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5
<목차>
16-2.
17.
18.
19.
20.
21.
22-1.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16-2.
“뭐라도 쥐고 있고 싶은 거겠죠. 증거를 무기 삼아 혹시나 하는 상황에 자기만이라도 발을 뺄 수 있게. 협조하는 식으로 자신은 죄를 덜 받는다든지 해서요.”
“와, 진짜 비열하네요.”
사라가 자작의 속셈을 정확하게 짚자, 이 와중에도 저만 살려는 그의 이기적인 심보에 비비안이 감탄했다. 역시 악당은 하나만 하지 않았다.
“왜요, 뭐, 그거라도 가지고 나중에 혼자만 발을 빼려고 그러십니까?”
“자네, 감히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자작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으나 주변 모두가 비슷한 눈빛으로 의심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수가 의심의 눈초리를 담아 저를 책망하듯 보자, 화가 폭발한 자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누구한테……!”
자작의 말의 말에 주변 남자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직전이었다. 누군가 자작의 앞으로 나와 금방이라도 불이 붙으려는 분위기를 단숨에 가라앉혔다. 그 상대는 방금 전까지 한심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사라였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자작이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라를 보며 물었다.
“자작님, 진정하세요.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라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여전히 표정을 풀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태도에 사라가 다시 말했다.
“자작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지금 이렇게 반응하시면 계획이 어그러질 뿐입니다.”
“…….”
“어차피 위에서 꼬리를 자르기로 한 이상, 자작님이나 이분들이나 같은 처지입니다. 처벌을 더 받고, 덜 받고 차이는 있을지언정 공범이란 건 변함이 없지요. 단지 조금 죄를 덜고자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건 현명하지 않은 판단입니다. 저희가 왜 이 소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실을 밝히려고 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자 자작은 자신이 방어적으로 나오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건지 인상을 펴며 슬그머니 뒷짐을 졌다. 그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번에는 사라가 뒤로 돌아 여전히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여러분, 잠시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짜고짜 자신들 앞에 나와 말을 하는 사라를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고작 변변찮은 일이나 하는 주제에?”
제일 앞에서 자작에게 큰 소리를 내던 남자가 사라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사라는 명백히 악의가 덕지덕지 묻은 시선을 받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여러분에 비하면 전 변변찮은 배우 나부랭이죠.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의 처지가 저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뭐? 어디서……!”
“언제나 사회 기득권층으로 대접받고, 대우받았겠죠. 늘 우러러보고 대접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죠. 당장 언제고 경찰이 들이닥쳐 범죄자로 낙인찍혀 조사받을지 모르는 처지 아니십니까?”
허를 찌르는 사라의 말에 차마 반박할 수는 없었는지, 남자가 흠칫하더니 오히려 큰 소리로 뻗댔다.
“어차피 그까짓 거쯤은……!.”
“그까짓 거 충분히 덮을 수 있다구요? 여러분이? 어떻게 하시게요?”
“…….”
“스스로 잘 아실 텐데요. 신분은 귀족이고, 신사라지만 그건 가문의 후광 때문이지 여러분 대다수는 대단한 힘이 없으시다는 걸. 물려받을 작위도, 재산도 없고, 그저 가문의 후광만 얻을 뿐이잖습니까. 반면에 여러분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힘이 있는 분들이죠. 재력과 권력, 권위, 신분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작정하고 여러분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데, 도대체 뭘 하실 수 있는데요?”
연달아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몇몇은 숫제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이 볼품없어졌다.
“그래서 지금 우리를 조롱하려고 굳이 여기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거죠. 당장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직시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다음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니까요.”
사라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대책? ……당장 무슨 대책이 있는데?”
“여러분이 상대하는 사람은 거인이고, 여러분은 개개인은 힘없는 다수일 뿐입니다. 이럴 때 해야 하는 건 단 하나뿐이죠. 뭉치는 겁니다. 하나로 힘을 합쳐서, 다 같이 대응해야 하죠.”
“합쳐?”
“네, 합쳐야죠. 여러분 모두와 여기 앞에 계시는 자작님도 함께 말입니다.”
‘대책’이라던가 ‘힘을 합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이 자작을 언급하자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 사이에 이미 자작은 적처럼 인식된 듯했다.
“힘을 합친다. 그래, 좋지. 좋다고. 그런데 힘을 합치려면, 적어도 같은 편이어야 하지 않나? 자기만 살자고 내빼려는 사람을 우리가 뭘 믿고 같은 편으로 힘을 합치겠나? 자네도 눈이 있으니 봤겠지. 방금 전에 자작님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의 말에 사라가 침착하게 말했다.
“압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그런 생각 하실 수 있다는 거.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자작님이 정말 본인의 안위만 생각하고 발을 빼려 했다면, 애초에 왜 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했겠습니까? 어차피 묻고 가면 그만일 텐데.”
“그건……. 자작님도 우리를 이용하는 게 본인에게 도움이 돼서 그런 거겠지!”
“맞습니다. 자작님이 본인에겐 아무 이득도 없는데 여러분께 선의를 베푼 건 아니지요. 본인에게 이득이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하신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은 달리하면, 자작님도 여러분이 필요하다는 뜻 아닌가요?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제대로 된 작위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없으시지 않나요. 여러분께도 자작님이 필요합니다. 번듯하고 그래도 나름의 힘이 있는 여러분의 대변자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래야 적어도 상대에게 협상할 때 비등해 보일 수 있겠죠.”
사라의 침착하지만 단호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가득 울렸다. 무대에서 노래하며,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답게 사라의 말은 호소력이 있으면서도 귀에 정확하게 꽂혔다. 분노하던 남자들은 하나, 둘씩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자작님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면 자작님이 그만큼 초조하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납치 사건으로 체포된다면, 누가 주동자로서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겠습니까? 바로 자작님일 겁니다. 아무리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중형은 피하기 어렵겠죠. 그러니 더욱 힘을 합쳐야 하는 겁니다. 가장 큰 책임을 질 자작님을 필두로 여럿이서 힘을 합쳐, 본인들 죄를 힘없는 여러분께 덮어씌우려는 사람들을 상대해야죠. 아닙니까?”
최면을 걸듯 단정하고 조곤조곤한 말투에서, 점차 힘을 강하게 실으며 호소하듯 얘기하자 점차 여기저기서 동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노려보며, 패닉에 빠지던 사람들에게 사라는 희망과 투쟁심을 불붙여 주었고 분위기는 빠르게 바뀌었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을 선동한 것이었다.
“그래, 이 상황에서 서로 싸우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되겠지.”
“차라리 우리끼리 뭉쳐서 뭐라도 하는 편이 낫다구.”
“하지만, 이러다가 뒤통수를 맞는 건 아닐지…….”
“우릴 뒤통수 치던 건 따로 있다구. 자작님은 적어도 우리에게 솔직히 말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선동된 남자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며 아직 설득되지 않은 이들의 동조를 유도했다. 그들을 탄압하는 적을 자작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설정한 게 특히 유효했는지 남자들은 어딘가 존재하는 진정한 적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며 참여를 유도했다.
주변의 반응이 점차 비비안과 사라가 계획한 대로 넘어가자 맨 앞에서 자작에게 큰 소리로 맞서던 남자도 기민하게 바뀐 분위기를 파악하더니 주변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좀 함께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사라가 묻자 모인 사람들 중 그나마 목소리가 좀 커 보이는 몇몇이 서로 이야기를 짧게 주고받더니, 맨 앞의 남자 입을 열었다.
“아까는 무례했습니다. 자작님.”
남자가 먼저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이자, 자작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큼큼’거리며 멋쩍다는 듯 저도 말을 건넸다.
“아니네, 나야말로……, 윗사람답지 못했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서로 한 발자국씩 물러나 굽히는 모습에 사라는 조용히 미소를 짓더니 비비안을 향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첫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는 두 번째 작전을 시행할 타이밍이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사라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17.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자작의 지시하에 몇몇 이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한 이들이었다. 나머지는 그 주변에 서서 대화를 들을 뿐이었다.
사라는 작전을 설명하는 참모처럼 테이블 앞에 서서 앉은 이들을 향해 말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증거입니다. 다짜고짜 몰려가서 아무리 얘기해 봤자 그분들은 신경도 안 쓰시겠죠. 그러니 증거가 필요합니다. 사건의 주동자가 사실은 높으신 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요.”
“하지만 우리한텐 증거랄 게 딱히 없는데.”
앉아 있는 남자 몇몇이 이야기하자, 사라가 자작을 향해 물었다.
“자작님. 자작님은 유일하게 그분들이랑 접점이 있으시죠. 혹시 뭐라도 가지고 계신 게 있나요?”
질문을 받은 자작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도 딱히 증거라고 할 만한 건 없네.”
“하지만 자작님은 적어도 그분들이랑 꾸준히 연락하셨잖아요. 아닌가요?”
“그래, 그건 맞아. 시간과 장소도 정하고 연락도 꾸준히 드렸네. 하지만 그 방식이 좀……, 독특했단 말이지.”
“네?”
“편지를 받을 때도 항상 어떤 시종이 직접 나에게 전달했고, 다 읽으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태우도록 했지. 숨길 수 없도록 계속 감시했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시해서 그때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럴 속셈이어서 그랬던 거였군.”
자작이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는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미리 대비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사람까지 보내면서 아주 철저하게. 사라와 비비안이 난감하다는 눈빛을 교환하였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요.’
‘어떻게 하죠?’
“그 시종의 얼굴은 기억하십니까.”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 인상이 워낙 흐릿해서……. 물론 찬찬히 보면 기억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습니까…….”
물론 정 안 되면 그 시종이란 사람을 찾아 자작이 직접 증언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성이 높았다. 게다가 애초에 클로드의 계획은 진짜 증언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럴싸한 증거품을 확보하여 두 집단 사이를 이간질하고 혼란을 일으킨 뒤, 사건의 진짜 주동자인 대공과 그 일당까지 한 번에 잡아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일단 이렇게 하죠. 당장 없는 증거를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선은 있는 척이라도 하죠. 편지든 뭐든 남모르게 빼냈다는 식으로 말을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자작님과 직접 연락한 분은 누구셨습니까?”
“그게……. 어떤 백작이었네. 칼라일 백작이었던가……?”
“칼라일 백작? 그게 누구지?”
“칼라일이면, 저기 북쪽에 영지가 있는 그 백작인가?”
“확실히 영지가 꽤 크다고 듣긴 했는데 말이지.”
“백작이고, 영지도 넓다면야 뭐…….”
자작의 말에 남자들이 저들끼리 중얼거렸다. 그러나 표정이 조금 묘했다. 의심이 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의아스럽다는 뉘앙스였다. 그건 비비안도 마찬가지였다.
‘칼라일 백작?’
분명 들어 보지 않은 이름은 아니었지만, 비비안이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한미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권력 한다고 보기엔 약간 부족한 인물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얼마 안 되는 비밀 모임 중에서도 굳이 그런 사람이 대표로 자작과 연락하고 있었다? 뭔가 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 외의 다른 분들은 더 모르십니까?”
“그야 나는 내가 연락한 사람밖에는 모르지. 기껏해야 나 같은 사람에게 참가자가 누군지 알려 줄 리 없으니까 말이야.”
자작은 결백하다는 듯 말했다. 계획과는 다른 반응에 사라가 잠시 주춤하자 자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내가 아는 건 다 말했으니 이제 자네의 계획을 얘기해 보게.”
“……제 계획은 우선 그겁니다. 지금 이 저택에 비밀스럽게 모인 또 다른 분들이 계시니, 대표로 몇 분을 선발해 여기 있는 분들의 의견을 모아 협상을 하는 겁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이미 모든 진실을 다 알고 있으며, 만약 처벌받게 된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고 말이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뜻이란 건 어떻게 전달하면 좋겠나?”
“협의서를 작성해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모든 참석자분들의 서명을 더하면 더 효과적이겠군요.”
“자네들도 이 생각에 동의하는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편이 좋겠군요.”
“그럼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하지. 그대들이 주도적으로 무엇을 적을지 요구 사항을 적어서 만들어 보게.”
자작의 근처에 있던 하인에게 지시하자, 하인이 필요한 종이와 펜을 준비해 왔다. 테이블 주위에 서 있던 남자들은 그에 맞춰 일제히 다가와 저들끼리 뭐라 떠들며 적을 내용을 고민하고 있었다.
자작은 어느새 그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근처의 하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라가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난감한데…….’
이 계획에서 이들이 목표한 건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가 자작을 통한 직접적인 주동자들의 범행을 밝힐 증거 회수와 참석한 모든 인원을 벌할 명백한 증거의 수집이었다. 이로써 후자는 어느 정도 마련되었지만, 전자의 목표는 요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그것인데 해결이 안 된 셈이었다. 단순히 선동을 하는 것이 제 역할인 사라가, 작전을 지휘해야 할 비비안을 보니 그녀의 눈동자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에 사라는 기대를 포기했다. 분명 아까 전에는 연기만 해 주면 된다고 그러더니, 막상 해 보니까 뭐 준비되어 있는 것도 없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너무 많았다. 완전 사기당한 수준이었다.
‘다 끝나고 나면 보상을 더 요구해야겠어.’
그 삐딱한 공작님이라면 몰라도 비비안이라면 마땅히 더 해 줄 게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쪽에서 오히려 더 해 주려 할지도.’
뭐 신세 지는 게 싫어서니 어쩌니 해서, 먹고 떨어지란 식으로 굴게 분명했다. 사라는 저 멀리서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는 비비안을 안쓰럽게 보았다.
‘본인 성격이 나쁜 건 아닌데, 어쩌다 그런 인간한테 찍혀서는…….’
물론 두 사람이 서로 좋아했지만, 사라는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생각했다. 사라가 보는 비비안은 하도 맹하고 순진해서,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가 있다면 저도 모르게 휩쓸려 갈 것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아까만 봐도 그랬다. 고작 좋아한다는 말을 안 해도 되는 거냐고 걱정하던 모습을 보면 그리 과한 생각은 아니지 싶었다. 분명 그 공작은 이미 비비안이 자기한테 다 넘어왔다는 거 눈치채고 있을 텐데,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걸 보면 좀 안쓰럽기도 했다.
‘그게 다 속이 음흉한 사람한테 찍혀서 그렇지 뭐…….’
원래 귀족들은 다 음흉하다고 하지만, 뭐랄까 그 공작은 좀 더 그래 보였다. 애정 행각 하고 있는 걸 방해했다고 노려본 것도 그렇고.
물론 공작이랑 서로 마음도 통했고, 남자가 집착하는 걸 봤을 때 결혼할 게 뻔했으니, 미래의 공작 부인이 될 테니 따지고 보면 진짜 불쌍하기만 한 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성격이 그 모양 그 꼬라지인 남자와 평생을 같이 살게 되는 거 아닌가. 또 귀족 부인들의 삶을 보면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고.
‘역시, 안됐어.’
약속을 했으니 약속한 만큼만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저런 짠한 모습을 보니 적당히 해야겠다는 마음 대신 제대로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사라가 혼자 마음속으로 비비안에 대한 인상을 정리한 뒤 새롭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도와주자. 좀 귀찮긴 해도…….’
“자작님.”
별다른 증거가 없다는 말에 다시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 우왕좌왕하며 또 저들끼리 싸우는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사라가 이야기 했다.
“자작님. 솔직히 말해 주세요.”
“……뭔데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