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 02권
천신 02권
천신
02
김강현
천신 02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천신 02권
Chapter 01.
레이엘이 천천히 켄트에게 다가갔다. 켄트는 레이엘의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엘이 주는 공포는 움직일 생각조차 날려 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레이엘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죽이는 건 간단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끝이다.
“흑마법사를 끌고 다닐 만한 놈은 아니군.”
암흑의 폭발 속에 있었기에 다카르와 켄트의 대화를 거의 못 들었지만, 다카르가 켄트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놈을 죽이는 것보다는 분란의 씨앗을 뿌리는 게 더 낫겠군.”
레이엘이 손을 한 번 휘젓자, 켄트에게 물이 쏟아졌다.
촤아악!
켄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몸에 묻었던 피가 말끔히 씻겨 나갔다.
“커헉!”
켄트는 두려운 눈으로 레이엘을 바라봤다. 레이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더 무서웠다.
“사, 살려 주십시오. 무, 무슨 짓이든 다 할 테니, 제, 제발…….”
레이엘은 애원하는 켄트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하지만 켄트를 그냥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켄트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는 해둘 생각이었다.
“이걸 먹어라.”
켄트는 흠칫 놀라 레이엘이 내민 것을 바라봤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빵이었다. 색이 검어서 왠지 불길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걸 먹지 않으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날 이렇게 만든 놈에게 복수를 해야지.’
켄트는 레이엘이 내민 빵을 먹었다. 놀랍게도 빵은 대단히 맛있었다. 입에서 부드럽게 녹으며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갔다.
“어때? 힘이 좀 나나?”
켄트는 문득 몸에 활력이 넘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빵을 먹은 모양이었다.
“네가 먹은 빵은 독이다. 아마 한 달에 한 번은 배가 끊어질 것처럼 아플 거다.”
레이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켄트가 눈을 홉떴다.
“크윽!”
켄트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배를 칼로 휘저으면 이렇게 아플까? 아니, 그래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레이엘은 그렇게 뒹구는 켄트를 발로 툭 찼다.
“커허헉!”
켄트는 놀람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레이엘을 바라봤다. 아니, 이제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다. 레이엘이 발로 그의 등을 건드리는 순간, 고통이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복종심뿐이다. 고통이 찾아오면 내게 진심으로 복종하겠다고 강하게 생각해라. 그럼 고통이 사라질 테니까.”
레이엘의 말에 켄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레이엘은 켄트가 믿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돌아서서 제니아와 사라에게로 걸어갔다.
세 사람은 켄트를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켄트는 한동안 망연한 눈으로 레이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켄트가 레이엘의 말을 확인한 건, 정확히 한 달 후였다. 매달 겪는 고통과 복종, 해방 덕분에 켄트의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갔다. 하지만 레이엘에 대한 복수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복종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매달 겪는 고통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그렇게 켄트는 레이엘에 대한 복수를 접고 모든 복수심을 그의 형인 케이지에게로 돌렸다.
“정말로 그런 독을 만들 수 있는 건가요?”
제니아의 물음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레이엘이 살펴보니 사라의 눈에도 마찬가지의 감정이 보였다.
“그런 독이 있을 것 같아?”
“그, 글쎄요.”
제니아도 사라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불가능한 독이라고 이성으로는 판단하면서도 레이엘이 얽혀 있으니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면이다.”
“예?”
너무나 난데없는 말에 제니아와 사라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최면이라니.
“최면과 암시다. 빵에 있던 독은 1회용이었다. 그나마도 내가 다 배출해 버렸고.”
제니아와 사라의 표정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 두려움은 분명 조금 전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레이엘은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최, 최면으로 그런 게 가능한가요?”
“정신이 거의 망가진 상태였으니 가능하지.”
제니아와 사라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었다. 하지만 두 여인의 뇌리에는 수많은 상념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들의 상념 중 대부분은 레이엘에 관한 것이었다. 사라도 제니아도 가장 궁금한 것은 한 가지였다.
‘대체 정체가 뭐지?’
정말로 정체가 궁금했다. 어떻게 그런 대단한 능력을 고작 이정도 나이에 얻을 수 있는지. 또 그렇게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마수의 숲에서 살았는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라가 물었다.
“레이엘.”
레이엘이 고개를 돌려 사라를 바라봤다. 사라는 레이엘의 공허하면서도 깊은 눈빛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긴장이 흘렀다. 사라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익힌 거죠?”
사라의 물음에 레이엘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또 다시 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사라도 제니아도 걸음을 멈춘 채 레이엘의 입만 주시했다.
이내 레이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꿈이다.”
“예?”
레이엘의 정말로 생뚱맞고 난데없는 대답에 사라와 제니아의 긴장이 확 풀려 버렸다. 두 여인은 농담 같은 레이엘의 말에 얼굴에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이내 심각해졌다. 레이엘이 농담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두 여인이 레이엘을 바라봤다. 레이엘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똑같이 공허하고 깊었다.
두 여인의 머릿속에 혼란이 몰려왔다.
대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꿈이라니. 설마 지금 이 상황이 모두 그의 꿈이란 말인가? 제니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다. 자신이 그런 허망한 존재일 리 없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의미일까?
한동안 대화가 극도로 적어졌다. 제니아와 사라가 레이엘의 한 마디 말에 계속 휘둘리고 있었다.
두 여인의 생각이 점점 하나로 압축되었다. 꿈이라는 의미는 꿈에서 익혔다는 뜻일 수도 있다. 즉, 그것은 꿈에서까지 수련을 할 정도로 노력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뭔가 미진했지만 그렇게 결론을 짓는 것이 가장 그럴 듯했다. 그리고 가장 편했다.
“정말 굉장한 노력을 했나보네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은 회의에 물들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봐야 고작 20년 정도의 세월로 해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 법이다.
‘아공간을 만들 정도의 마법에,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드레이크 기사단 열셋을 혼자서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검술에, 또 정령에, 대장장이까지. 게다가 보아하니 숨겨진 다른 능력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걸 고작 20년도 안 되는 세월에 익혀낼 수 있을까? 인간이? 나이가 20살 정도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을 수련에 쏟는다 하더라도 레이엘이 가진 능력 중 하나를 제대로 이룰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천재……라는 건가?’
사라와 레니아는 각자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런 두 여인을 바라보는 레이엘의 눈빛이 점점 더 깊어졌다.
가넷상단에서 보낸 흑마법사를 처리한 뒤로는 별다른 일 없이 카라미스 공작령에 도착했다. 카라미스 공작령은 상당히 큰 영지였다. 크롬왕국에는 2개의 공작령이 있었고, 카라미스 공작령은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땅은 훨씬 비옥했다.
그 비옥한 땅에서 나오는 막대한 곡물 덕분에 카라미스 공작가는 왕국 최고의 부와 영향력을 쌓을 수 있었다.
막 추수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공작령 어디를 가건 온통 탐스럽고 누런 곡식들 천지였다.
“대단하군.”
레이엘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카라미스 공작령의 농지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그 모든 걸 거두면 양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카라미스 공작령은 왕국 최고의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어요. 가장 비옥하고 가장 넓죠.”
제니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대단한 카라미스 공작가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자신감이 쭉쭉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입을 앙다물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할 건지는 생각했나?”
레이엘의 물음에 제니아가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만,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에요.”
“카라미스라는 성은 버릴 건가? 그럼 평민이 될 텐데? 아니, 그 전에 그걸 공작가에서 허락해줄 것 같은가?”
레이엘의 말은 담담했지만 핵심을 파고들었다. 제니아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 해주겠죠. 그리고 뒤로 다른 수작을 부리겠죠.”
어쩌면 암살자까지 동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니아는 마음을 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가면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더 이상 그녀를 쫓는 사람은 없다. 가넷상단을 통해 그녀의 존재가 알려질지 모르지만, 그때쯤이면 다른 나라로 가서 조용히 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니아는 그렇게 하기 싫었다. 당당하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싶었다. 물론 어렵겠지만 말이다.
문득 제니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레이엘과 사라를 바라봤다.
“어쩌면 저 때문에 피해를 볼 수도 있어요.”
레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함께 오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충분히 각오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위협에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제니아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레이엘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이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제니아의 시선이 사라에게로 돌아갔다. 사라역시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더 앞섰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두 사람은 이쯤에서 손을 떼세요.”
제니아의 말에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라니요. 전 끝까지 아가씨와 함께할 거예요.”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죽는 것보다 훨씬 몹쓸 짓을 당할 수도 있어. 난 사라가 그렇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아.”
사라의 눈에 물기가 일렁였다.
“그럼 아가씨는요? 아가씨는 어떻게 되는데요? 아가씨 혼자 공작가에 보내놓고 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전 절대 그렇게 못해요.”
제니아는 사라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라의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게 가슴을 적셨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사라를 데려갈 수 없었다. 제니아는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레이엘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도움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레이엘은 제니아의 간절한 눈빛을 묵묵히 바라봤다. 두 여인의 대화나 행동을 보고 있으면 또 다른 빛이 두 사람을 감싸는 것 같았다. 욕심이 생겼다. 그 빛을 가지고 싶었다. 레이엘은 문득 자신이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 쓸데없는 집착 아닌가.
“후우. 여차하면 도망갈 방법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레이엘의 말에 제니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내가 도와주겠다는 말이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두 사람 정도는 데리고 도망갈 수 있으니까. 내 능력을 너무 얕보지 마라.”
“레, 레이엘의 능력을 얕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전혀 위험하지 않다. 여차하면 마수의 숲까지만 도망가면 된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그곳은 제국의 대군이 몰려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이다.”
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수의 숲은 그런 곳이다.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곳, 그리고 레이엘의 고향이었다. 제니아는 촉촉한 눈빛으로 레이엘을 바라봤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라도 고마워. 정말로 든든해. 내게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제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또 다른 결심을 했다. 목표를 더 확장해서 새로운 길을 바라봤다. 언젠가는 이 두 사람에게 지금 자신이 느낀 그 감정을 고스란히 가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럼 갈까요?”
사라가 밝게 웃으며 말하자, 제니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이엘이 무심한 얼굴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그렇게 카라미스 공작령의 곡창지대를 지나 공작성에 도착했다.
* * *
“제니아가 돌아왔다고? 그것도 혼자서?”
얼마 전 카라미스가의 가주이자 공작이 된 세이드 카라미스는 자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다.
“드레이크 기사단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봤느냐?”
세이드의 질문에 그의 심복인 이레인 남작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포레인에 도착한 것까지 확인했습니다만, 그 이후의 행적이 없습니다.”
“행적이 없어?”
“아무래도 마수의 숲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세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수의 숲은 라이온 기사단을 먹어치운 곳이다. 그런 곳에 드레이크 기사단이 들어갔다면 아마 절대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드레이크 기사단은 우리 카라미스가의 기둥이나 다름없다. 어떻게든 찾아라. 제니아가 돌아왔는데, 그들이 아직까지 그곳에 있을 리 없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레인 남작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했지만 표정은 살짝 회의적이었다. 드레이크 기사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행적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봤다. 하지만 포레인 시에서 감쪽같이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마수의 숲에 들어가서 모두 당한 게 분명해.’
하지만 그렇다고 마수의 숲을 조사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카라미스 공작가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나저나 제니아는 지금 어쩌고 있느냐?”
“아가씨의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