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 04권
천신 04권
천신
04
김강현
천신 04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천신 04권
Chapter 01.
발터스 영지는 아주 평화로웠다. 추수도 끝났고, 집집마다 밀과 보리가 넘쳐났다. 게다가 클레인이 가져온 생필품들 덕분에 아주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발터스의 영지민들은 본격적으로 월동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조만간 겨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번 겨울은 그동안 겪었던 그 어떤 겨울보다 따뜻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발터스 상단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클레인을 중심으로 상업에 재능이 있을 법한 영지민 몇을 뽑아 상단을 만들었다.
발터스 상단의 주력 판매 품목은 철이었다. 그리고 주 수입 품목은 생필품이었다. 또한 나중에는 식량도 수입하게 될 것이다. 영지민이 늘고 영지가 더 활성화 되면 식량이 분명히 모자라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영지는 평화로운 와중에 활발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바람이 차가워졌다.
“아이린, 이제 슬슬 돌아가자꾸나.”
아이린은 스승의 말을 듣고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영주성에 박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린.”
스승이 다시 한 번 불렀다. 아이린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스승을 바라봤다.
“스승님. 대체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글쎄다. 보통 사람은 아닌 걸로 보이더구나.”
“그렇게 훌륭한 치료사가 있는데, 대체 우리는 왜 부른 걸까요?”
아이린의 스승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느냐. 어쨌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치료를 했고, 그 대가를 충분히 받았으니 불만을 가질 필요야 없겠지. 이제 슬슬 돌아가자꾸나.”
아이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웅장하게 서 있는 발터스 성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왜 그러느냐?”
아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은 그 눈빛에 담긴 열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이린의 스승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가고 싶으냐?”
아이린이 흠칫 놀라 스승을 바라봤다. 그리고 스승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인자한 미소를 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가요, 스승님.”
스승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아이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스, 스승님…….”
“선물이다.”
스승의 말에 아이린은 망연한 얼굴로 그가 내민 물건을 바라봤다. 그것은 두꺼운 책이었다. 책을 받아 펼치니 그 안에는 스승의 필체가 가득했다. 모두 약초에 대해 설명한 글이었다.
아이린의 스승은 웃으며 돌아섰다.
“네가 왜 치료사가 되었는지만 잊지 말거라.”
아이린은 멀어져가는 스승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따라가고 싶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스승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레이엘은 자신의 방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내놓고 고심 중이었다. 그것들은 이번에 새로 얻은 드래곤의 사체에서 빼낸 부산물들이었다.
드래곤의 사체는 대부분 원형이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몸에 흐르는 피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 기본적인 성질은 거의 변하지 않은 듯했다.
레이엘은 모든 부위를 조금씩 추출한 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성질을 자세히 살피는 중이었다.
드래곤의 몸체는 드래곤하트가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조금씩 분해되어 대자연 속으로 흩어진다. 그것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다. 당시 드래곤의 사체가 있던 곳에는 어른 머리통만 한 마나스톤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것들이 드래곤의 사체를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커다란 마나스톤이라지만 드래곤의 사체를 완벽하게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씩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도가 지극히 더뎌 결국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레이엘의 아공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레이엘의 아공간은 드래곤하트를 이용해 만들었다. 덕분에 용적률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내부가 완전히 마나로 꽉 차 있다는 점이었다. 레이엘의 아공간은 그 자체가 드래곤하트나 다름없었다.
드래곤의 사체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값어치를 가진다. 그 희귀성도 희귀성이지만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그 유용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드래곤의 비늘만 해도 그 단단함이 어마어마해서 오라마스터라 하더라도 함부로 잘라낼 수 없을 정도였다. 드래곤의 힘줄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그 어느 물질보다 탄력적이고 내구성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런 드래곤의 사체를 이용하려면 한 가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마나스톤이나 마정석을 이용하면 어떻게 될 것 같긴 한데…….”
레이엘의 표정이 조금 더 심각해졌다. 마나스톤이나 마정석을 이용하면 대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일단 마나스톤의 마나가 다 떨어지면 그 순간부터 드래곤의 사체로 이루어진 부분은 즉시 분해가 시작된다. 예를 들어 드래곤의 뼈로 검을 만들었다면 마나스톤의 마나가 사라진 순간 분해되는데, 그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사람이 쓰기에는 꽤 큰 검이라 하더라도 드래곤의 크기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작다. 빨리 분해되는 게 당연하다.
마나스톤이 주변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흡수하긴 하지만 강한 타격을 계속 주면 마나가 쭉쭉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특히 전장에서는 더 심하다. 그러니 언제 검이 사라져버릴지 알 수 없다. 더구나 마법 공격을 당하면 마나소모가 더 극심해진다.
“무기로 쓰는 건 쉽지 않겠군.”
하지만 무기로 쓰지 않는다면 드래곤의 사체 따위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리고 마나스톤은 이런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마나스톤을 이용해 마법진을 만들면 거의 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쉽지 않군. 좀 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 봐야겠어.”
레이엘은 일단 다시 아공간을 열었다. 순식간에 방안이 짙은 마나로 가득 찼다. 레이엘은 아공간에 재료들을 몽땅 넣고 다시 입구를 닫았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방안에 쌓였던 그 많은 마나가 몽땅 레이엘의 폐로 빨려 들어갔다. 레이엘은 폐에 가득 찬 마나를 즉시 흡수했다. 마나는 몽땅 레이엘의 명치 부분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원래 그곳에 위치해 있던 단단하게 뭉친 마나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후우우.”
레이엘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탁한 기운이 그의 숨을 따라 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순수한 마나를 제외한 나머지 불순물을 뱉어낸 것이다.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야 돼.”
레이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아공간을 열어 방안을 마나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호흡을 통해 마나를 흡수하는 과정을 다시 반복했다.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수련을 하던 레이엘은 이내 그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몸을 풀었다.
레이엘의 움직임을 따라 사방에서 마나가 몰려들었다. 호흡을 통해 받아들인 마나는 명치로 이동시켰지만, 이렇게 몸을 움직이며 받아들인 마나는 아랫배 쪽으로 이동시켰다.
레이엘의 수련은 끝없이 이어졌다. 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 지겨울 법도 하건만 레이엘에게는 지겨움이라는 감정이 결여된 것인지 쉬지도 않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밤의 차가운 마나가 몰려오기 시작하자, 레이엘의 움직임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격렬하고 빠른 동작이었는데, 갑자기 느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바뀐 것이다.
낮에 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 이제 완전히 한밤중이 되었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레이엘의 수련이 멈췄다. 레이엘은 길게 숨을 내쉬고 정령을 불러 몸에 흐른 땀을 닦아낸 후, 방에서 나갔다.
시녀들이 몇 번이나 찾아왔었지만, 레이엘이 문을 잠갔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덕분에 레이엘은 점심과 저녁을 걸렀다. 실로 오랜만의 수련이었기 때문에 밥은 굶었지만 몸은 비할 데 없이 상쾌했다.
‘앞으로는 계속 수련에 매진해야겠군.’
레이엘은 슬슬 다시 숲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이제 영지의 일이 대충 마무리 되었다. 영지는 이대로 두어도 잘 굴러갈 것이다. 식량이 있고, 돈이 있다. 그리고 그 돈이 흐를 길도 마련되었다.
그렇다고 영지를 완전히 떠난다는 뜻은 아니었다. 레이엘은 자신의 거처를 숲에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포레인에서와 마찬가지로 길잡이를 할 생각이었다. 물론 포레인에서보다는 훨씬 자주 영지로 나올 것이다.
어렸을 때는 사람이 무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무서움은 사라졌다. 대신 무관심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무관심했다. 관심을 줄 이유가 없었다. 한데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는 관심이 생겼다. 아니, 그냥 관심이 아니었다. 많은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호기심도 생겼다. 질투의 감정도 생겼고, 목표도 생겨났다.
레이엘은 자신이 비로소 다시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에 대해 얘기해 주기로 하고선 아직도 미루고 있었군.”
레이엘은 걸음을 멈췄다. 자신에 대한 얘기를 사라와 제니아에게 해준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과연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을까부터 시작해서 이 얘기를 듣고도 사라와 제니아가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레이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그려졌다. 이건 분명히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레이엘은 마치 메마른 사막에 풀 한 포기가 자라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레이엘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길이 향하는 방향은 식당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일단 지금은 배를 채워야만 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기에 모두 정리까지 끝내고 잠자리에 든 것이다. 레이엘은 개의치 않고 스스로 알아서 음식을 만들었다.
대충 만들었음에도 꽤 괜찮은 음식들이 만들어졌다. 레이엘은 만족하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이엘에게 남은 유일한 욕구가 바로 생존욕과 식욕이었다. 포레인의 주점에서 맛있는 술을 대접해준 술집 주인에게 술값으로 금화를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그 외에 다른 부분에도 욕심을 내고 있다. 드래곤의 사체를 가져온 것도 그렇다. 그동안 마수를 사냥하며 그 사체를 모은 것은 거의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사체는 그렇지 않았다. 드래곤하트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오로지 레이엘의 욕망에 의해 얻은 물건들이었다.
사실 레이엘은 스스로의 변화를 완전히 느끼지는 못했다. 뭔가가 변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변하고 있는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준비한 모든 음식을 깨끗이 비운 레이엘은 식당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레이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당히 생소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레이엘은 들어온 사람을 가만히 쳐다봤다. 여자였다. 그리고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기운도 완전히 생소하지 않았다.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레이엘을 발견하자마자 반색하며 얼른 다가갔다. 그리고 레이엘 앞에서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전 아이린이라고 합니다.”
“레이엘이다.”
레이엘은 일단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궁금한 마음이 들어 아이린을 바라봤다. 아이린은 다시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제게 치료술을 가르쳐주세요!”
“치료술?”
레이엘은 그제야 아이린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아이린은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온 두 명의 치료술사 중 한 명이었다. 다른 한 명은 노인이었는데, 아마 혼자 돌아간 모양이었다.
“전 치료술을 익혀서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시키는 일은 뭐든 하겠어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아이린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레이엘은 그런 아이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이린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점점 밝아졌다. 그리고 이내 아이린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 레이엘을 똑바로 바라봤을 때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빛났다.
레이엘은 아주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빛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 오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아이린은 사라나 제니아와 비슷한 느낌을 풍겨서 친근감이 들었다.
아이린은 레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시녀들을 만날 때마다 레이엘이 있는 곳을 묻고 또 물어 이렇게 식당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사실 허락을 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얘기를 해보고,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 시도할 작정이었다. 한데 이렇게 단번에 허락을 얻으니 갑자기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저, 정말인가요?”
“내가 거짓을 말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아, 아뇨! 그렇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이린은 연방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레이엘은 그런 아이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내 아이린이 죄송하다는 말을 멈추고 슬그머니 레이엘의 눈치를 살폈다.
“밥은?”
레이엘의 말에 아이린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 더욱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머, 먹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레이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몇 가지 음식을 준비했다. 짧은 시간 안에 준비할 수 있는 음식으로는 고기구이가 최고였다. 레이엘은 주방으로 가 아공간에 저장해 뒀던 쌍두사의 고기를 꺼내 불의 정령을 이용해 간단히 구운 후, 접시에 담아 아이린 앞에 내려놓았다.
아이린은 또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고맙다고 말한 후, 호호 불며 그것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먹었지만, 이내 그 맛에 놀라 허겁지겁 뜯어먹었다. 아이린은 오늘 한 끼도 먹지 않고 레이엘을 찾아다녔다.
음식을 모두 먹은 아이린은 다시 레이엘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엘은 아이린이 모든 음식을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아이린은 조용히 레이엘의 뒤를 따랐다.
* * *
“여, 여긴……?”
“내 방이다.”
아이린은 레이엘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녀는 이렇게 깊은 밤에 남자가 자신의 방으로 데려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고 순수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이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레이엘은 먼저 방에 들어가서 아이린을 쳐다봤다.
“들어와라.”
레이엘의 말에 아이린은 머뭇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병사들을 치료하던 레이엘의 그 대단한 모습을 떠올리며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그것을 배울 수만 있다면 정말 어떤 것도 참아낼 수 있었다.
“저 침대를 쓰면 된다. 씻길 원하나?”
아이린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순간 그녀의 몸을 거대한 물방울이 덮쳤다.
촤악!
아이린은 물방울에 갇힌 채,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물론 그건 다행이었다. 만일 물방울에 갇힌 채 숨을 쉬었다면 엄청나게 괴로웠을 테니까. 그녀가 숨 쉬는 것을 기억해내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신 순간, 이미 물방울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악! 하악!”
아이린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레이엘을 바라봤다. 어느새 몸은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물방울에 갇혔던 게 꿈인 것만 같았다.
“아아……!”
온몸이 깨끗해졌다. 게다가 옷도 마치 세탁을 막 마친 것처럼 말끔해졌다. 아이린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레이엘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야 레이엘이 처음 병사들의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물을 이용해서 막사 안을 깨끗이 씻어냈다.
“침대는 저쪽에 있다.”
레이엘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아이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봤다. 깨끗하고 새하얀 침대가 보였다. 아이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침대 앞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이린은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이린의 매끈한 어깨가 드러났다. 레이엘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공간을 열고 침대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방에 원래 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편안해 보이는 침대였다.
‘가지고 오길 잘했군.’
그 침대는 유적에서 발굴한 것이었다. 고대의 마법이 잔뜩 들어간 침대였는데, 그동안은 아공간에 보관만 해놓고 쓰지 않았었다. 레이엘이 쓰기에는 침대가 지나치게 화려했기 때문이다.
레이엘이 침대에 들어가 누울 무렵, 아이린도 옷을 모두 벗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고 미지의 그것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기대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아이린은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천장이 보였다. 방안은 아직 환했다. 아이린은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봤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단순히 화려하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한 침대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편안히 누워 자고 있는 레이엘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린은 한편으로는 안심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허탈하고, 또 묘하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 살아오면서 오늘과 같은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리라.
‘뭐, 뭐야, 나 혼자서 괜히 설친 거야?’
아이린의 뺨이 더더욱 새빨개졌다. 아이린은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리고 그렇게 얼굴을 붉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