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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짝사랑 1권
지은이 : 봄마실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봄마실, 2025
※ ISBN : 979-11-7408-160-5
※ 가격 : 4,000원
※ 발행일 : 2025년 06월 17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1.
약 일주일 전, 안젤리나는 언제나 그랬듯 첫째 언니이자 제국의 충성스러운 기사인 레아의 도움으로 황궁에 들어갔다.
황궁의 경비를 맡은 기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경계를 늦추지 않아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쉽게 출입할 수 없었지만. 
안젤리나는 그 특유의 친화력과 순진한 얼굴로 종종 레아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문서가 있다며 다른 이들보다 쉽게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제법 황궁의 경비들과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가벼운 안부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사건이 터진 그날도 안젤리나는 막 입궁한 참이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잔뜩 구겨진 문서 종이를 손에 쥔 그녀는 황태자 친위대인 ‘창공의 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으로 있는 레아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는 대신, 은근슬쩍 다른 길로 빠졌다.
그러곤 이제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신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전하께서는 멋지시겠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늠름한 얼굴과 특유의 차가운 미소! 자신을 보며 비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촌철살인의 화법! 상상만으로도 황홀했다.
안젤리나는 붉어진 볼을 감싸 쥐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평소에는 황태자의 궁인 장미궁에도 빼곡히 줄지은 친위대가 서 있는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단 한 명의 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아 물론, 줄지어 서 있어도 그녀는 제재를 전혀 받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한 번쯤은 의심해 볼 상황이었지만 안젤리나는 곧 마주하게 될 얼굴을 생각하느라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안젤리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커다랗고 넓은 화원이 나올 터였다. 
그 화원은 평소 황태자가 좋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따금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그곳에서 쉬곤 했다.
그가 아끼는 곳이기에 안젤리나도 이 궁에서 그곳을 가장 좋아했다. 심지어 그는 별채에 있는 정원을 이곳과 거의 흡사하게 꾸몄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잠시 심호흡을 한 안젤리나는 자꾸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의 남자가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왠지 오늘따라 더욱 눈이 부신다고 생각하며 안젤리나는 황홀함에 젖은 얼굴로 볼을 붉혔다.
‘어쩜 찻잔을 드는 것도 저리 멋지시지?’
그러니 자신이 안 좋아하고 배겨?
그러나 그 순간, 안젤리나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황태자가 자신을 향해서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밝은 미소를 맞은편의 누군가에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통 그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의 앞에는 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여자가.
‘대체 누구지?’
익숙한 뒷모습을 보며 누군지 가늠하던 안젤리나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여자가 순간 뒤로 고개를 돌렸다. 황급히 몸을 낮추고 고개를 집어넣은 안젤리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는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금발에 분홍빛 눈동자. 같이 황립 아카데미에 다니는 베르첼 나르벤이었다. 그녀는 제국의 7대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나르벤 가(家)의 외동딸이었다.
이렇게 사적으로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였던가?
설마 그보다 더한 관계인 걸까. 안젤리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초조해졌다.
그런 마음에 더욱 불을 붙인 건 순간 나타난 황태자의 웃음과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다니까요.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나한테는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었으면서. 안젤리나는 우울함을 느꼈다. 
보답을 바라고 그의 곁을 맴돈 것은 아니나, 아주 조금의 관심은 얻고 싶었다. 나한테도 좀 웃어 주면 좀 좋아?
저 자리에 자신이 있을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뒤돌 수밖에 없었다.
큰언니에게 건네 줄 가짜 문서인 백지 봉투를 품에 끌어안은 채 안젤리나는 되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날 보면 매일 짜증만 냈으면서 어째서….’
늘 그렇게 대접받고 살아와서 그런 걸까? 안젤리나는 황태자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그의 행동에 서운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무척 서운했고, 서러웠으며, 가슴이 아팠다. 
베르첼이 예뻐서 그런 걸까. 물론 자신은 베르첼보다 키가 10cm나 작으며, 제국 제일의 미녀라는 공녀와 달리 평범한 외모였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감 하나 빼면 시체로 살아왔는데 그 자존심도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안젤리나는 한없이 우울해졌다.
“…응?”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안젤리나는 문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정말 몸이 온통 까만 게 까마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참새 한 마리가 바닥에 쪼그리고 있었다.
그것도 까만 참새.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걸어가며 참새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작고 까만 참새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모양인지, 안젤리나가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몸을 피하거나 날아가지도 않고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대로 무시해 버렸다.
까만 참새는 얼마나 예민한지 손을 뻗어 몸을 만지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서 그 둥글고 까만 눈을 굴리며 안젤리나를 노려보았다.
몹시 귀찮은 듯 뒤뚱거리며 완전히 몸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안젤리나는 히죽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이 작은 새가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눈앞에 있는 커다랗고 높은 장미나무를 올려다본 안젤리나는 저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작은 둥지를 발견했다.
아, 저기에서 떨어졌나 보다.
이렇게 작으니 혼자서 올라갈 수도 없을 터였다. 까만 참새가 안쓰러워진 안젤리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다리를 끌고 와 나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각도를 완벽하게 조절해 제대로 기울인 후, 까만 참새 앞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둥지로 돌려보내 줄게. 손바닥에 올라와 보지 않을래?”
뚱한 얼굴로 안젤리나와 손바닥을 번갈아 보던 참새는 이내 인심 쓴다는 듯 새침한 표정으로 일어나 손바닥에 앉았다.
가만히 참새를 지켜보던 안젤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너도 둥지로 돌아가고 싶었구나? 조금만 기다려. 곧 가족들을 만나게 해 줄게.”
그녀는 참새를 한쪽 손바닥으로 옮긴 후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한 칸씩 밟아 가다 보니 이번에 새로 맞춘 드레스가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쳇. 괜히 예쁘게 하고 왔어.
투덜거리면서도 천천히 올라가 마침내 둥지 안에 참새를 놓아 준 안젤리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까만 참새는 눈을 굴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귀여운 그 모습에 매료된 안젤리나는 검지로 참새의 머리를 살짝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앞으로 조심해야 해. 알았지?”
언뜻 참새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거기 누구십니까?”
“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안젤리나는 순간 발을 헛디뎠다.
그때, 고정되어 있던 사다리가 휘청거렸다.
자꾸만 기울어지는 몸을 바르게 하려고 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래쪽에서 ‘어이쿠, 이런!’ 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사다리 위에서 휘청거리며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이 마치 땅이 몸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빠르게 추락했다. 
떨어질 때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경악하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장미궁의 정원사 하들러 씨였다. 검술학부의 학생으로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안젤리나는 민첩하게 몸을 돌려 착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이 땅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 그만 그대로 미끄러져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아파!’
“괘, 괜찮으십니까?”
지금 이게 괜찮아 보이나? 안젤리나는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에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으로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까만 참새가 잡혔다.
‘어…. 떨어진 걸까?’
자신이 추락할 때 같이 떨어졌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참새가 그녀의 눈앞에서 발을 굴리는 게 보였다. 그 부리를 계속해서 움직이는데 마치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뭐? 말을…. 응?
‘…….’
분명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안젤리나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곧 암흑이 찾아왔다.
***
뒤통수가 왠지 얼얼했다.
왜 아프지?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누가 세게 때리기라도 했나?
영문을 알 수 없어 머리를 붙잡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옆에서 쯧쯧거리며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내 모습이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아니, 잠깐?
혀 차는 소리?
‘뭐지?’
옆에 누가 있는 건가? 기묘한 감각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초점이 잡히는 시야에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장을 향했던 시선을 내리자 누군가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다.
눈만 보인 채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남자. 그것도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였다! 나는 낯선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으악!”
“…….”
누군가 내 침실에 있었다.
그것도 내가 누운 침대 옆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진심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가슴께까지 내려간 이불을 끌어다가 다급히 얼굴을 가렸다. 
이불로 얼굴을 가린 채 숨죽이고 있는데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결과물들에 부끄러운 건 둘째 치고, 성질이 확 올라왔다.
그럼에도 나는 꾹 그것들을 애써 눌러 담았다.
 ‘언제나 레이디의 교양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신신당부하던 예절 교사 페인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는 지금 여기서 화를 내면 안 된다.
교양 있고 단정한 레이디들처럼 우아하게 일어나 ‘누구시기에 제 침실에 계신 거죠?’라고 물어야 한다.
한참을 그러고 이불속에 파묻혀 있으려니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던 심장박동도 어느새 본래 속도를 찾았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이불 밖 상황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람이 그곳에 존재한다면 작은 숨소리라도 들려야 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실로 난감했다.
확인해 보려고 이불을 걷자니 그곳에 여전히 남자가 앉아 있어 눈이 마주치면 당황할 테고, 그럼 나는 또 이상한 소리를 내지를 테지.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언제까지 이불속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건가 싶은 답답함이 밀려왔다.
‘대체 누구기에 내 침실에 있는 거지?’
언니들이랑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갈등을 빚던 마음은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이불을 아주 조금씩 내리며 침대 구석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물렸다. 
조금씩 내려가던 이불은 내 눈만 겨우 드러나는 지점에서 멈췄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어두운 인영이 보였다.
그래. 그곳에 아직 사람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다급히 눈알을 굴리는데, 아뿔싸!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서늘한 벽안이 나를 노려보자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입안이 바짝 말라서 그런지 목이 뜨끔했다.
어쩐지 그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어서 시선을 조금 내리자 남자가 쥐고 있는 푸른빛의 돌이 보였다. 자세히 살피니 그건 그냥 평범한 돌이 아니라 ‘침묵의 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