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마음을 두드릴 때
사랑이 마음을 두드릴 때
사랑이 마음을 두드릴 때
1장



아침 뉴스의 연예가 소식 꼭지에서는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가 활기찬 리포터의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화면 속, 행복한 미소로 결혼 소식을 알리는 유명 배우의 얼굴이 잠시 비치고 그 아래로 자막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서현은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낮췄다.

거실 창 너머로 쏟아지던 햇살이 소파를 지나 벽시계 위로 닿았다. 시계의 초침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거실은 더 깊은 정적에 잠겼다.

서현은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살짝 내려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결혼반지의 흔적을 오른손으로 천천히 쓸어보았다. 더는 어떤 의미도 남아 있지 않은 자리였다.

서랍 속 서류 한 장과 맞바꾼 지난 시간은, 마치 지우다 만 얼룩처럼 아직 그녀의 손끝에 묻어 있었다. 서현은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가볍게 문지르며 일어났다.

“도대체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걸 왜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하는 걸까.”

현관 앞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대답은 없었다. 서현은 곧 현관문을 열고 출근길을 서둘렀다.

같은 시각, 서울의 한 방송국 회의실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기획서의 표지에는 굵은 글씨로 ‘우리 선생님은 연예인’
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PD 정민규의 손가락이 그 위에서 의미 없이 둥글게 움직였다.

“촬영지는 솔담시 연풍면 솔바람 초등학교 맞지? 확실한 거야?”

민규가 잠시 불안한 눈빛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물었다.
조연출은 분주하게 자료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윤 씨가 원래 이런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장도윤 쪽이랑 얘기는 확실하게 끝난 거야? 그 친구 빠지면 이번 회차 자체가 흔들리잖아.”

조연출의 확신을 담은 대답에 정민규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단순한 예능이 아니잖아. ‘유명인이 실제 초등학교 교생으로 한 달간 생활하며 아이들과 진짜 교감하는 이야기‘라는 게 핵심이니까. 도윤 씨 연기는 믿지만, 아이들이랑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야.”
“도윤 씨, 아이들하고도 잘 지내요. 지난 시사회 때도 아역 배우들이랑 자연스럽게 어울리더라고요. 게다가 솔바람 초는 전교생이 60명 정도라 규모도 적당하고요. 이번에 그 학교에서 젊은 담임 선생님이 멘토로 도와주시기로 해서 더 안정적일 겁니다.”

솔바람 초등학교의 작은 교무실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퍼지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잠시 모인 회의 자리, 평소라면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며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을 교사들이 오늘따라 떠들썩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교감이 가볍게 손뼉을 쳐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다들 소문 들어서 알고 있죠? 모두 알다시피, 이번 수요일부터 ‘우리 선생님은 연예인‘ 촬영을 우리 학교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순간 교무실이 다시 웅성거렸다. 막내 교사 김성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연예인이 교생으로 오는 프로그램 맞죠? 우리 학교에는 누가 오는 건가요?”
“배우 장도윤 씨라고 하던데? 그 친구 제법 유명하잖아. 다들 알죠?”
“우와, 장도윤? 장도윤은 원래 예능에 잘 안 나오지 않나?”

교감의 말에 젊은 교사들 사이로 작은 탄성이 퍼졌다. 서현은 그 소란스러움에서 한 걸음 비켜나, 창가의 선인장을 손끝으로 무심히 만지작거렸다. 작은 가시가 손끝에 닿자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그녀는 금세 손을 거두었다.

“촬영은 어느 반에서 진행되나요?”

밝은 목소리로 묻는 박진희의 질문에 교감은 조심스레 말했다.

“의논 없이 정해서 미안하지만, 교장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이 선생 반으로 정했어. 아무래도 교생으로 오는 그 장도윤 씨랑 나이도 제일 가깝고, 제일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교감은 서현을 바라보며 미안한 듯 웃었다. 서현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진희가 그녀의 팔을 가볍게 쿡 찔렀다.

“서현 쌤 완전 좋겠다. 부럽다, 나도 같이 찍으면 안 될까요?

서현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지만, 억지 미소 뒤로 속이 싸하게 아려왔다. 어렵게 지켜낸 평온한 생활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와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그때, 교무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서현의 반인 5학년 1반 학생 주원이었다.

“선생님, 체육관 공으로 놀아도 될까요?”

서현은 열쇠함에서 익숙한 동작으로 열쇠를 꺼냈다.

“그래, 주원아, 점심시간에는 공 가지고 놀아도 괜찮아. 대신 놀 때 조심하고, 끝나면 꼭 제자리에 정리하고.”
“네! 서현 쌤 최고예요! 아, 참. 쌤, 어제 제가 드린 그림 봤어요? 진짜 열심히 그렸는데….”

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응, 정말 잘 그렸더라. 선생님 모니터 옆에 붙여 놨어. 네가 그린 바다 그림 덕분에 선생님 자리가 더 시원해졌어.”

서현의 칭찬에 주원이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아이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강당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희가 서현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서현 쌤은 평소엔 되게 무뚝뚝한 것 같은데, 아이들한테는 다정하단 말이야. 장도윤 씨도 아마 이번 기회에 서현 쌤한테 많이 배울걸?”

퇴근 후, 여느 때처럼 텅 빈 집이 서현을 맞았다. 적막감을 견디기 어려워 습관적으로 켜 놓은 TV에서는 한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배우 장도윤이 상대 배우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사랑은…. 가끔 우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요. 내가 당신을 만난 것처럼….”

도윤의 목소리가 화면을 넘어 공간을 채웠다. 연기력이 좋다고 유명한 배우답게 그의 연기는 진짜 같았다. 눈빛은 순수한 감정으로 가득해 보였고, 목소리는 진심을 담은 듯했다.

‘정말 좋은 배우구나.’

숟가락을 들고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현은, 울리는 진동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휴대폰 화면엔 동생 서윤의 이름이 떠올랐다.

“언니, 엄마한테 들었어! 솔바람 초에 장도윤 온다며?”
“응. 하필이면 우리 반이 촬영 대상이래.”

서윤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진짜 괜찮겠어? 언니, 이제 TV에 나오는 거잖아.”

서현은 짧은 숨을 뱉으며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너머 붉은 노을이 조금씩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별일 있겠어. 그냥 조용히 있다가, 지나가야지.”
“무슨 소리야, 언니가 같이 나오는 거야. 그 프로그램, 한 달 동안 장동윤이 교생 생활 직접 해보는 거라며? 그동안 언니가 같이 수업하고 도와주는 거고. 완전 리얼이야. 시청률도 장난 아닐걸?”

서현은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 달.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평소처럼 행동하는 일도, 유명 배우와 나란히 교실을 지키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언니, 혹시 아직도 그때…. 생각하는 거야?”

서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서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굳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그 시간.

“아니야. 그냥…. 카메라가 부담스러울 뿐이야.”

전화를 끊은 후 서현은 서둘러 저녁 식사 자리를 정리했다. 이미 입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현은 따끈한 루이보스티 한 잔을 만들고는 천천히 베란다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 바람에 커튼 끝을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부터 가슴이 답답할 때 해소하기 위한 습관이었다. 바람과 함께 들어온 변화의 기척이 평온한 일상 사이로 스며드는 듯했다.

불안한 마음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지금 고민의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 변화가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심스레 서현의 마음속에 자리를 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솔바람 초등학교는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 봄볕을 머금은 햇살이 내리쬐는 교실 창가마다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기다리던 방송국 차량이 교문을 통과해 운동장에 멈추자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피어올랐다.

아이들의 기대는 교실 문턱을 넘어 복도에 서 있는 교사들에게까지 번져 있었다. 교사들은 괜히 손에 들린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아무 관심 없는 듯 굴었지만, 이미 그들의 시선 또한 운동장 한구석에 멈춰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장도윤은 그런 시선들이 익숙한 듯 모자를 푹 눌러쓰고,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방송국 차량 뒤로 늘어선 스태프들이 급히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는 발걸음 하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 여유로운 걸음걸이 때문일까, 긴 다리와 훤칠한 키가 더 눈에 띄었다. 바람에 잠시 뒤집힌 모자 아래 드러난 그의 이목구비는 TV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갸름한 얼굴, 길고 깊지만 결코 날카롭지 않은 눈매, 단단한 턱선과 짙은 눈썹을 가진 그 남자는 존재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야, 진짜 왔어! 장도윤이다!”

아이들의 속삭임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배어 있었다.
복도에 서 있던 진희는 교무수첩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성현을 보며 속삭였다.

“우리 학교에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곁에 서 있던 성현이 농담처럼 맞장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