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Page
광의녹로 6권
지은이 : 원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원, 2025
※ ISBN : 979-11-7408-451-4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8월 22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6권
이보셔들, 내가 뭐랬어? 걱정 하덜 말랬지?
같은 식의 웃음을 내짓는 황보백랑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고.
딱!
“아…. 지금 뭔…?”
내 마음을 대변한 것인가.
나도 모르게 뻗어낸 일장이 황보백랑의 뒤통수를 강타하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녀석은 이내 잔뜩 찌푸린 얼굴이 되었다.
“지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요! 소협이 지금 나를 친 것이오?”
“아, 미안하게 됐다. 제 아비를 적진에 두고 왔으면서도 허허실실 웃는 꼴을 보자니 화가 치밀어서.”
“하. 운조 형님의 친우라고 하여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해도 해도 정도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오! 이제 장난은 됐소. 더 이상 운조 형님이 했던 것처럼 나를 하대하는 행동을 하지 마시오. 다시 한번 예의를 벗어나는 행동을 했다간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오.”
울그락불그락하는 황보백랑의 표정을 보자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석두야, 석두야, 이 돌대가리 새끼야. 어휴, 그래. 이제 소가주다 이거지.’
습관처럼 손이 먼저 나갔으나 이제 주제에 소가주랍시고 눈까지 부라리고 있다.
“뭐, 공대를 하는 게 중요하다면 그러지. 그런데 지금 상황을 운조가 봤다면 일장을 때리는 게 아니라 최소 쌍장을 날렸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소? 아니, 쌍자도 약과지. 바로 몽둥이를 꺼냈을지도.”
“뭐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제 잘못은 모르고 송충이를 붙여둔 것 같은 눈썹만 역팔자로 꺾는 것을 보자니 역시나 우리 석두 놈은 뭐가 문제인지 아직 감조차 잡지 못 한 느낌이다.
“황보세가의 방계 핏줄을 지닌 태산파의 개파조사이자 현 문주가 의술을 좀 한다는 소문이 있긴 했었지. 아마 그런 이유로 가주님을 태산파에 보낸 것일 테고. 내 말이 틀렸소?”
“흥. 의술을 좀 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파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 5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 실력자요.”
사파와 달리 전반적으로 정파의 의원들의 경우엔 제약 없이 실험을 하기가 어렵다.
가문 대대로 정신이 좀 회까닥한 사천당가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정파 의원은 쓰레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그런 쓰레기 더미에서 50번째라.
정말 놀라울 정도의 쓰레기 같은 실력이 분명하다고 전해도 손색이 없을 텐데, 이걸 무슨 향시에 합격이라도 했다는 듯이 자랑스러워하는 저 얼굴을 보자니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소귀에 경 읽기 같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겠소.”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지 모르겠으나, 내 분명히 말했소. 이제 설령 운조 형님의 친우라고 하여도 예의를 벗어나는 언사를 한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말이오.”
멍청한 만큼 우직한 게 바로 황보세가인들이다.
어느 정도로 우직하냐면 그건 놈들의 무공에도 잘 나와 있다.
중원 전체에서 오직 권법만 수련하는 유일한 가문이 바로 황보세가이니까.
여하간 그런 우직한 놈들이니만큼 황보세가 놈들은 제 한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조건 지키는 편이다.
그러니 지금 석두 놈이 한 말처럼 괜히 놈을 더 모욕하는 말을 하지만 않는다면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을 테다.
“그럼 단순명료하게 본론만 말하도록 하지. 병환에 든 황보가주를 태산파에 두고 온 것은 천치도 하지 않을 멍청한 짓이고.”
“내 분명 말하지 않았소! 더 이상 우리 황보세가를 모욕하지 말라고!”
황보백랑은 단장이라도 덤벼들겠는 듯이 언성을 높이며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취했다. 그런 황보백랑을 보자니 이제 웃음도 나지 않는다.
“황보세가를 욕하는 게 아니라 황보백랑 소가주 당신에게 하는 말이오. 지금 제 아비의 정확한 병세도 모르고, 거기다 제갈세가가 태산파를 밀어주고 있는데 아비가 나아지길 바라고 있다니. 물 떠 놓고 달님께 비는 머저리와 다를 게 뭐가 있다는 거지.”
“이 작자가!”
“아, 아직 말 안 끝났으니 말은 좀 마저 했으면 좋겠는데.”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황보백랑이 곧장 권법을 날리려는 듯이 주먹에 가득 힘을 주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여유로울 수 있었다.
황보세가는 고리타분한 정파의 전형 그 자체.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한들 기수식(起手式)을 하지 않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으니까.
“진짜 만에 하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정말 진심으로 소가주가 태산파의 장문인이 같은 핏줄이니 가주를 마음 편히 맡길 수 있었다는, 이런 대가리에 꽃만 가득 찬 것 같은 생각만 안 했으면 좋겠소.”
“…….”
아무런 대답 없이 잠시 주춤거리는 걸 보자니 역시는 역시나다.
“이건 진짜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 얼마나 더 쉽게 말해야 할지… 그래, 이 정도로 말하면 되겠군. 그럼 잘 들어보시오.”
대가리에 꽃만 가득 찬 황보백랑의 모습에 다시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돌대가리인 놈의 이해도에 맞춰서.
“자. 여기서부터 시작하겠소. 어느 날 갑자기 황보세가의 가주께서 고뿔 같은 것에 걸리셨소. 금강석을 씹어먹어도 이상하리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 그 황보가주가 말이오. 한데, 그 처음엔 단순히 고뿔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떻게 된 게 기침은 잦아지고 병세는 점점 더 심해져버렸지. 그리고 그때 우리 황보세가의 소가주께 엄청난 생각이 난 거요. 아! 비록 방계이기는 하나 우리 황보세가의 핏줄을 지닌 태산파의 문주가 정파 제일의원 50인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태산파의 문주께 아뢰어야 겠구나 하고 말이오.”
“크흠. 거의 비슷하긴 한데 조금 다르오. 아버님의 병환이 심해졌다는 소식을 먼저 들은 태산파의 문주님께서 먼저 한걸음에 우리 황보세가까지 와주셨으니 말이오.”
“…….”
순간 용암 같은 불덩이를 품속에 하나 더 집어넣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흐린 귀로 놈의 말을 흘렸다. 황보백랑 녀석의 아둔한 말을 들으면 더욱 골이 아파졌으니까.
“여하간 황보가주는 태산파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태산파로 떠난 상황이지. 그런데 이때 황보세가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황보세가가 무림맹에 속하게 된 후로 단 한 번도 오대세가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았는데, 그 자리를 이제 태산파가 대신하겠다는 상황이 되어버렸지.”
이렇게까지 말했으나 황보백랑은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이 우직한 눈빛을 빛내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 이렇게 말했는데도 모르겠다면 시야를 좀 더 넓혀서 황보세가와 태산파뿐만이 아니라 산동성 전역을 두고 생각해보시오. 산동성 전역에는 지금 제갈세가가 양민의 안전을 돕는다는 이유로 이곳저곳에 진법을 깔아 놓고 있다는 말이지.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산동성 전역에 제갈세가의 진법이 깔린 시기는 언제일지 소가주께서 직접 말해보시오.”
“그건…….”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황보백랑이 미간을 잔뜩 좁히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을 태산파로 옮기고 얼마 안 있고부터였소.”
황보백랑의 말에 내가 대답 대신 옅은 조소를 건네자 녀석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목청을 높였다.
“하, 하지만 그 시기에 진법을 제갈세가에서 진법을 펼치기 시작한 건 산동성을 위해서였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결코 아니오.”
“그게 또 무슨 개… 아니, 말해보시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과연 이번엔 또 어떤 신박한 개소리가 황보백랑의 입에서 나올지를 기대하는 그때.
“다른 지역과 달리 우리 산동 지역에 자리를 잡은 문파나 세가는 우리 황보세가 하나뿐이었소. 비교적 최근에 태산파가 생기고 제갈세가에서도 많은 인원이 이주해 왔으나 여전히 다른 성에 비해 산동 지역은 정파인들의 수가 적다는 뜻이오.”
황보백랑은 마음을 정리하듯이 깊게 들이마신 숨을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지역보다 사파놈들이나 도적들이 활개치지 못하는 건 바로 내 아버지이자 황보세가의 가주이신 권왕이 계시기 때문일 테요.”
권(拳)을 쓰는 중원 전체의 무인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무인, 그게 바로 골골거리며 기침 하면서 쓰러졌다고 하는 황보세가의 가주다.
“솔직히 말해 다른 성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산동지역 내에서만큼은 권왕의 위엄이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었소. 그렇기에 실제로 다른 지역보다 도적이나 사파 놈들이 함부로 얼씬거리지 못한 것도 있고 말이오. 그 정도로 가주님께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산동성의 상징이셨소.”
황보백랑은 제 아비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 가주님께서 병환에 걸렸다는 소문이 한 번 돌자마자 대체 어디서 온 건지 구더기 같은 도적 놈들이 산동성에 들끓기 시작했소. 내가 직접 보면서도 놀라운 일이었지.”
“그래서 제갈세가에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권왕을 제갈세가의 진법으로 대체하기로?”
툭 내뱉은 말에 동의하듯 황보백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소. 비록 가주님께서 멀쩡하셨을 때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제갈세가의 진법이 산동 전역에 점점 넓게 설치된 후로는 도적들의 수가 확 줄어들었소. 그러니 가주님의 병환 후에 제갈세가의 진법이 이곳저곳에 설치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오.”
“…….”
누가 돈을 먹였거나 칼을 들고 협박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생각하지는 못할 테다.
솔직히 말해 단지 같은 정파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이 정도의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고.
“그럼 직접 가 보십시다.”
“가다니. 어디를 말이오?”
이 돌대가리 놈과 굳이 입씨름을 더 할 필요 없이 직접 가기로 했다.
“태산파에 직접 가보자는 말이오. 말했다시피 나도 의술을 꽤 하는지라 병환 중이신 황보가주님의 상태를 보자면 태산파 문주가 정말 제대로 치료를 하고 있었는지, 혹은누구는 보지 못한 모략이 뒤에 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소.”
“흠. 그야 어렵지 않소. 안 그래도 나도 슬슬 가주님을 한 번 뵐 참이긴 했으니 말이오.”
그 말을 뒤로하고 우린 곧장 태산파가 있는 태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볼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내 아버지를 아들인 내가 뵙겠다는데?”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하지만 지금은 가주님께 안정이 필요한 중요한 상황인지라 다음에 와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산파에 도착했을 때, 아들인 황보백랑이 태산파의 문지방도 넘지 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아버님께서 편찮으시다니, 걱정이 많이 되는군. 문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렇다면 언제쯤 다시 오면 되겠느냐?”
‘…석두야, 석두야, 이 돌대가리 놈아.’
황보백랑이 그걸 듣고 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나는 앞으로 슬쩍 나섰다.
“문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최소 보름 이상은…”
“거기, 문지기. 잠시만.”
“이쪽은 누구신지?”
“아, 이쪽은 의원인…”
“마룡아.”
푹!
황보백랑의 설명이 더 이어지기 전에 마룡이가 문지기의 몸통을 뚫었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오!”
경악하는 표정의 황보백랑을 바라보며 나는 나른한 미소로 화답했다.
“답답한 건 질색인지라. 그럼 들어가십시다.”
* * *
“이런 미친 작자가!”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에도 황보백랑은 몸에 구멍이 뚫려 피를 줄줄 흘리는 문지기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고는 지혈이라도 해보려는지 샘물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손으로 틀어막다가, 이내 그게 불가능한 상황인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으면…”
“등신 같은 소릴 하는군.”
살기가 가득 깃든 황보백랑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나는 놈의 말을 잘라먹었다. 더 이상 놈의 멍청한 소리를 듣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심한 고뿔처럼 연신 기침을 하는 정체 모를 병에 걸린 것도 이상한데, 차도가 더욱 나빠진 상황이라고 듣지 않았나?”
“그게 지금 아무 죄 없는 문지기를 죽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오!”
“등신보다도 못 한 머저리 놈이었군.”
“이 자가 감히!”
“황보백랑 소가주!! 황보세가의 가주가! 당신의 아비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 얼마나 위중한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 지금 아들인 당신이 아비를 보지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된다는 소린가!”
자세를 취하고 곧장 권을 날리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황보백랑을 보며 나는 잔뜩 목소리를 높였다.
“그걸 듣고도 다음에 언제 다시 오면 되겠냐고 묻는 천하의 등신 같은 아들 놈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그깟 체면 때문에 네 아비를 살피지도 않겠다는 거냐?”
거칠게 쏟아낸 말에 황보백랑은 몸을 움찔거렸고 나는 한층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을 계속 이었다.
“소가주. 나는 소가주의 아둔한 머리를 설득할 자신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소.”
“…….”
“나는 당신이 아닌 당신 아비가 걱정되어 가려는 거요. 하지만 아들 놈이 제 아비가 죽든 살든 신경 쓰지 않겠다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건 없겠지.”
나는 당혹감이 가득 깃든 황보백랑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 정하시오. 무력을 써서라도 아비의 건강을 확인하러 나를 따라갈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대로 태산을 내려갈지. 시간 없으니 이 자리에서 바로 정하시오.”
“…….”
시간이 없다고 미리 못을 박았음에도 뜸을 들이는 황보백랑의 모습에 그냥 황보세가 따위 어찌 되든지 이대로 태산을 벗어나 훌쩍 떠나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던 그때.
“가긴 어딜 가.”
황보백랑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태산파의 무인을 살해한 당신이 이대로 하산하게 둘 순 없는 노릇이지.”
등신 같은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