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1장 암살자 (2)
2장 종업식
3장 오리엔테이션
4장 금서
5장 각성
6장 계략의 도시
7장 파티장의 신경전
8장 대표전 (1)
1장 암살자 (2)


“에리올,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케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네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준다고?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방금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트리거 가문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야. 애초에…….”
그렇게 말하던 케인이 흠칫했다.
“너 설마, 나한테 트리거 가문을 배신하라는 거야? 더 이상 못 해 먹겠다고 연락한 뒤, 아카데미에 모든 걸 밝히고 투항하라고?”
“아니, 조금 달라.”
만약 그런 짓을 하면 트리거 가문에서 케인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 심층부에 가둬 놓고 있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암살자를 침투시켜 케인을 숙청할 가능성이 높다.
“트리거 가문에는 앞으로도 계속 임무를 수행할 거라고 연락하면 돼.”
“뭐?”
“너는 원래 계획대로 원리과에 들어가 카이셀 숙부님 곁에서 머무르면 되는 거야. 카이셀 숙부님을 암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
케인도 슬슬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눈치챈 모양이다.
“트리거 가문을 속이라는 거야?”
“그래, 어차피 너한테는 시간이 있잖아. 3학년 말까지 네가 숙부님을 죽이지 못해도 트리거 가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어차피 트리거 가문도 케인 한 사람만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살아가는 거야.”
“젠장, 그만해!”
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난 카이셀 교수님을 죽이려고 아카데미에 침투한 암살자야! 내가 다른 애들과 어울리며 계속 학생처럼 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감옥에 처박혀 있어야지!”
“글쎄, 그건 카이셀 숙부님한테 물어봐야지.”
“뭐?!”
나는 카이셀에게 시선을 향했다.
“숙부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말이냐.”
“케인을 눈감아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 말을 듣고 케인이 숨을 삼켰다.
“케인이 트리거 가문의 암살자였다는 사실을 아카데미에 알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냥 원리과에서 계속 학생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렇게 하면 나한테는 무엇이 이득이지?”
“케인 트리거를 써먹을 수 있게 되죠.”
카이셀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언젠가 시작될 트리거 가문과의 싸움에서 말입니다.”
그렇다.
트리거 가문이 황금십자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드러난 이상, 아카데미는 트리거 가문과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황금십자회는 아카데미의 숙적 중 하나죠. 요새 점점 꼬리를 드러내고 있으니, 머지않아 아카데미는 황금십자회 섬멸에 나서게 되겠죠?”
“…….”
“그러면 트리거 가문과도 정면에서 충돌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로렌초 토스카나와 접촉한 정황도 확보했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케인을 힐끔 쳐다봤다.
“그때 케인이 트리거 가문을 배신하고 아카데미의 힘이 되어 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 잠깐.”
케인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내가 아카데미를 돕는다고 해도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못해. 신기루 아성까지 안내해 줄 수도 없다고.”
“아니,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어.”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카이셀 숙부님이 트리거 가문과의 전쟁에 나서면 트리거 가문도 너를 재촉하지 않겠어?”
“……!”
계획을 변경하여 카이셀 발렌시아를 지금 당장 암살해라.
그렇게 재촉하기 위해 케인과 접촉할 가능성이 높다.
“놈들의 정보를 얻어 낼 수도 있고, 빈틈을 만들 수도 있어. 너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는 아주 유용한 카드가 되는 거지.”
“…….”
“네가 비밀만 지켜 주면 돼.”
그동안 케인은 우리를 완벽히 속였다.
케인이 마음만 먹으면 트리거 가문을 속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가요, 숙부님.”
“그럴듯한 얘기군.”
카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제안이다.”
“다행이네요.”
“……!”
카이셀의 긍정적인 대답에 케인이 눈을 크게 떴다.
“케인 트리거,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해라.”
“교, 교수님…….”
“트리거 가문을 배신한 채 원리과 학생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암살 미수범으로 아카데미 지하에 갇힌 채 여생을 보낼지 말이다.”
“……!”
카이셀은 오래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지금 여기서 케인이 대답하는 걸 원하고 있었다.
“만약 네가 원리과 학생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너를 차별 없이 학생으로서 대우할 것이다.”
“교수님…….”
“나중에 트리거 가문이 진실을 눈치채고 너를 제거하려 해도, 너는 원리과 학생으로서 보호받을 것이다.”
“……!”
이렇게 믿음직한 말이 어디 있을까.
케인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에리올이나 다른 녀석들하고도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겠지.”
“……!”
카이셀의 말에 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표정만 봐도 그동안 케인이 얼마나 마음속으로 고뇌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결정해라, 케인 트리거.”
“저, 저는…….”
케인이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다.”
카이셀은 짧게 대답하면서 케인을 내려다봤다.
“네가 트리거 가문의 암살자였다는 사실은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지워 두도록 하지.”
“…….”
“내년부터 원리과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해 학업에 임하도록 해라, 케인 트리거.”
그렇게 말한 뒤 카이셀은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겨울 방학에는 다른 약속을 잡지 마라. 오리엔테이션이 있으니까.”
그 말을 남기고 카이셀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나와 케인, 두 사람만을 남긴 채.

* * *

초겨울 밤바다는 바람이 차가웠다.
케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
“가자, 케인.”
나는 케인에게 손을 뻗었다.
평소와 별 차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일은 사령과 실습 마지막 날이잖아. 과제 제출할 것도 남았는데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야지.”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모범생이네.”
케인이 투덜거리면서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바로 인상을 찡그리며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왜 그래?”
“아니, 네가 아까 카이셀 교수님하고 연계해서 공격한 것 때문에…….”
“부축해 줄까?”
“됐어.”
케인은 어색한 자세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케인과 함께 걸었다.
“안 그래도 시합 때문에 땀을 흘렸는데, 바닷가에서 뒹굴기까지 했으니…… 들어가서 목욕부터 해야겠어.”
“지금 시간에 목욕해도 되나?”
“글쎄, 지금이 몇 시인지 모르겠네.”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해 두는데 말이야, 에리올.”
“응.”
“처음에 말을 걸었던 건 네가 카이셀 발렌시아의 조카였기 때문이지만…… 그 이후에 너하고 친해진 건, 그거하고는 관계가 없어.”
“그래.”
“네가 하는 짓이 재미있어서 자꾸 알짱거렸던 거야. 오해하지 마.”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