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새 출발(2)


여느 때와 다름없던 평온한 아침, 평소처럼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이젠 상처도 거의 아물고 멍도 대부분 사라져서 씻은 뒤에 반창고를 붙이거나 붕대를 감지 않아도 됐다. 그게 새삼 어찌나 편하게 느껴지는지.

‘비비안도 이별 후에 나름 잘 지내는 것 같고, 레너드 쪽에서도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잘 사는 모양이야.’

매일 아침 사는 조간신문에는 간간이 레너드가 운영하는 회사 쪽의 희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그가 발명한 내연 기관을 이용한 자동차의 시제품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머지않아 제품이 출시될 예정이며, 이 획기적인 발명으로 인해 앞으로 도로에서 마차는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등등.
덕분에 두 사람이 만나지 않는다는 소식은 이에 묻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도 점차 스러져 갔다. 그 점을 비비안은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충격! 왕국 제2왕자 더스틴, 열애 시작?

그 둘의 이별을 묻히게 한 또 다른 소식이 있었다.
바로 내가 설계한 대로, 더스틴의 가짜 열애설이 뜬 것이었다.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는 내 말대로 숙제들을 성실히 이행해 나갔고, 마침내 그가 해낸 행적들이 하나둘씩 모여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어제 아침엔 결국 더스틴의 열애에 관한 특집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그의 숨겨진 연인에 관해서 여러 추측들까지 가득 담겨서 말이었다.

‘역시, 그 후보 중에 비비안도 있네.’

언론들은 더스틴의 연인이 누구인지 아주 논리적으로 추론하며 후보들을 추려 놓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된 인물이 바로 비비안이었다. 최근 사교계에서 모습을 잘 드러내질 않고, 주변인들과 인연을 하나둘씩 정리하는 모습이 자신과 왕자의 연애를 들키지 않으려 하는 것 아니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한 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레너드와의 이별 후 회복을 위해서였고, 주변인들을 정리하는 건 단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인연들을 이제야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난 비비안이 더스틴과 엮이게 된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런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내 쪽에서 먼저 움직여서라도 두 사람을 엮는 소문을 내려 했으니 말이다.

‘전에 레너드에게 썼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지. 서로를 엮어서 더욱 서로가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 말야.’

레너드와 달리 더스틴은 상당히 주변 시선에 예민한 타입.
게다가 아직은 연애할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그와 비비안을 쉽게 엮이게 할 순 없었다.
하나 만약 수많은 사람들이 더스틴을 그녀와 엮게 된다면? 심지어 잘 어울린다는 평가마저 하게 된다면?
아마 더스틴으로선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 주변에 넘치는 예쁘고 멋진 영애들도 성에 차지 않는 그인데, 자신과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는 여자라면 꽤 솔깃하지 않겠는가?

‘어제는 이 기사로 한바탕 난리가 났을 터이니 오늘 신문도 상당히 기대가 되는걸. 과연 무슨 소식들이 적혀 있을까?’

얇은 외투를 챙겨 입은 나는 언제나처럼 간단한 요깃거리와 신문을 사러 밖으로 나섰다.
시모어 가를 나온 이후부터 날이 가면 갈수록 따뜻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선선했던 봄도 이젠 끝나고 여름이 찾아올 모양이었다.
이쪽 세계의 여름은 어떨까? 장마 같은 건 있을지, 날은 얼마나 더울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신문을 사면서 가게 주인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봐야겠다. 주인아주머니와 말을 트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꿀 정보들을 많이 얻었으니, 아마도 유의미한 지식들을 많이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주머니!”
“아, 어서 와요. 아가씨! 자, 오늘도 샌드위치랑 신문 이렇게 두 가지죠?”
“네! 참, 오늘은 커피 한 잔도 마시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가게 앞에는 손님들이 가볍게 간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갈 수 있도록 간이 바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신문을 읽거나 주인아주머니와 대화하는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나도 오늘은 그중 한 사람이 되어 그녀와 소소하게 수다를 떨 작정이었다.

‘흐음, 커피가 나올 동안 신문부터 먼저 읽어 볼까?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야 말이지.’

잘 접혀 있는 신문을 펼쳐 일단 1면에 있는 기사부터 읽어 보았다.
역시나, 가장 앞에 있는 기사는 어제 터졌던 더스틴의 열애설에 관한 후속 기사였다. 다만 역시 더스틴의 그녀에 대해서는 꼬리조차 잡지 못했는지 어제와 비슷한 내용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걸 보아 더 이상 더스틴에게 다가올 용감한 사람은 없을 것으로 전망됐다.
기사에 적혀 있는 여론들의 반응은 그의 연인을 질투하고 나쁜 말들을 하기보다는, 대부분 더스틴의 사랑을 응원하고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그가 드디어 사랑에 빠졌다. 세간의 부담스러운 관심을 피하고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그의 연인은 과연 누굴까? (중략) 그의 주변인들은 드디어 왕자가 방황을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것이라며 응원하고 축하하는 분위기이다. 왕국의 새로운 안주인이 조만간 나타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좋았어. 이젠 그사이에 비비안과 더스틴을 잘 엮어 주기만 하면 돼.
그제야 긴장을 푼 나는 혹여나 레너드의 소식이 없을지 뒤의 기사들을 훑어보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수많은 기사들 사이에 자그마한 토막 기사 하나가 문득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과, 그에 반해 익숙지 않은 내용들… 눈으로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자 나도 모르게 기사를 입으로 따라 읽고 말았다.

“클레이튼 아이브스 백작, 사기 횡령죄로 치안국 구치소에 수감… 작위 박탈 위기?”

그제야 기사의 뜻을 이해한 나는 입을 틀어막고 신문을 내동댕이쳤다.
아버지가 구치소에 끌려갔다. 사기와 횡령을 했다는 죄목으로.
게다가 이번엔 백작으로서의 작위도 박탈될지도 모른다니, 대체 왜 그런 일에 휘말린 거지?
빚은 전부 갚았으니 악착같이 돈을 벌 필요는 없었는데? 혹시 빚쟁이들이 없는 빚을 만들어 독촉했나? 그게 아니라면 혹시…

‘버릇을 못 고치고 또 범죄에 손을 댄 건가?’

아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아직 확실하게 아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백작 부인은 만나 본 적 있어도 백작은 얼굴조차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몇 가지 사실만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작은 내 아버지니까 말이다.

“어어, 아가씨! 커피 나왔는데 어디 가요?”

먹던 샌드위치도 내팽개치고 신문을 챙겨 무작정 치안국으로 뛰쳐나갔다.
부디 이 모든 일이 단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길,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랐다. 이제야 찾은 내 평온한 일상을 갑자기 잃지 않기를 바랐다.
얼굴도 모르는 가족 때문에, 실상 내 부모도 아닌 사람 때문에 또다시 빚더미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제발, 차라리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거라면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진짜 그럴 의도로 한 게 아니길…!’

멀지 않던 곳에 위치해 있던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치안국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앞에 서 보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걸까? 만나게 된다면 그에겐 뭐라고 물어보지?
가뜩이나 마음도 심란한데 치안국 건물에서 느껴지는 삭막한 분위기에 더더욱 두려움이 앞섰다.

‘하아, 좀 무섭네. 경찰서 안에 들어가 보는 건 난생처음인데.’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잔뜩 굳은 채로 치안국에 출입하고 있었고, 끌려가던 도중에 되레 고함을 지르는 몇몇 인간들도 보였다.
저 막막한 곳을 혼자 들어가야 한다니. 막연한 공포감에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서 들려왔다.
그렇지만 무섭다고 이 중요한 사태에서 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눈 딱 감고 용기를 내어 치안국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고 있는데,

“에일린! 내 아가!”
“…어머니?”

놀랍게도 동시에 백작 부인이 내 이름을 부르며 눈앞에 나타났다.
백작이 이렇게 된 건 어찌 알고 타이밍 좋게 나타난 것일까? 어쩐지 의심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의아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잽싸게 손을 잡고 날 건물 뒤편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벗어나고 말았다.

“잠깐만요, 어머니. 어딜 가시는 거예요? 아버지를 뵈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잖아요.”
“넌 지저분한 꼴 볼 필요 없다. 이건 어른들의 문제이니 다 내가 알아서 해결하마.”
“어머니가 어떻게요? 아니, 애초에 병원에서 왜 도망치셨어요? 제가 어머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세요?”

또다시 뭔가 숨기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알아서 해결한다 해 놓고 어디로 갔는지 말도 해 주지 않았을뿐더러, 결국 해결하지 못해 빚쟁이들이 날 찾아와 해코지까지 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책임지지 못할 거였다면 자신을 믿으라고 해선 안 됐다. 내가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빚쟁이들에게 뭣도 모르고 당했다면 얼마나 원망이 컸겠는가?

“어머니는 이 상황에 대해서 어디까지 아세요? 모르신다면 그냥 아버지께 들을 테니 아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얘야, 네가 알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알아 봤자 상처만 받고 어차피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데 왜 굳이 알려고 하는 거니?”
“하, 아무것도 못 하다뇨? 두 분께서 만드신 빚을 제가 전부 갚아 드렸는데 정말 제가 아무런 조치도 못 취할 거라 생각하세요?”
“…뭐? 네가 빚을 다 갚았다고?”

뭐지? 설마 그 사실도 모르고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 못된 빚쟁이들이 어머니에게 여전히 빚을 청구하고 있었던 건가?
피가 싸하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과 함께 가슴 한편에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내가 누리고 있던 평온함이 전부 가짜였다는 사실과 설상가상으로 겹겹이 터진 불행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빚쟁이들에게 돈을 부치고 있었다. 왜 그럼 그자들은 내가 부친 돈을 그냥 받고만 있었던 거지?”

혼란에 빠진 백작 부인은 사색이 되어 제 거친 얼굴을 더듬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더 착잡해진 난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한 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 그러니까. 제가 해 볼 데까진 해 볼 테니까 제발 아는 대로 말해 주세요. 그래야 이렇게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 아녜요.”

번뜩이는 두 눈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떨구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모르는 새 훌쩍 자라 버린 자식을 보고 놀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자식을 위해 한 일들이 전부 자식에게 짐이 되어 버린 걸 느끼고 후회하는 걸까?
무슨 이유가 되었든, 더 이상 내게 숨기는 게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소통이 되질 않으니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손해가 오지 않는가.

“편지를 받았었다. 곧 빚을 한 번에 갚을 수 있는 큰돈을 벌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리고 널 데리고 예전처럼 함께 살자고 말이다.”

마침내 부인은 그동안 주고받았던 백작과의 연락에 대해 이실직고했다.
출처를 말해 주지 않은 큰돈에 대한 언급, 희망찬 미래를 꿈꾸도록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편지.
그건 부인과 내가 마주친 지 불과 이틀 뒤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즉, 백작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던 부인의 말은 사실이었던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