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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녹로 5권
지은이 : 원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원, 2025
※ ISBN : 979-11-7408-450-7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8월 22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5권
“…음? 우리도 바쁘다고? 왜? 뭐 때문에?”
나른한 미소를 짓는 운조.
저 미소 뒤에는 늘 좋지 않은 일이 생겼었다.
“다른 산채의 녹림도들이 산채 앞길을 넓히는 도로 정비 작업을 하는 동안, 너희는 이미 완성된 산채에 가서 조언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되묻는 쾌묘는 불안한 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고, 운조는 재차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쾌묘, 넌 남장, 흥산, 당양현에 있는 산채로, 짝눈은 형문, 응성, 안륙현에 있는 산채로, 짝귀는 대오, 홍안, 라전 현에 있는 산채로 간다.”
“엥? 우리가 직접 말이오?”
운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너희 각자가 직접 옆에서 관찰하며 주의사항을 지적해줘야 한다.”
그런 운조의 말을 가만히 듣던 짝눈이 물었다.
“음. 하지만 그런 정보는 각 산채에 전서조를 통해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고작 주의사항 때문에 저희가 직접 가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진심이냐?”
짝눈의 말에 운조는 피식 웃었고.
“아.”
짝눈과 다른 두 사람도 뒤늦게 운조가 왜 그런 방법을 택한 건지 깨달았다.
“만약 전서조만 보내서 연락을 취한다고 치자. 그리하면 정말 다른 산채의 산적들이 저대로 말을 듣기나 할 것 같냐? 지침을 눈앞에서 읽고도 바로 잊어버리는 놈들이 수두룩할 테다.”
“애초에 글자를 모르는 산적 놈들이 태반일 테지 말입니다.”
“그래, 그런 놈들이 딸랑 전서 한 장 보냈다고 우리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겠냐 이 말이다.”
“흠, 그렇긴 하겠소. 종이에 적힌 대로 순순히 따르는 산적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래. 우리의 지침을 산채에 전달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너희가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것이 중요한 거다.”
운조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산적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녹림의 모든 산채가 변할 차례다. 이제 녹림은 칼이 아닌 괭이를 들 거다. 그러니 각자 산행을 하면서 느낀 주의사항부터 정리하도록 해라.”
“알겠소. 음? 근데 큰형은 또 어디 가시오? 이제 막 왔으면서?”
최대의 사파 조직 사패련.
사파의 무림맹으로 불리던 그 단체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하오문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녹림만으로는 안 된다.
“설득해야 할 놈이 있다.”
“설득이요?”
“다녀와서 말해주마. 주의사항이나 준비하고 있어라. 아예 팻말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도 좋고.”
그렇기에 그를 설득해야만 한다.
* * *
운조에게 산채의 개조는 그 첫걸음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제 운조의 눈은 녹림을 넘어 다른 세력과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있는 게 장강수로채의 용왕.
그리고…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거냐. 오, 암비야. 오랜만이구나. 하하, 그래, 운조 녀석이 그래도 갈기 손질은 해주는 편인 모양이구나. 여전히 곱다, 고와.”
혈풍사를 이끄는 대장이었으며.
대막(大漠)의 아들이자 사풍(沙風)의 전사.
이제는 운조와 함께 구방표국(九方標局)의 공동 표국주로 이름을 날리는 테물렌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다른 마적들 그리고 사막의 마물들과 싸워왔던 그들이었기에 전신에 가득한 흉터를 가릴 수는 없었으나, 표국 생활을 해가며 그들의 얼굴엔 어느새 살기가 빠져 있었다.
평생 꿈꾸던 소박한 삶을 살게 된 구방표국의 전직 마적… 아니, 이제 표사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리는 그들은 함께 표국을 하자는 제안을 해준 운조를 은인처럼 여겼다.
“…뭐? 지금 그걸 제안이라고 하는 거냐?”
하지만 지금 운조가 건넨 새로운 제안에는 아무리 운조를 좋게 보는 테물렌이라도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 구방표국에 우리 녹림도 함께했으면 한다.”
“…….”
운조의 제안은 다름 아닌 구방표국에 녹림도들도 함께 표사로 참여했으면 한다는 거였고, 그건 테물렌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반대다. 녹림도들이 표행에 참여한다니…. 녹림은 우리가 산길을 지나갈 때 길을 터주는 역할인 걸로 이야기가 끝났던 것 아니었나?”
“하지만…”
“아직.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다.”
테물렌은 운조의 말이 시작되기 전에 곧장 끊어냈다.
“나는 진심으로 네게 고맙게 생각한다. 운조 네 덕분에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지. 아우들도 몸에서 나는 피 냄새가 옅어진 것 같다는 농을 할 정도니 말이다.”
테물렌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녹림도들을 구방표국의 표사들로 들인다면 솔직히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을까 두렵다. 운조 너는 이미 너희와 같이 일하면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지만 우리 구방표국의 표사들이 신뢰하는 건 녹림도, 쾌묘채도 아닌 오직 너 하나뿐이다.”
“…….”
테물렌은 운조를 신뢰했지만 그 신뢰는 운조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녹림이나 다른 산적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테물렌은 그들이 표행 일에 개입할 경우, 중간에 표물을 훔치거나 제대로 된 배송을 하지 않아 구방표국의 명성에 타격을 입힐 것을 우려했다.
“운조, 너는 나의, 그리고 내 형제들의 신뢰를 얻었다. 심지어 혈타마의 신뢰도 얻었지. 하지만 나는 녹림이나 다른 산적들을 믿을 수가 없다.”
“…….”
“이번에 네가 녹림왕의 후계자가 되었다지. 솔직히 말해… 네가 녹림소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너의 신뢰마저 흔들리게 한다. 아무리 하오문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네가 녹림에서 권력을 얻은 후에 바로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솔직히 말해 너의 기반을 넓히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신뢰도 잃게 되었다라….”
읊조리는 듯한 운조의 말에 테물렌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게 사실이야. 솔직히 말해 아우들이 이 제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충격이 덜하지는 않을 테다.”
이런저런 말이 오갔지만 결국 압도적인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테물렌 네가 힘을 써주면 안 되나? 혈풍사는 대장의 의견에 반대 안 하잖아.”
운조의 말에 테물렌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 말하지 않았나. 나도 지금 널 믿기 어려워지려 한다고. 그리고 나는 내가 믿지 않는 것, 내가 신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우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렇게 강한 불신을 보인다면…. 차라리 네게 더 깊은 신뢰를 주는 게 좋겠군.”
“언젠가는 너한테 밝히려 하긴 했는데… 이렇게 말하게 되는군.”
“……?”
느닷없이 운조가 나른한 미소를 짓자 테물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덩달아 미소 짓게 되었다.
“대막의 아들이자 사풍의 전사 테물렌.”
“뭐냐, 갑자기. 어디서 그런 말은…”
“나다. 너의 몇 없는 벗 조운.”
“뭐?”
테물렌의 고집을 논리로 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한시가 바쁜 상황에서 언제까지 그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에 운조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 거였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내가 처음부터 혈타마를 탄 것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나는 조운의 몸에서 환생한 거다.”
“…….”
애초에 대막에서 태어난 자도 아닌 평범한 중원인이 혈타마를 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조운이라고 밝힌 운조의 말을 들은 테물렌의 머리는 이성보다 분노가 앞섰다.
“근래 들어 개방의 거지 놈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말이 있더니. 어디서 내 뒷조사를 한 거냐.”
“허, 진정 이게 뒷조사로 될 일이라고 생각…”
“어디서 감히 내 벗의 이름을 가지고 농락을 해!”
운조는 테물렌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에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했다.
실 같은 눈이 번뜩 뜨인 것을 보자면 정말 제대로 눈이 돌아간 상황.
“녀석. 눈 돌아가면 눈 커지는 것도 그대로면서.”
“운조!!! 네놈은 선을 넘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7살 때였나? 네게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의 나이 말이다. 상대는 아마 옆집 게르에 살던 누이였지? 그리고 네가 그 게르에…”
“그만! 그마안!”
테물렌이 몹시 당황하며 운조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러고는 희번덕해진 눈으로 되물었다.
“네, 네놈… 대체 그런 사실을 어디서 들은 거냐?”
“그날 네가 꿈에서 분명…”
“자, 잠깐! 잠깐!”
운조가 덤덤히 말을 이어나가려 하자 테물렌이 마른침을 삼키며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운조를 쳐다보았다.
왜냐면 운조가 말하는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치부.
그건 오직 운조와 자신 둘만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혈타마유로 만든 술을 진탕 마시다 취해서 실수로 말했던… 그리고 말한 후에 평생을 후회했던 그 이야기였다.
‘말도 안 돼. 아우들한테도 말한 적 없는 그 이야기를 어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건 오직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네가, 네가 정말 조운이야?”
테물렌이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고, 운조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반갑다 내 친우여.”
* * *
“…허. 정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외공밖에 모르던 시커멓던 놈이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몸에 들어가 있다니.”
“언젠가 말하긴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다.”
덤덤히 건네는 운조의 말에 테물렌은 뒤늦게 피식 웃었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비록 얼굴이 바뀌었어도 네놈의 그 나른한 눈빛이나 말투는 같은데. 정말 생각도 못 했군. 어쩐지 혈타마를 타는 중원인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말이다.”
“그래, 그래도 재미있는 것도 많이 봤다. 지난번에 그랬지? 내가 죽어서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크흠. 사내가 울기는 무슨. 눈물 한 방울 나고 끝났다.”
괜히 민망해하는 테물렌의 말에 운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해후는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아까 하던 이야기부터 하고 싶은데. 내가 누군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신뢰의 문제는 해결된 것 같아서 말이야.”
“뭐, 그야 그렇지. 그렇긴 한데… 흐음. 아무리 그래도 형제들한테 막무가내로 이해를 강요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어서 말이야. 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괜한 강요로 괜히 신뢰를 잃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 말을 하다가 잠시 운조를 바라본 테물렌은 피식 웃으면서 운조의 등을 퍽퍽 쳤다. 마치 옛날에 하듯이.
“크크, 이제 몸이 비리비리해서 예전처럼 치면 부러지겠군. 여하간 그런 울상 짓는 표정은 하지 말라고 아우들의 신뢰를 얻을 다른 방법이 떠올라서 그런 거니까.”
“다른 방법?”
* * *
“…? 너 설마?”
초승달처럼 휜 테물렌의 눈빛을 보며 운조는 기겁했고.
“맞아. 네가 조운이면 간만에 한 따까리 해야지. 왜. 오랜만에 하려니까 벌써 겁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