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남자가 탐나는 이유
남의 남자가 탐나는 이유
남의 남자가 탐나는 이유
1.



비서실 복도를 걷는 사람들 대부분은 조용했다. 고요하다는 말보단, 질서 있고 단정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풍경. 말보다 시선으로 업무가 오가는 이곳은, 의외로 사내에서 ‘감정이 들지 않는 공간’ 1순위였다. 민세란에게도 그랬다. 아니, 원래는 그랬다.

그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서도윤. 전략기획본부 팀장이자, 회사 내 여직원들의 조용한 아이돌. 그가 복도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알은척도 안 하면서 눈동자는 따라간다. 웃지도 않고, 인사도 딱 교과서처럼만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인기인지 세란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해가 되어 버렸다.

사람이란 게, 정중한 거절과 무관심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타고나면, 그 자체가 ‘유혹’이 된다. 마치 자신만이 그 껍데기를 깰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준다. 세란은 그 착각을 아주 잘 아는 여자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레이더에 도윤이 들어왔다.

“민 비서님, 다음 주 화요일 11시에 서 팀장님 일정 들어왔어요. 본부장 회의 끝나고 바로 접견입니다.”

옆자리 선배 비서가 속삭이듯 말했다. 세란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만 까딱 들었다.

“응, 확인했어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태연한 척. 속으론 이미 그 이름 두 글자가 몇 번이나 맴돌았다.
도윤. 서도윤.
‘서’라는 성씨는 왜 이렇게 매정하고 직선적인 뉘앙스를 풍길까. 도윤이라는 이름도 문제였다. 단단하면서도 결이 곱고, 어디 부러질 것 같지 않은 이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미 민세란은 첫 번째 단추를 끼운 것이다.



그날 오후, 회의실 앞.

도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쳐야 했고, 세란은 걸음을 늦췄다. 의도적인 속도 조절이었다. 계단을 오르며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입술을 눌러 가볍게 윤기를 더했다. 과하지 않게, 신경 쓴 듯 안 쓴 듯.

그런데 그 순간, 서도윤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정확히 말해, 눈이 마주쳤다.

세란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안녕하세요.”

늘 그렇듯 짧고 건조한 대답. 그런데 눈빛은 오래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 1초가 넘었을까. 세란은 감각적으로 알았다. 그 시선은 형식이 아니었다. ‘본다’라는 건 형식일 수 있지만, ‘읽는다’라는 건 감정이다.

이 남자, 나를 읽으려 하고 있다.



며칠 뒤, 사무실 안에서 서도윤을 다시 마주쳤다. 회의 자료를 전달하러 그의 자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런데 손이 이상했다. 그의 손이 세란이 건네준 서류를 받는 순간, 조금 느리게 움켜쥐었다.

아주 느릿하게, 마치 서류 너머에 있는 손등 온도를 읽는 듯이.

세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자료입니다. 수정 사항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다음 날, 도윤이 그녀에게 별안간 메일을 보냈다. 제목은 ‘질문 하나’.

민 비서님,
전략 회의 내용 중 보고 순서 변경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1:1로 조율 가능한지요?

서도윤 드림.

1:1이라니, 이메일로 이런 요청을?



세란은 그날 오후, 회의실에서 단둘이 도윤과 마주 앉았다. 문은 닫혔고, 안엔 오직 둘뿐. 대화는 업무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이내 그 방향을 잃었다.

“사내에선… 조심해야겠죠.”

도윤이 불쑥 말했다.

“무엇을요?”

세란은 물었다.

“모든 감정이요.”

도윤의 시선은 벽 너머를 바라보듯 멀었다.

“하물며, 그게 실수든, 착각이든 애초에 생기지 않는 게 맞을 겁니다.”

그의 말에 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 그의 커피잔 근처에 손을 댔다. 아슬하게 겹치지 않는 거리.

그가 그녀를 봤다.

“근데 그 감정, 생기면 어떡하죠?”

세란이 입을 열었다.

“없던 척하면 되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잘하시겠네요. 그런 거.”

“민 비서님은요?”

“전, 그런 거 잘 못 해요.”



그날 밤, 사내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오늘 본부 회의 끝나고 비서실 누구랑 누구 단둘이 있는 거 봤다.

요즘 분위기 좀 수상하지 않냐?

익명의 글은 빠르게 삭제됐지만, 그 짧은 흔적이 풍기는 냄새는 꽤 오래갔다.

그날 밤, 민세란은 거울을 봤다. 립스틱은 반쯤 지워져 있었고, 블라우스 칼라는 여전히 단정했다. 그런데도 뭔가 허물어진 느낌이 들었다.

“없던 척, 잘 못 한다고?”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뱉은 건 오랜만이었다. 민세란은 늘 ‘지워진 척’은 잘해도, ‘없던 척’은 하지 못했다. 욕망을 인정하는 쪽이지, 억지로 덮는 쪽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자꾸 서도윤이 눈에 밟히는 게 짜증 났다.

그는 자기가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은 사람이다. 회사에서의 지위, 가정, 도덕, 체면. 이런 것들을 가진 남자는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민세란은 그런 남자들에게 끌렸다. 무너지기 전까진 굳건한 사람, 무너졌을 때만 진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

그게 그녀가 원하는 ‘남의 남자’였다.



다음 날 아침,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윤이 비서실 문을 열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그러나 눈빛은 달랐다. 뭔가… 머뭇거리는 느낌.

“민 비서님, 오늘 오전 회의 자료 중, 이 부분 숫자 다시 확인해 주시겠어요?”

“아, 이 부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