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연모하니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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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황제 폐하, 그리고 귀인마마를 뵙습니다.”

김판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이원은 대궐 같은 그의 집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백성의 혈세로 지어진 집을.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 이리 환영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춘화국에서 저희 집만큼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김판근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정월은 그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우리 귀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듣고 싶고 여러모로 대감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여기에 머물자고 하였네.”
“그러셨군요, 폐하. 그럼 제가 술상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정월도 같이 따라가야 하나 싶어 이원을 쳐다봤으나, 이원이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쉬고 있으라 했다. 아마, 오늘은 같은 방을 써야겠지…. 하며 정월이 혼자 부끄러운 생각을 했다. 이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런 정월을 보며 씨익 웃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황궁의 음식에 비하면 조촐하오나….”

김판근이 먼저 이원에게 술을 따르며 말을 꺼냈다. 이원은 그런 김판근을 보며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득이 될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미 대감께서 더 잘 알겠지만… 내가 귀인을 참 많이 아끼네.”
“하하.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워낙 대감께서 훌륭한 것을 알았으나, 이리 자식 교육까지 훌륭하다니… 귀인을 나에게 보내주어 정말 고맙네.”
“폐하, 황송하옵니다.”

서로 간을 보는 듯 의미 없는 말만 주고받고 있었다. 김판근은 이원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알 길이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원이었다.

“최무겸과 황후의 세력이… 황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원의 말에 김판근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판근은 그제야 이원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무겸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조금 더 나아간 생각일 수도 있으나 이는 어쩌면 정월이 황후까지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최무겸을 비롯한 자들이 이 나라를 야금야금 삼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최무겸을 비롯한 자’에는 물론 김판근도 포함이었다. 이원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은, 아마 김판근이 어떻게 나올지 보기 위해서였다. 김판근도 그 의도를 알아채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에서 황제의 편에 붙느냐, 아니면 오랜 친우의 편의 붙느냐였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대신들이 더욱 잘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 뱃속 불리기에만 급급하고 말입니다….”

김판근이 애매모호한 대답을 유지하였다. 이원은 그런 김판근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 누구도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있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말인데, 신진을 새로 등용할까 하네. 아주 공정하게.”
“그… 하나… 이미 대신들은 충분하오나….”
“하하. 자리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최무겸의 주변을 보면 부정을 저지른 이가 한둘이 아니겠지. 그들을 정리하면 자리가 꽤 될 걸세.”

김판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부정을 저지른 이에는 자신도 포함이 아니었던가. 갑자기 황제가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마 정월 때문이겠지. 김판근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를 황제가 자신에게 꺼낸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 속내까지는 아직 간파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대신들의 속속들이 사정까지는 모르지 않나. 자네가 직접 황실의 청렴을 위해 조사를 하고 숙청을 해준다면…. 어떠하겠느냐?”
“아… 하하…. 감히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김판근의 머릿속이 정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최무겸의 반대편에 서서 황제의 편에서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기고만장하던 최무겸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나, 황제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는 법. 그리고 이 관계가 정월로 인해 유지된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흠…. 난 자네가 딱 적임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최무겸의 세력을 조금 약화시켜 놔야 우리 귀인도 품계를 올려 줄 것이고…. 하하,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왔구만. 이해해 주게. 사랑에 빠지면 뭐든 해주고 싶지 않은가.”
“아주 보기 좋으십니다, 폐하. 하하하.”

김판근이 웃으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정월의 품계가 어디까지 올라갈지는 모르나 지금 상황이라면 귀비까지도 가능해 보였다. 예로부터 황후를 이긴 귀비는 많았다. 만약, 그런 정월의 몸에서 황자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폐하, 제가 술 한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판근을 보며 이원이 씨익 하고 웃었다. 김판근이 자신의 편에 서겠다는 의도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이 술잔을 부딪쳤다.

“비록…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나, 주신 명을 열심히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판근이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이원의 입장에서는 김판근의 세력이 계속해서 커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정월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월의 안전을 책임지는 또 하나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


“하하, 술기운이 오르는군…. 잠시….”

둘이 얼마나 술잔을 기울였을까. 이원도 김판근도 알딸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이제 한배를 탄 사이나 마찬가지여서인지, 긴장을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폐하, 제가 안내를… 어이쿠.”
“하하, 되었네.”

방을 나가려는 이원을 잡으려던 김판근이 술기운에 취해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원이 그런 김판근을 보며 저지했다. 김판근은 불안했으나, 괜찮겠지 싶었다. 어차피 소향은 저 구석 방에 숨겨 두었다.

“으…. 취하는군….”

이원도 김판근과의 술자리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더욱 무리를 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원이 비틀거리며 김판근의 저택 사이를 걸었다. 조금이라도 술을 깨고 다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어…? 귀인…!”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정월의 뒷모습이 보인 이원은 비틀비틀 걸으며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아…!”

가녀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김소향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쩔 줄 몰라 이도 저도 못하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이원이 소향을 돌려 세워 눈을 마주쳤다. 이원은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으나, 새벽 달빛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귀인, 아니 소향아…. 새벽인데 왜 자지 않고 이리 나와 있느냐. 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아… 그것이….”

김소향은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들킨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여 약간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김소향은 온종일 방 안에만 박혀 있었다. 지금은 이미 깊은 새벽이 되어 잠시 숨을 돌리고자 나온 것이었는데, 바로 이렇게 만나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푸흣…. 친정에 와서 그런 것이냐…. 오늘따라 조용하구나….”

그렇게 말하며 이원이 김소향의 볼을 쓰다듬었다. 소향은 다정한 이원의 손길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김소향이 생각하던 황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폐하! 여기 계셨습니까! 김판근 대감께서 찾으시는데….”
“아…, 금방 가지.”

마침 적절하게 하인이 이원을 찾으러 왔다. 하인은 놀란 얼굴을 하며 이원과 김소향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먼저 들어가 있거라…. 나도 금방 따라갈 테니…. 자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원은 김소향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김소향은 그 말에 더욱 고개를 숙였다. 이원은 평소와 달리 부끄러워할 줄도 안다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픽,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폐하, 길이라도 잃으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느냐. 잠시 귀인을 만나 이야기를 하느라 늦었네.”
“귀인… 마마요…?”

김판근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바라봤다. 하인이 김판근이 우려하는 일이 맞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판근은 이원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모르는 듯싶었다.

“제가 두 분이 이리 각별하신데…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군요.”
“흠…. 그래도 오늘 이렇게 귀인이 자라 온 집도 보고 아주 좋았네. 다음엔 정말 귀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러 오지.”

이원의 말에 김판근은 확신을 얻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판근의 뒤에는 이제 황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럼 귀인마마가 계시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이원이 웃으며 김판근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짧은 시간에도 앞으로를 위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그렇게 향한 곳에 방문을 여니 정월은 이미 곤히 잠들어 있었다. 늦은 밤이라는 이유도 있었으나, 오랜만에 황궁 밖의 외출이 고되었던 것이었다.

“먼저 자지 말라 하였거늘….”
“으음…. 폐하…?”

이원의 인기척에 정월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원이 그런 정월의 치마폭에 웃으며 누었다. 정월을 보니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며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원이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도… 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으면서… 왜 말해 주지 않는 것이냐….”

이원의 말에 정월이 놀란 얼굴을 지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가 나는 것이었구나…. 라며 조용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