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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녹로 8권
지은이 : 원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원, 2025
※ ISBN : 979-11-7408-453-8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8월 22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8권
지금 돌이켜 보더라도 이상한 일이었다.
스승님의 부고를 전해 듣고, 조운의 몸으로는 죽음을 맞이한 그날이, 천마가 혈마에게 습격당한 날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삶의 매 순간은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천하에서 제일을 손꼽던 고수 둘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습격을 당한다?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일 테다.
“…….”
스승님과 자신의 죽음, 천마의 습격.
그날의 사건들이 모두 하나의 실타래에 연결되어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모르겠구나. 스승님의 사건을 파헤칠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드는 기분이야.”
잠시 고민에 빠져 건넨 말에 위혁천은 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만 해도 그런데, 형님 머릿속은 당연히 더 복잡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오늘은 푹 쉬시죠. 이제 거의 다 오기도 했고 또…. 신교에 가시면 형님이 찾는 실마리를 찾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위혁천의 말이 맞다.
비록 천마를 치료하기 위해 십만대산으로 떠나는 거지만, 그곳에 도달하면 이 모든 일의 진상을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며칠이 지나도록 운조와 위혁천은 끊임없이 이동을 이어갔다. 산과 계곡을 넘고, 깊은 숲속을 가로질렀다.
“키에엑!”
“캬악! 키아악!”
낮에는 햇빛에 몸을 숨기며, 밤이 되면 강시와 어둠 속의 짐승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경공을 사용해 이동했다.
?이거 아쉽습니다. 산채에 있던 그 거대한 혈타마를 탈 수 있었다면 십만대산까지 거리를 금방 줄일 수 있었을 텐데요. 어차피 동물은 물리더라도 강시가 안 되지 않습니까?
?혈타마를 평범한 준마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혈타마는 단지 빠르고 거대한 품종의 말이 아니라 제 피붙이처럼 아껴야만 하지.
?피붙이요?
?애초에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혈타마는 상대가 천하제일인이라고 할지라도 등을 내주지 않을 거다. 도리어 끝까지 혈투를 벌이다가 죽는 것을 택하겠지.
지금처럼 강시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곳에서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아야 했기에 운조와 위혁천은 전음으로 대화를 대신했다.
?비록 짐승은 강시에게 물려도 강시로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시에게 습격받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않느냐?
?흠. 그렇긴 하겠습니다. 혈타마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가만히 휴식을 취할 때는 기본적으로 투레질 소리라든가 필연적으로 사람보다 소음을 크게 낼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요.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운조가 슬쩍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게다가 이번 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잖아. 비록 네가 신교의 삼 공자라고 할지라도, 신교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래서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이 더 안전한 선택이었지.
?그렇긴 하죠. 신교 내부의 상황은 원래도 복잡했으니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형님은 교주님을 치료하는 것 외에도 최대한 많은 것을 조용히 알아내야 하시지 않습니까.
운조는 위혁천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여정은 신중함이 필요하지. 십만대산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은밀하게 오가는 전음처럼 운조와 위혁천은 마치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녹아든 채로 이동을 계속했다.
스스슥-
스슥-
그리고 몇 주간의 은밀한 발걸음이 계속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 동이 트던 아침.
운조와 위혁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휴우. 뭔 놈의 강시들이 인근까지 빽빽하답니까? 신교로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 빽빽해서 원.”
걸음을 멈춘 위혁천은 허리를 쭉 펴 찌뿌둥한 몸을 풀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십만대산 입구에 도착하긴 했습니다.”
“그래. 저 멀리 흑문이 보이는구나.”
운조와 위혁천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신교의 유일한 출입문.
‘흑문(黑門)’이라 불리는 거대한 철문이었다.
십만대산을 둘러싼 모든 험준한 산과 절벽을 가로막는 이 문은, 그야말로 천하의 요새라 할 만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문 위에는 신교의 상징인 칠흑 같은 검은 불꽃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거대한 쇠사슬이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매번 스승님과 함께 오던 길이었는데. 흑문을 홀로 가는 날이 올 줄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구나.”
“아니… 형님.”
운조의 말은 덤덤했지만, 그의 어조에서 스승을 향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나오자 위혁천은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이 의선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운조가 얼마나 자신의 스승을 애타게 생각하고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섭섭합니다 형님.”
“…?”
“형님이 왜 혼잡니까? 지금 몇 날 며칠을 꼬박 새가며 형님과 함께 달려왔는데. 그리 말하시면 저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애쓰는 위혁천의 말에 운조는 피식 웃었다.
“미안하구나. 내 생각이 짧았다.”
운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위혁천은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헤벌쭉 웃으며 흑문을 향해 턱짓했다.
“아셨다니 됐습니다. 그럼 들어가 보시죠. 아직 갈 길이 멀긴 했어도 흑문에서부터는 말을 빌리거나 마차를 불러 가면 되니 그래도 좀 편하게 갈 수 있을 겁니다.”
말 한마디로 딱히 변하는 것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위혁천의 말에 운조는 마음의 심란함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엣헴, 그리고 뭐, 형님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신교 내에서는 영향력이 좀 있는 편이지 않습니까? 가문도 나름 먹어주는 편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래. 그런 편이지.”
“어어? 형님. 방금 미소가 뭔가 좀 싸늘했습니다. 설마 비웃은 건 아니시겠죠?”
“가자.”
“아니, 형님. 대답도 않고 그렇게 가시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흑문은 신교의 영역을 알리는 표식일 뿐.
흑문 안쪽에 펼쳐진 십만대산은 사실 작은 세상이 그 안에 펼쳐져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십만대산의 면적이 워낙 방대하고 넓기에 흑문을 지나서도 천마가 기거하고 있는 곳까지 가려면 또 최소 며칠을 이동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다만 위혁천의 말대로 흑문에서부터는 말을 빌려 타고 가거나 혹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 되었다.
그렇기에 운조와 위혁천은 이제 천마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는 여태 강시들이 드글거리는 길을 피해 온 것과 달리 비교적 수월하리라 여겼었다. 하지만.
“그만. 멈춰서 소속을 밝혀라.”
“…허. 이거 처음 보는 문지기 놈들인데. 어디 가문 놈들이길래 감히 나를 몰라보지?”
“두 번 다시 말하지 않는다. 멈춰서 소속을 밝혀라.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흑문으로 다가오는 순간 목을 베어내겠다.”
운조와 위혁천이 흑문 앞에 다다르자, 흑문의 문지기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원래였다면 네 놈들의 목부터 쳤을 텐데 오늘은 귀한 손님과 함께니 참아 주도록 하지. 공명세가의 위혁천이다. 잘 외워둬라. 다음번엔 무조건 목을 칠 테니.”
신교의 입구인 흑문의 문지기가 신교의 삼 공자인 위혁천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흑문의 문지기로 배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졸들이니 삼 공자님이 이해해 주시지요.”
하지만 문지기들은 위혁천을 알아봤음에도 여전히 강한 마기를 풍겨댔고.
“뭐 이런 정신 나간….”
“그리고 삼 공자님 옆에 있는 저분은 누구십니까. 신원이 증명되지 않는 한 흑문을 통과시킬 수는 없습니다.”
방금 위혁천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한 문지기 수장으로 보이는 놈이 운조를 향해 눈을 흘겼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흑문에서부터 이렇게 발목이 잡히는 건 드문 일인데.’
운조가 묵묵히 그들의 태도를 지켜보며, 그들이 눈빛에 담긴 경계와 의심을 느끼던 그때.
“감히 내 손님에게 이렇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다라…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위혁천은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문지기 놈들이 내 손님을 의심한다는 것은 곧 나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잊은 게냐?”
하지만 서늘함이 가득 풍기는 위혁천의 말에도 문지기들은 누구 하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들은 여전히 엄격한 표정으로 위혁천을 쳐다보았다.
“삼 공자님, 저희도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육 공자님께서 신신당부하신 일이니,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육 공자? 어째 문지기 놈들 상태가 등신 같더니만.”
육 공자라는 말에 위혁천이 즉시 혀를 찼다.
육 공자는 10가문의 공자들 중 위혁천과 가장 상성이 맞지 않는 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 욕을 하신다고 해도 흑문에 출입하는 자의 신원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면 이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삼 공자님의 손님이 어느 가문 출신인지, 신교의 출입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을 해주십시오.”
“아무리 육 공자 그 등신 같은 놈이라도 흑문 문지기에게 이딴 권한을 줄 수는 없을 텐데?”
“말조심하십시오. 삼 공자님.”
“이야. 문지기 주제에, 이러다 나 치겠다?”
문지기장은 손에 든 창대에 회오리치듯 타고 흐르는 마기를 흘러내며 미간을 좁혔다.
“십만대산을 향해 다가오는 강시들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흑문의 검문을 강화하라 하셨습니다. 게다가 신교의 안위를 위해 검문을 강화하는 건 육 공자님의 권한이 맞습니다.”
“육 공자 놈에게 그딴 권한이 있으면 내게도 그에 걸맞은 권한이 있다는 걸 모르나?”
“받은 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위혁천은 지속되는 문지기들의 고압적인 태도에 실소를 머금으며 운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교가 늘 이렇지요. 명령을 지키는 데 있어서 만큼은 철저한 이들이니 말입니다.”
운조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교의 내부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변수가 벌어질 것이라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위혁천은 다시 문지기들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 새끼들아. 나 삼 공자야.”
어느새 그의 손엔 명풍도가 들려 있었다.
“열기 싫으면 말아라, 이 새끼들아. 내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위혁천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명풍도(鳴風刀)가 번쩍 빛을 발하며 허공을 가르며 솟구쳤다.
* * *
위혁천의 무기 명풍도(鳴風刀)는 단순히 외형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을 가진 도검이다.

그 길이는 일반적인 도보다 길지만 얇고 유연하게 설계되어 있어 무게에 비해 다루기 쉽다.

“삼 공자가 온다! 준비해!”

도신은 매끄럽게 반짝이는 검은색으로 마치 밤하늘의 어둠을 담아낸 듯한 신비로운 광택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명풍도의 진정한 위력은 그 표면의 독특한 구멍에서 비롯된다.

“쯧,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이제 님 자도 안 붙이네.”

도신에는 엄지손톱 굵기의 큰 구멍 다섯 개와 그보다 작은 새끼손톱 굵기의 작은 구멍 일곱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