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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녹로 4권
지은이 : 원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원, 2025
※ ISBN : 979-11-7408-443-9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8월 22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4권
남궁비창과의 비무는 이미 끝났다.
“크허억! 보, 보지마앗!”
하지만 그에 따른 후폭풍은 이제 시작이었다.
“허… 아니, 무인이라는 자가 어찌?”
강호의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며, 비무대 위에서 꿈틀거리는 남궁비창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지금까지의 어떤 비무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기에.
“쯧쯧. 아무리 그래도 좀 참지. 비무대 위에서 저러는 건 살다살다 처음 보는구만.”
“크흠. 남궁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소.”
관중석 한구석에서 터져 나온 탄식은 이 상황이 얼마나 황당한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비웃었고, 또 다른 이는 남궁가의 명예를 걱정하며 한탄했다.
마냥 웃어넘기기엔 점점 누런 황색으로 물들어 가는 남궁비창의 옷이 충격적이었기에.
“이제 승패는 난 것 같은데?”
내겐 나름 재미있는 광경이었으나, 혐오스러운 냄새를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코를 막은 채 비무의 결과를 서둘러 달라고 요청했고 심사를 맡은 자소궁의 궁주 청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이번 비무의 승자는… 녹림 소속 운조다.”
승패를 가르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환호성이나 박수 따위는 없었다.
오직 비무대를 둘러싼 지독한 냄새와 압도적인 침묵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만독불침도 냄새는 어찌 못 하겠군.’
소경단의 효능도 이제 거의 끝날 때가 다 됐다.
이 더러운 냄새를 맡으며 진통환을 빨고 싶지는 않았기에 빠르게 비무대를 내려가려던 그때.
“멈춰라.”
갑자기 들려온 낮고 스산한 목소리가 모든 것을 멈춰 세웠다.
스산하면서도 뇌리를 우레처럼 파고드는 듯한 음성과 함께 건장한 중년인이 비무대 위로 뛰어들었고.
쩌저적-
그의 발걸음이 비무대 위에 당도하자, 그가 선 주위로 거미줄이 처지듯 실금이 가며 바닥이 갈라졌다.
그의 등장은 비무대 위에 싸늘한 긴장감을 끼얹었다.
비무대 위에 우뚝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허락 없이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한다.”
순간 지독한 냄새를 잊게 할 정도로 살벌함이 가득 깃든 목소리였다.
그가 풍기는 위압감은 단지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6척이 넘는 장신, 바람결에 흩날리는 빽빽한 수염, 누군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서슬 퍼런 눈빛은.
그는 외모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자신의 불명예를 온몸으로 느끼던 남궁비창은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려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남궁비창의 눈빛에는 기대와 두려움이라는 양가감정이 혼재되어 보였다.
“아… 아버지.”
그 감정의 원인이자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
잔뜩 떨리는 목소리의 남궁비창을 내려다보는 사내는 현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이었다.
‘꼬였군. 남궁천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내가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천이 이곳에 없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두었기 때문이었다.
남궁천은 천하오절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검의 깨달음과 무위로는 천하제일이라고 불리는 사내.
만인은 경의를 담아 그를 검제, 혹은 검에 미쳤다 하여 광검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검에만 미쳐 사는 그가 용봉지회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상정 외였다.
일단 뭐가 되었든 광검제라고 불리는 자에게 걸려서 좋을 것은 없기에 슬쩍 비무대를 내려가려던 그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 허락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스산함이 가득 담긴 남궁천의 음성이 나를 불러 세웠다.
“…….”
남궁천의 등장은 비무대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살기가 가득 깃든 남궁천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바로 나였다.
저벅-
남궁천이 한 발을 내딛자 주위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다.
저벅-
“내 아들이 비무를 한다고 하여 왔는데, 온갖 치욕을 안겨주었더군. 내 딸아이까지 걸고 넘어지면서까지 말이다.”
그가 또다시 한 발을 더 내딛자 숨조차 쉬는 게 힘들 정도의 무거운 살기가 엄습했다.
“들으면서도 몇 번이나 비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 네 놈을 갈가리 찢어 놓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벅-
“그러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네놈이 한 말에 대해서.”
발걸음을 멈춘 남궁천의 싸늘한 시선이 내게 향했고.
“책임?”
숨을 쉬기 힘든 압박 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아들 놈이 왜 이상한가 했더니만, 가정 교육이 잘못되었던 건가?”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남궁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고, 남궁천의 얼굴에는 싸늘한 살기만 가득했다.
“놈.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로구나.”
저벅-
주위의 공기를 짓누르는 남궁천의 무거운 발걸음이 한 발 더 내게 향했다.
“그런 말을 뱉어놓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아니, 솔직히 두렵다.
저릿저릿한 살기만 하더라도 당장 날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니 말이다. 하지만.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순 없겠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리 남궁천이 광검제라고 불린다고 해도 그 역시 명분 없이는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명문 정파다.
게다가 비무대 동서남북에 자리한 말코도사들 역시 상황에 따라 개입하려는지 서로 눈치를 보는 게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지금이라도 목숨 보전을 위해 다음 수를 써야 하겠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라…. 내가 한 말 중에 잘못된 게 단 하나도 없는데, 내가 겁먹어야 할 이유가 있소? 게다가 믿는 구석도 있고.”
“이놈. 정파인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대체 무엇을 믿고 그런 말을 하는지 어디 한 번…”
우뚝.
내가 믿고 있는 그것.
구름 위로 검 하나가 우뚝 솟은 문양이 새겨진 패를 품에서 꺼내 건넸다.
“…그걸 왜 네 놈이?”
남궁천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 어리는 게 보이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무공 수련에만 매진하고 매사에 딱히 관심을 갖지 않던 남궁가주가 내게 자신의 딸인 남궁향아를 구해주어 고맙다며 건넨 보은패.
분명 당가에서 감사의 표식으로 보은패를 줬다고 하니 명분 좋아하는 정파답게 딱히 확인하고 할 것도 없이 보은패를 줘버린 것이겠지.
‘그게 사파 손에 들어가리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사납게 미간을 찌푸린 남궁천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향아가 보은패를 줬다는 자가 사파… 그것도 산적 놈이었을 줄이야. 한데, 제대로 착각하는 모양이로군.”
파즈즉-
순간 믿기 어려운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마치 낙뢰가 친 듯한 뇌기(雷氣)가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게 또렷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섬뜩한 뇌기를 흘러내리며 남궁천의 말은 이어졌다.
“보은패가 있다고 해서 네놈 하나 죽이지 못하리라 생각한 게냐?”
나는 고개를 옅게 가로저으며 그에게 보은패를 툭 던졌다.
“당연히 아니겠지. 그러니 지금 사용하겠소.”
“…?”
내가 건넨 보은패를 받아 든 남궁천이 얼굴을 사납게 찌푸리는 와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보은패로 쓸 내용은 이거요. 내가 무당산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멀쩡히 숨이 붙어 나갈 수 있도록 지켜주시오. 물론, 그게 남궁세가에서 가능한 수준이라면.”
“지금. 남궁세가의 보은패를…”
“하, 보은패라더니. 설마 그 정도도 힘든 거였소?”
“…이놈.”
“보은패라길래 꽤나 쓸모가 있을 줄 알았더니만. 여하간 그 정도도 힘들다면 최소 무당산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남궁세가의 사람들로부터만 습격을 받지 않게 해주시오.”
남궁천이 이를 으드득 가는 것을 보며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잠을 잘 때도 복면을 쓰고 습격을 하러 오는데, 이제 낮에는 비무뿐만이 아니라 가주까지 상대해야 하고. 솔직히 남궁세가의 공격만 받지 않아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드는데.”
내 입에서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말이 계속 이어지자 비무대 주위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보은패라니? 남궁가주가 사파한테 보은패를 줬다는 말이야?”
“그보다 지금 저렇게 말하는 것 보게. 가주 앞에서도 저리 말하는 걸 보면 저자가 말하는 게 다 사실이 아닌가?”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남궁세가는 정파의 기둥 중 하나 아닌가? 그런 곳에서 비열하게 밤에 습격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지.”
티눈만 한 의심은 삽시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과격한 성정의 남궁천이라고 하더라도 명분을 의심받는 상황이 온다면 함부로 하기 힘들겠지.
“향아. 이리 오거라.”
남궁천은 지금 이 상황을 확인하려했는지 비무대 위에서 남궁향아를 불렀다.
용봉지회의 진행은 신경 쓰지도 않고 멋대로 하는 안하무인의 행동.
하지만 용봉지회 진행을 맡은 자소궁주 청무도 남궁천의 눈이 이미 잔뜩 돌아간 걸 보았는지 그의 행동에 토를 달지 못했다.
“부르셨나요, 가주님.”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말해 줄 남궁향아가 비무대 앞으로 올라왔다.
남궁가주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남궁향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은패를 저놈에게 준 것 그리고 저놈의 정체를 내게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여럿이다.”
“…….”
“하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했으면 한다. 그러니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해야 할 것이다.”
“…네. 가주님.”
조심스러움이 가득 담긴 남궁향아의 말에 남궁천은 재차 매서운 안광을 쏘아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