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검은얼굴 미국의사 05권
검은머리 검은얼굴 미국의사 05권
검은머리 검은얼굴 미국의사
05
세상밖으로
검은머리 검은얼굴 미국의사 05권
차례
Chapter 01. Man the Hospitals
Chapter 02. 노예 해방선언
Chapter 03. 사자 사냥
Chapter 04. S―G takes command
Chapter 05. Make South Howl
Chapter 06. 해방을 위한 동맹
검은머리 검은얼굴 미국의사 05권
Chapter 01. Man the Hospitals
[육군의 거인, 사망하다!]
[혼란에 빠진 군 상층부… 장성진 연이어 사망, 사임]
21세기의 세계 최고 군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이 시기 미군은 정말로 작고 허접하기 그지없는 조직이었다.
국부인 조지 워싱턴이 중장 계급에 머무른 걸 기념? 하는지, 육군의 최고 계급은 소장(Major General)이고, 그마저도 총사령관인 윈필드 스콧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나마 준장(Brigadier General) 이 몇 사람 있긴 했는데 과반수가 1812년 미영전쟁 참전용사들일 정도로 틀… 그래, 틀딱들이었고.
그런데 이 중에서 멀쩡한 인간이 없었다.
늙은 윈필드 스콧은 수술대에서 죽었다. 그 사람을 죽게 만든 토마스 로슨 의무사령관(임시준장)은 결국 책임을 통감하며 사임했다.
다른 장군들? 윈필드 스콧이 후임으로 지명한, 유능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조셉 존스턴 대령과 로버트 리 대령은 둘 다 남부 반란군에 가담했다더라… 준장들도 몇 사람은 남군에 가담했고.
“그럼 누구를 사령관으로 올린대요?”
“…나도 모르지. 다들 너무 늙었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던데.”
늙어서 낙마했다가 사망한 윈필드 스콧을 보고서 호호백발 노인들을 총사령관 직에 올릴 수는 없다.
그런데 나머지 장군들은 오히려 윈필드 스콧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나마 젊은… 50대 후반의 퍼시포르 스미스 서부군관구 사령관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전역 청원을 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루이지애나 출신이라 정치인들의 의심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았고.
준장 계급의 장군들이 다 하나씩 결격 사유가 있는 가운데, 대령들 중 사령관으로 물망에 오른 사람은 바로 에드윈 섬너(Edwin Vose Sumner, 1797―1863). 바로 지팡이에 얻어맞아 전쟁의 도화선이 된 찰스 섬너 상원의원의 오촌 당숙 되는 사람이었다.
신임 사령관 지명자로, 매일 수십, 수백 명이 몰려드는 군 병원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오촌 조카, 섬너 의원과 같이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찾아온 사령관은 60세의 나이에도 기운이 넘쳐 보였다.
조금 많이, 넘쳐 보였다.
“여기가! 그 유명한 병원인가!! 자네가 치료를 받았다는?!!”
“예, 그… 그렇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리고 탄환이 머리를 맞추고도 튕겨나왔다는 전설적인 일화 덕에 황소(Bull), 황소머리(Bull head)라고 불린다는 에드윈 섬너 사령관은 청력이 안 좋기라도 한지 평소에도 고함치는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듯 하였다.
머리가 울리는지, 본인도 과격한 발언과 커다란 목소리로 유명한 섬너 의원이 이마를 찌푸리며 반응할 정도로.
‘저것도 저 집안 유전인가? 아니, 생각해보니 브라운 집안도….’
어쩌면 두 집안이 혈연관계가 있을지도? 노예해방에 대한 강성한 신념이나, 풍성한 수염과 큰 목소리… 같은 망상을 하다가, 사령관이 내게 불쑥 손을 내밀고 흔들자 나도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말았다.
콱 잡는 손아귀 힘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늙어서 말도 못 탈 정도로 허약해진 윈필드 스콧에 비해, 그래도 열 살 정도 젊은 나이라 그런가?
“고맙네! 선생이 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이렇게 훌륭하고 거대한 병원을 기탁해준 것도 그렇고!!!”
“예,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대통령님과 전쟁부 장관님은 선생을 의무사령관으로 올리고 싶어 했으나!!! 안타깝게도 너무 젊다는 여론과….”
이 아저씨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니, 당연히 유색인종이라서였겠지. 하지만 너무 젊다는 것 하나로도 사실 충분한 핑계가 될 만 했다.
그 속에 든 영혼의 나이까지 합치면야 이 아저씨들하고 비빌 만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없다. 1832년생, 지금이 1857년이니까 스물 다섯. 의사 경력도 사실 몇 년 안 된다. 이러면 유교스피릿이 내 안에 숨쉬는 K―사나이로서는 수긍해줄만한 핑계다.
아무리 이 시대 평균연령이 젊은 축이라 하여도 스물 다섯살에 준장계급 장군? 그것도 야전 지휘로 전공을 증명한 것도 아닌데? 스물다섯이면 사관학교 졸업생 기준 중위 정도나 달고 있을 나이니까 오케이. 이 정도면 패스다.
“그래서!! 선생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을 의무사령관에 올리고, 병원의 확장을 감독하도록 하려 하외다!”
“어, 어느 분을…?”
“루돌프 피르호 박사!! 선생을 의무사령관에 임명하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소?!!!”
“!!!”
내 옆에서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고 있던 교수님이 커억, 하면서 커피를 뿜었다. 그런데, 이게 또 나쁜 인선이 아니다.
“교수님, 수락하시지요?”
“아니, 자네를 제껴 두고 내가?”
“병원 설립과 운영은 교수님이 또 많이 기여하셨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교육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거고요.”
“그건 그렇다만….”
의대 교수 출신이고, 존스 홉킨스 병원과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새로운 인력들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데 주력해온 교수님이라면 의무사령관 직을 받아도 괜찮을 거다. 독일계 이민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이라는 핑계로 야전 장군자리로 보내는거보다야 훨씬 더 좋은 선택이겠지.
“수락하시겠소?!!”
“제 부족한 능력으로도 이 시국에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피르호 교수님은 눈을 지긋이 감더니, 섬너 장군의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그 사이에 잠시 끼어들어 내가 하고싶었던 제안들을 끼워넣었다.
“일단 의약품 공급의 표준화와 의료인력 평가기준의 확립, 환자분류 프로토콜 및 군진 위생관리에 대한 지침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사령관님이 보고 검토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초빙해오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협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게 낫지. 뭣하러 감투를 받아들어 공격의 대상이 되는가? 어차피 미합 중국은 아직 젊고 시스템이란 게 정착되지 않은 나라. 감투 없이도 돈으로, 그리고 인맥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오, 어떤 분인가?”
“이 분이 말이지요…?”
* * *
“먼저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군의관들은 다음과 같은 표준적인 시험을 통과하고 기량을 증명하여야 하며….”
“!!! 말도 안 되오!”
미개의 시대 19세기, 야만의 나라 미합 중국. 나는 아직도 이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 고향 오하이오 깡촌의 칠링워스 선생처럼, 제대로 정규 교육을 안 받았다고 공언하고 다니면서도 멀쩡히 의사노릇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군의관은 꼭 정규교육을 받은 의사여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애초에 로슨 사령관 이전 의무대장들은 정규 임관을 거쳐 군 계급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최초로 군 계급을 받은 게 로슨 사령관 본인이라나?
그리고 그 양반마저도 딱히 어느 대학을 나와 의사 면허… 아니지, 이 경우엔 면허란 표현이 적절치 않으니 ‘자격’ 을 취득한 게 아니라 동네 의사들 밑에서 어깨너머로 의학을 배우다 군의관 조수로 입대한 거라더라.
하여 교육을 필수화시키고, 필요한 지식을 묻는 시험에 통과한 자들만 군의관 자리에 임명, 혹은 유임시키겠다는 방침에 기존의 늙은 군의관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여러분들의 경력을 인정하여 재교육을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퇴역 처리될 것입니다. 이는 전쟁부 장관과 대통령이 인가하신 사항이며….”
“우리 같은 의사도 없이 전쟁을 치르시겠다고? 하! 말이나 되는 소릴 하시오!!”
“오, 왜 의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지요? 그 다음 페이지를 넘겨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이보다 더한 게 있으려고? 라고 이야기하며 페이지를 넘긴 사람들의 눈이 충격으로 휘둥그레해졌다.
“임, 임관에… 제한이 없어? 스물두 살 이상과 2년의 교육, 시험 통과?”
“이건 저, 저 검둥이도 장교가 될 수 있단 소리 아니오? 아니. 잠깐만… 심지어 계집들도??”
“여러분들조차 통과하지 못할 시험을 통과한, 그런 훌륭한 인재라면… 아니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쩍 벌린 자들. 그들 중 몇은 이런 꼴을 볼 줄 알았다면 남군에 가담하는 건데―라며 중얼거리는 자도 있었다. 저런 반란군노무 시끼들 같으니라고.
이외에도 상설 국군 병원의 설치, 임의로 약품 조제하는 관행의 폐기, 물과 의복 소독 지침 확립 등이 있었지만 앞의 것만큼 충격이 강하지는 않았다.
“쯧, 쯧, 쯧. 역시 사내들이란.”
“그러는 저 지침을 만든 것도 남자들이긴 한데요….”
“선생들은 여느 사내들과는 다르지.”
저기요, 그러면서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같이 중얼거리면서 절 바라보진 말아 주실래요? 저는 유부남인데… 차라리 피르호 교수님은 어떠신지? 슬프게도 아직 솔로신데. 그나마도 이 분보다 한 살 연하이긴 하였지만.
새로이 창설된 미군 의무사령부 간호부장이 된 매의 눈을 한 노처녀… 아니, 크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대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가르칠 사람들과, 예산이며, 이 모든 물자라니! 나는 세상에서 대영제국이 제일 부유한 나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변방 미국도 제법 괜찮군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체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는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끝난 크림 전쟁의 영웅,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영국 귀족 가문의 여식이요, 제법 사회적 인정과 명망도 획득한 그녀를 움직인 것은 바로 우리가 한 약속이었다.
‘세계 최대의, 전례 없는 간호학교를 지어 주겠다!’
‘우리는 병원 시스템을 혁신하고자 한다. 개혁안을 위해 선구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앞으로 숙련된, 교육받은 인력의 수요는 폭증할 수밖에 없다.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워낙에 미충족 의료 수요가 많았으니. 당장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면 의사 얼굴을 평생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가득했다!
그러기 위해선 인력을 길러낼 교육체계가 필요했고, 크림 전쟁으로 유명해진 나이팅게일이 명성을 이용해 기부금을 한 푼 두푼 모금해서 간호학교 설립을 하려 한다고 듣고 바로 현찰 박치기를 해서 데려왔다.
아무튼 군의관들은 육군 총사령관에게, 그리고 전쟁장관이나 심지어는 대통령에게 항의를 하려 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에드윈 섬너 사령관 선에서 컷 당했다고 한다.
“당신네들이 내 오촌 조카를 못 살릴거라고 했다면서!!! 대통령 각하가 총에 맞았을 때 살려 놓기까지 한 저 선생들보다 당신네들이 뛰어나다고?? 그럼 낙마한 윈필드 스콧 장군은 왜 못 살렸는데!!!!”
“그리고 퇴역하는 건 선생들의 자유지만, 반란군에 가담하겠다는 말들은 주의들 하시오. 반역자들에겐 오직 가혹한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8만 명의 군대를 준비해 매너서스를 찍고 리치먼드로 진격하겠다는 섬너 사령관에게, 후방의 지원세력 확장을 방해하는 소리들은 오직 귀찮은 잔소리에 불과했다.
거기에 더해 전쟁부 장관의 군의관들에 대한 따끔한 훈계, 그리고 전폭적인 정치권의 지원까지. 그의 앞길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 * *
“그렇게나 많은 의료 인력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건 너무 과한 조치 같습니다.”
“의료 인력을 한 번 가르쳐 두면 앞으로 계속, 국민들을 위해 일할 텐데 이 나라 국민의 건강과 복리를 향상시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조치입니다.”
“연방정부가 왜 굳이 그런 일을….”
미국에는 크게 두 조류의 정치세력이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론자와, 그에 대항하는 주 단위의 지방자치론자들. 링컨과 공화당 급진파들은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해당했고, 반대로 민주당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들 중 과격론자들이 남부 주들을 이끌고 떨어져나간 지금, 견제세력이 줄어들고 강력한 권한을 손에 쥔 행정부는 중앙집권적 조치들을 밀고 나갔다.
예컨대, 의무사령부의 확대와 연방군 예하 대규모 의료인력의 양성 같은.
평소라면 의료인력 양성? 그건 주 단위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 같은 소리를 할 사람들은 ‘전시니까’ 라는 핑계 하에 결국 그런가 보다 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가끔 그렇게 많이 의사와 간호사들이 필요하냐고 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제기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리도 이걸 노리고 의사 인력 확충을 추진한 건 아니오만….”
몇몇 생각없는 자들이 ‘이런 사태를 대비하여 의료시설과 인력을 확충한 링컨의 혜안’ 를 칭찬할 만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자들은 ‘링컨이 그 정도 혜안이 있었더라면 이 사태를 일으켰겠냐?’ 라고 평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비웃을 정도로 슬퍼하지 않는 자들은?
“섬너! 섬너! 내 군단을 돌려다오!!!”
링컨이 백악관에서 그렇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는 농반 진반의 증언들이 속출했다.
그리고 우리는 밀려오는 환자들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 * *
에드윈 섬너 사령관의 계획은 간단했다.
“우리 쪽이 훨씬 더 병력상 우위를 차지했다! 저 놈들을 짓밟아 버릴 때다!!”
석 달 정도 걸려서, 그가 원하던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했다. 그에 반해 각 주들의 자치권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킨 저들은, 북부보다 병력을 모으고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속도가 느렸다.
조밀한 철도는 인구가 밀집한 지역들에서 신병들을 빠르게 실어날랐다. 쌩쌩 돌아가는 병기공장들! VnG 사의 젊은 천재가 만들어낸 그 혁신적인 공장 구조는 수만 명의 장병들을 입히고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데 성공했다.
섬너 사령관의 손에는 미국 역사상 그 어떤 장군보다도 많은 병력과 대포가 쥐어져 있었다. 정찰에 따르면, 요새화된 리치먼드 전방을 지키는 반란군의 병력은 추산하기로 약 2만여 명.
네 배나 되는 병력상의 우위. 그리고 그의 맘에 쏙 든 프리덤―75 속사포의 화력.
저 앞을 막아선 기묘한 쇠덤불 같은 물건이나, 땅굴을 파고 머리만 쏙 내민 채 땅땅 총을 쏘아 대는 딕시 반란군들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기병장교 출신답게 거대한 흑마 위에 올라타 전군을 호령한 총사령관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군도를 뽑아들고 전방을 겨누었다.
“포격 후 돌격한다!!! 빠르게 이 전쟁을 끝내고, 부활절 만찬은 집에서 즐기도록 하자!!!”
“와아아아아!!!”
육백 문에 달하는 포병대가 포격을 가하고, 그 뒤로 기병이 돌격해 만신창이가 된 방어선을 짓밟고, 그 뒤로 다시 보병이 치고 들어가 완전히 제압한다. 교과서적인 전술이었다.
다만 이제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때가 왔음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을 뿐.
작렬탄 포격을 수백 문의 대포로 가하기는 하였으나, 철조망 방어선을 걷어내진 못했다. 참호 속에 숨은 병사들은 별 피해도 없이 다시 총구를 내밀고, 포격에 의해 진창이 된 전장을 넘어오는 기병들을 칠면조 사냥하듯 도살했다.
“제기랄, 후퇴! 후퇴하라!! 이봐!! 명령이 안 들리는 거야?!”
“뒤로 빠지라고!! 진격할 수가 없어!!”
선두 제대가 철조망에 뒤엉킨 채 무력화되는 걸 본 후속 제대들이 후퇴하려 했으나, 전선에 축차 투입되는 병력들은 신속한 후퇴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멋모르고 발맞추어 진격하는 보병과, 후퇴하려는 기병들이 뒤엉킨 위로 북군의 포격을 피해 숨어 있던 남군 포병대의 포격이 쏟아졌고.
아수라장이 된 전장에서 허우적거리는 병사들은 결국 용기백배해 참호선 뒤에서 뛰쳐나온 남군 병사들한테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그들을 지휘해 질서정연한 퇴각을 명령해야 할 섬너 사령관 본인도, 연대장 시절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기병대와 함께 돌격하다 저격수에게 사망해 버렸고.
이 참사를 수습할 수 있던 것은, ‘검둥이들에게 이 쉬운 전투의 전공을 넘겨줄 수 없다’ 며 최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유색인 부대였다.
“저걸 졌다고? 우리 병력이 네 배라면서??”
“쟤들이 왜 도망쳐 오는거지? 설마? 우리가 졌어??”
“헛소리 말고 전투 준비해라!! 우리가 여길 지켜야지만 우리 전우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개자식들. 거들먹댈 때는 언제고.
그렇게 악동들 처럼 중얼거린 유색인 병사들은 총칼을 쥐고 씨익, 흰 이빨을 드러내보이며 미소지었다.
총사령관이나, 공화당의 입맛에 맞추어 발탁된 최고급 장성진들은 그렇지 않았다만 대부분의 백인 북군 병사들은 여전히 ‘검둥이들’ 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예제는 사악한 제도지만, 그렇다고 저 놈들이 완전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냐?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일부 병사들이 그런 태도들에 반감을 품기는 했을지언정, 노예제 해방의 성전에서 등돌려 걸어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