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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녹로 3권
지은이 : 원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원, 2025
※ ISBN : 979-11-7408-440-8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8월 22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3권
비무가 끝나자마자 녹림왕이 내게 다가온 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애초에 녹림왕의 관심을 끄는 것이 원래 목표였으니까.
그리고 원래 내가 먼저 꺼내려 했던 스승님과의 관계에 관해 먼저 질문해 온 것도 나쁘지 않다.
스승님의 ‘녹림으로 가라’는 말씀의 의문이 풀릴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녹림왕의 전음에 짙은 살기가 담겨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문제 상황임이 분명했다.
?저는…
덥석-
내 대답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녹림왕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거칠게 멱살이 움켜쥐어진 직후 내 시야에 들어온 건 개미처럼 작아진 녹림도들의 모습이었다.
‘이런 미친?’
눈 깜빡할 새도 지나지 않은 그 찰나의 순간.
푸화아악-!
나는 녹림왕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하늘로 내던져진 것이었다.
사람이 원래 이렇게 던져질 수가 있는 존재였던가?
녹림왕의 가공할 만한 완력에, 내 신형은 계속해서 녹림산 중심부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신경 쓰던 건 착지였다. 하지만 이는 더 이상 고민이 되지 않았다.
쿵쿵쿵-
저 멀리서 집채만 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거대한 덩어리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녹림왕이 처음 등장했을 때 타고 왔던 그 곰이 분명했다.
쿵쿵쿵-
전력으로 내달리면서 계속해서 나를 힐끗거리는 거대한 흑곰.
이름이 천릉이라고 했던가?
아까 비무대 주위에서 웅성거리던 산적들 말로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영물과도 같은 곰으로, 모든 동물의 왕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천릉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힐끗거리는 것을 보자면 내가 지면에 맞닿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등에 태우려는 것이리라.
“크워어어엉!”
하늘 높이 붕 떴던 내 몸이 시시각각 지면 아래를 향하는 것을 보며 천릉은 더욱 빠르게 내가 추락하려는 지점을 향해 몸을 날렸고.
윤기가 흐르는 천릉의 등에 착지하기 위해 양팔과 다리를 넓게 펼쳐 속도를 늦추던 그 순간.
벌떡-
‘뭐?’
천릉이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거대한 앞발을 곧장 내게 휘둘렀다.
그렇다.
천릉은 나를 태우려던 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죽이려던 거였나?’
쒜애애액-!
갈고리 같은 날카롭고 뾰족한 천릉의 거대한 앞발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을 내며 쏘아졌지만.
화륵-
천릉의 앞발이 몸에 닿기 전, 급히 반구(半球)의 형태로 염주권야를 둘렀다.
“큽.”
만류초염공의 염화를 몸 주변에 방벽처럼 둘러, 천릉의 앞발을 막는 것은 성공했으나.
그 일격에 튕겨 지면에 처박히는 충격까지는 상쇄하지 못했다.
주위의 지형을 살필 새도 없이 천릉이 거칠게 포효하며 내가 튕긴 방향으로 돌진했고, 나도 더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명 선공은 양보했다.’
치지직-
불꽃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내 오른손 손가락 끝에 형성된 인화비전의 활시위를 당기던 그때.
‘젠장.’
덥석 하고 목덜미가 잡히는 기시감.
우악스러운 손길에 또다시 내 멱살이 붙잡혔고.
파라락-
가공할 만한 완력에 의해 내 몸은 종잇장처럼 그의 손아귀에 잡힌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분명 물었을 텐데. 의선하고 무슨 관계인지!”
“아니, 대답을…”
할 시간 따윈 이번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과광-!
우악스러운 그의 손에서 던져진 나는 못 해도 나무 스무 그루는 박살 내며 처박혔으니까.
“끄으….”
옅은 신음 소리를 내며 풀숲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어느새 근처에서 그르렁대는 천릉.
그런 천릉의 등에 좌정한 채 박살 난 나무 그루터기 속에 처박힌 나를 노려보는 녹림왕의 모습이 보였다.
팔장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던 녹림왕은 마치 불덩이를 옮겨다 놓은 듯한 적갈색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제부터 네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만에 한 치라도 거짓이 있다면….”
“큭.”
“이곳이 네놈의 묫자리가 될 테다.”
사방에서 짓누르는 짙은 살기에 마치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한 기분이다.
‘이… 이 미친 영감이.’
내가 천하오절을 직접 마주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천하오절이 쏘아내는 살기를 이토록 길게 받게 된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 몸에 관해서, 내 몸에 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지금 같은 살기에 조금이라도 더 노출된다면 나는 대화는커녕 버티지조차 못하리란 사실을.
“스승… 스승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기력을 쥐어 짜내 바들거리는 손으로 품에서 그걸 꺼내 보였다.
핏물이 터져 나오도록 입술을 짓씹은 나는 간신히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그것을, 내가 한땀 한땀 깎아 만들어드렸던 비루한 목검을 보였고, 녹림왕은 그제야 살기를 거두며 물었다.
“네놈. 의선의 제자라는 게냐?”
당장이라도 살기를 뿜어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눈빛.
마치 나를 고깃덩이 보듯 하는 녹림왕의 눈빛을 감내하며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몇 번이나 연습했던 그 말을 드디어 입 밖에 꺼냈다.
“의선 연일로(連一怒)의 유일한 제자 조운이 인사드립니다.”
* * *
스승님께선 자신의 본명을 밝힌 건 이 중원 전체에 열 명이 넘지 않는다고 하셨다.
스승님과 녹림왕이 어떤 관계였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스승님께선 녹림왕을 찾으라고 하셨다.
그건 스승님과 녹림왕의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긴밀하다는 것일 터였기에 나는 스승님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게 되었다.
스승님의 부고를 전해 받은 이야기.
내게 돌아온 스승님의 목검과 나의 죽음.
조운이 아닌 운조라는 육신으로의 환생.
계속되는 시한부의 삶.
그리고 녹림왕을 찾으라고 했던 스승님의 사념이 전한 말.
이 모든 이야기를 순서대로 전하자 어느덧 파랗던 하늘은 어두컴컴해졌다.
“음…. 그러니까 운조라는 네 놈이 원래 의선의 제자인 조운이라는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흠. 어째 의선과 같은 보법을 쓰는 놈이 있어서 의아하더니만, 직접 듣고서도 믿기지가 않는군. 다른 자의 육신에 영혼이 옮겨지다니.”
그리고 내 말을 모두 전해 들은 녹림왕은 여전히 천릉의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말했다.
‘조금만 더 의아했으면 아예 죽이고도 남았겠군.’
여태까지는 나의 이야기만 전했다.
“나는 분명 의선과 약조를 했다. 언젠가 자신의 제자가 찾아오면 자신이 남긴 말을 전하라고.”
이제는 내가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하나. 네놈은 분명 내가 들었던 의선의 제자가 아니다. 그리고 의선의 제자가 아닌 이에게 함부로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지.”
여태 이곳까지 내가 얼마나 힘겹게 왔는지, 단지 녹림왕 그와 독대를 하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왔는지 나는 한 줌의 거짓 없이 똑똑히 말했다.
그런데도 이런 태도라니?
“허, 고놈. 싫은 말에 곧장 인상을 쓰는 건 의선과 똑 닮았구나. 정말 의선의 제자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리가 없겠어.”
“제가 그 의선의 제자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흥. 그 나른한 눈빛도 비슷하긴 하구나.”
녹림왕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며 말을 이었다.
“하나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일 뿐. 더군다나 영혼이 옮겨진다거나 하는 건 더욱 믿기 어려운 거지. 의선은 특이한 사술 쓰는 걸 좋아했었다. 참언폭침이니 뭔지 해서 사람의 뇌를 헤집어 놓으며 원하는 답을 듣기도 했지.”
내가 말한 적도 없는 참언폭침에 관해 먼저 알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녹림왕은 분명 스승님과 친분이 있는 자가 분명했다.
“만일 네가 하는 행동이 의선의 참언폭침처럼 어떤 사술을 써서 이 모든 정보를 얻게 된 거라면? 그래도 내가 네놈에게 의선이 남긴 말을 전해야 하겠느냐?”
하지만 어떻게?
대체 스승님과 어떤 관계란 것인가?
“솔직히 내가 보기엔 하나뿐이라던 의선의 제자가 다른 자의 육신으로 깨어났다는 것보다 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그리 말하신다면 더 의심스러운 것은 저입니다. 스승님께선 생전 녹림왕과 관련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녹림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제게만 믿음을 증명하라 하시면 제가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욕설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가까스로 잠재우며 건넨 말에 녹림왕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잠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멍청한 소릴 하는군. 나는 네게 증명해야 할 게 없다. 지금 상황이 아쉬운 것도 내가 아니 네놈이지.”
“…….”
이미 긴 대화를 통해 녹림왕은 내가 스승님의 제자라는 것을 확신했을 테다.
이미 이야기를 전하는 중간부터 그의 눈빛이 바뀐 것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그가 얻는 게 무엇이지?
애초에 전하라고 했으면 전할 말만 전하면 되는 게 아닌가?
머릿속에서 의아함이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져만 가던 그때, 녹림왕이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정녕 의선의 제자라면 그 초식을 알 테다.”
그 초식이라니.
설마?
“그래. 대개 전투의 시작 혹은 마무리에 보이는 그 초식 말이다. 그것을 선보여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