고 그 순간.
케드릭의 귓가에 이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드릭, 신성력을 사용해도 돼.”
거짓말처럼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그를 유혹하는 목소리들도, 사람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케드릭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주저앉아 있던 맥스는 넋을 잃은 채 케드릭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시, 신성력?”
그건 제라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분의 말씀이 사실이었구나.”
이리나가 신성을 각성한 소년을 숨긴 것이 맞았다.
하지만, 어째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라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실제로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이리나의 행동이 더욱 황당했다. 저렇게 위험한 녀석을 가문에 숨겨 두다니.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단을 내려야겠어.”
소년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흘러나오는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신성력을 지닌 기사는 많지 않다. 신성력을 지닌 이들은 예로부터 약한 몸을 타고나 무사히 성장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비정상적인 능력을 지닌 자들이 세상에 나타나고는 했다. 신성력도 강하며 육체 능력도 다른 기사들보다 뛰어난 자들이.
맥스는 신성력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우매한 그의 눈에도 케드릭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보였다.
케드릭의 나이 열세 살, 수련 기사들 중에서도 어린 축이었다.
강대한 신성력 앞에 마물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신의 뜻대로.]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검이 하올의 목을 꿰뚫었다.
크아아!
고통 어린 음성을 내지른 하올의 거대한 몸이 천천히 쓰러져 내렸다.
* * *
이리나는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가온이 함께였다.
가온은 말없이 케드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마법을 사용할 것 같더니, 용케 참았구나.”
“케드릭이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것치곤 바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대기시켜 놓던데?”
“다치게 할 수는 없잖아요.”
가온은 케드릭이 도망쳐도 실망하지 않았을 거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고, 두려울 수 있는 일이었다.
열세 살.
아직은 어린 나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정식 기사가 된 이들도 상급 마물을 상대하기 어려워했다.
그런 상황에서 케드릭은 도움이 되지 않는 동료들을 버리지 않고 마물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겨 냈지.’
가온도 놀랄 만큼 케드릭의 의지력은 대단했다.
“그래, 네 말대로 저 녀석의 신성력은 엄청났다. 나 역시도 약간 놀랄 정도였지.”
“엄청 놀라셨으면서 약간 놀랐다고 하시네요.”
이리나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가온은 말문이 막혔다. 실제로 그는 케드릭을 보고 무척 놀랐다.
비열한 제라트의 술수에 맞서는 케드릭의 모습은 솔직히 말하자면…….
기특했다.
“네가 신성력을 사용하라고 말해 준 거지?”
“어차피 케드릭의 신성력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옳은 일에 사용하는 게 낫죠.”
이리나는 가온에게 질문했다.
“가온 경, 신을 믿으시나요?”
성기사에게 묻기엔 이상한 말이었다.
“나는 광신도라고 불릴 정도로 신실한 성기사다.”
“그건 알고 있어요.”
신을 믿냐고? 믿기는 했다.
‘존재는 하겠지.’
하지만 믿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신을 증오했다.
만약 그의 자비가 부모님에게도 향했더라면. 차라리 그에게 신성력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내가 신의 존재를 믿으니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겠지. 신을 믿을수록 신성력은 강해지니까.”
“빛의 신은 자신을 배신한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분이시긴 하죠.”
“하지만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은 별개다.”
“…….”
“나의 신이 선하신 분이었다면, 대신관은 왜 아직도 멀쩡한 걸까?”
가온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의 신께서 그렇게 자비로우시다면, 왜 아직도 벌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을까?”
그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