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연모하니 (합본)
내가 너를 연모하니 (합본)
내가 너를 연모하니 (합본)





1권
내가 너를 연모하니 (합본)
01.



사시사철 따뜻한 나라 춘화국에도 겨울은 온다. 몇 번의 반란과 끊임없는 독살로 제 명을 다 산 황제가 손에 꼽는 이 나라의 황제 이원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 명을 유지하며 춘화국을 간신히 이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불안한 정세를 보며 조롱하기도 하며,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사당패들을 중심으로.

“쌓이지도 않을 눈은 왜 내리고 난리야.”

작게 읊조리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정월은 바쁜 손으로 악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당패의 단장으로 보이는 사람의 명령에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한가운데 정월이 정리를 대충 마치고 들어가는 것을 단장인 천둥이 불렀다.

“야, 정월아.”
“아, 왜요. 추워 죽겠는데….”
“그….”
“……?”
“…미안하다고….”

정월은 천둥의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보다 더한 잡일을 시켜도 그동안 미안하다는 소리 한 번 않던 천둥이 이상해서였다.

“어디… 아파요…?”
“아, 아니! 아프긴 뭘 아프냐. 그냥 내가 단장이라고 너 데려오고 고생만 시킨 것 같아서 그렇지. 하하….”
“뭐래 갑자기. 단장님 전 단장님께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긋지긋한 노비 생활 벗어나게 해주셨잖아요?”
“…이, 이런 생활보다 낫지 않았냐. 우린 맨날 정착도 못 하고 떠돌아다니는데….”
“아니요. 전 제 의사에 상관없이 저를 사고파는 그 행위 자체가 더 싫었어요. 아무튼 전 감사해요!”

정월이 활짝 웃자 천둥의 표정이 더욱 굳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정월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술을 마셨나 보다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놀이에 쓸 도구나 정리하고 잠들 생각이었다.

“…뭐지…?”

도구를 정리하던 정월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밖은 아직 사당패 식구들로 왁자지껄한데 유독 자신의 방만 정적이 흐르는 것 같았다. 늘 북적이며 같이 자던 다른 식구들도 이상하게 자신의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단장님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래도 뭔가 정월은 단장님의 말이 싫지 않았다.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쓸모가 증명된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정월은 다른 식구들이 들어올 것을 생각해 구석 한편에 자리를 펴고 먼저 누웠다.

그리고,

“…하! 천둥이 개새ㄲ…!”

자신의 얼굴을 면포로 가리는 누군가에 의해 눈을 뜬 정월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지만 이내 묻히고 말았다.


***


“…퉤!”

짐짝처럼 취급되며 얼마나 달렸을까. 정월은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싶었지만 두 손이 꽁꽁 묶여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솜뭉치를 뱉고 나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천둥이 자신을 팔았다는 것.

“닮았군.”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귀한 자리에 귀하신 분으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월은 당장이라도 그 면상에 침을 뱉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정월이라고?”
“설명부터 해주시죠. 제가 갑자기 잡혀 와서.”
“허…! 천것 주제에 말버릇이… 쯧.”
“천것이니까 말버릇이 이렇지 않겠습니까.”

정월에 목 앞으로 서늘한 칼이 빛났다.

“하명하십시오, 대감.”

정월의 옆에 있는 남자는 당장이라도 정월의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굴었다. 정월은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 같았으나, 어차피 이제 돌아갈 곳도 없는 마당에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되었다. 힘들게 찾았는데 그럴 순 없지.”

정월은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무언가 정월에게 목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으나,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정월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그래, 소향이 왔느냐.”

대감이라는 사람이 다정하게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그리고 정월은 자신과 비슷하다 못해 똑 닮은 소향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향도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아버님… 저자가….”
“소향이 너는 오늘은 일찍 들어가거라. 아비가 설명할 테니.”

소향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피했다. 언뜻 정월과 소향의 눈이 마주쳤으나 소향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이만 풀어 주고 안으로 들이거라. 어차피 도망갈 생각도 못 할 테니.”

대감의 말이 맞았다. 정월은 너무 놀라 도망갈 의욕조차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정월의 몸이 휘날렸다. 안으로 들어간 정월은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대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꼬라지를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팔려 온 모냥이지?”

대감의 정확한 판단에 정월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분하지만 맞는 사실이었다. 사당패 모두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정월에게 귀띔을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컥했지만 눈물을 삼키기 위해 정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말이다. 네가 우리 소향이 대신 후궁이 되어야겠다.”
“예…?”

대감의 말에 정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정월의 머리로는 다시 집노비가 되거나 아니면… 더 끔찍한 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그, 아씨를 따라 몸종이 되란 말씀이신 거죠…?”
“쯧. 못 배워서 그런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소향이 ‘대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대신 들어가느냐 말입니까.”
“왜? 못하겠느냐? 못하면 널 대체할 사람은 많다.”

대감의 서슬 퍼런 눈빛이 빛났다. 정월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다시금 실감하게 된 것이었다.

“못하면요…?”
“네년 하나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가족도, 친구도, 집도 아무것도 없는 너 말이다. 아니다. 죽는 것보다는 어디 하나 불구가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발가락을 다 잘라 버려 팔아먹기도 쉽게.”

정월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밑바닥부터 굴러온 정월이라도 자신의 목숨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원 말이다…. 아주 여우 같은 놈을 앉혀 놨지, 우리가.”

황제의 이름…! 정월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치를 봤다.

“하하! 겁먹은 게냐? 사당패에서는 곧잘 하지 않았냐. 황제를 흉내 내며 말이다.”
“그, 그거야… 저희는 직접적으로 그… 이름을 내뱉지는 않으니까요.”
“그래, 네가 말해 보거라. 너는 어떻게 그 황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라 생각하느냐?”
“그, 글쎄요. 명이 길어서…?”
“아니지. 잔대가리를 잘 써서이지.”

춘화국이 몇 번의 반란으로 인해 정세가 불안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미련한 황제가 후궁한테 마음을 뺏겨 목숨을 잃은 이야기도 있으며, 몇몇 황제는 이유 모를 죽음으로 단명하고 매번 새로운 황제를 찾아 앉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황제를 찾아 앉히는 게 바로 정월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인 것도. 정월도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나 왜인지 모르는 척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에겐 어려운 얘기인 것 같습니다….”
“황제가 말이다. 머리를 잘 썼어. 궁 안에 있는 모든 신하들과 사돈을 맺을 모냥인가 보구나.”

대감의 말에 정월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황제가 여색에 취해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것도 무능한 황제의 유흥거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당패에서도 그렇게 조롱했고.

“그렇게라도 인질로 잡아 놓겠다는 속셈이겠지… 쯧.”

대감은 언짢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월은 머리를 굴렸다. 신하들과 사돈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목숨을 구걸하는 황제. 한편으론 불쌍하고 한편으론 비겁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