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가에서 눈을 뜬 소드마스터 02권
암흑가에서 눈을 뜬 소드마스터 02권
암흑가에서 눈을 뜬 소드마스터
02
동경
암흑가에서 눈을 뜬 소드마스터 02권
차례
Chapter 01.
Chapter 02.
Chapter 03.
Chapter 04.
Chapter 05.
암흑가에서 눈을 뜬 소드마스터 02권
Chapter 01.
연무장 뒤에 세워진 기사식당.
줄 맞춰 놓인 나무 테이블에는 옹기종기 모인 기사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바토니와 유타, 로비아 백작도 함께였다.
비록 대련 결과가 처참하긴 했지만, 식당에서만큼은 왁자지껄하고 활기찼다.
“평소에도 분위기가 이렇습니까?”
바토니가 수프에 적신 통밀빵을 씹으며 물었다.
“대체로 그런 편이야. 잘 먹고 잘 쉬어야 뭐든 할 수 있는 거니까.”
“나쁘지 않네요.”
원래는 대련이 끝나자마자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비아 백작이 워낙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늘 기사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고 했다.
“결속력이 좋아 보입니다. 단장부터 단원들까지 모두 다.”
“실력이 떨어지면 조직력이라도 좋아야지.”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한계를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죠. 다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그동안 기사단의 성장을 위해 적당한 스승을 수소문해 왔다고.
문제는 가문의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부터 젓는다는 것이었다. 얼마를 제시하든 결과는 같았다.
“아니, 돈만 받으면 되지. 뭐가 중요하단 겁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유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아버지 대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몰락했어. 끝까지 의리를 지켜준 가문들 덕분에 멸문은 피했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아. 세대가 바뀌면서 그 고리도 다 끊어졌거든.”
“아버님께서 대체 무슨 일에 엮였길래요.”
“반역에 가담했다는 누명이었어.”
“……예?”
유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역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알베르토 가문은 오래전부터 고리대금업을 해왔어. 덕분에 비축한 재산도 상당했고, 그게 곧 가문의 힘이었어. 문제는 아버지께서 이자율을 너무 낮춰버렸다는 거야. 오랜 전쟁에 지친 제국민들이 안타까웠던 거지.”
로비아 백작은 아련한 눈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여러 가문의 반발을 샀고, 결국에는……. 아버지께서 처형되자마자 이자가 상승했으니 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거야. 황궁에서는 반역과 관련해서 이름만 언급돼도 모조리 처형해 버리니까.”
제국이 덩치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늘어난 귀족들. 황실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반역’이라는 이름이 정치적 도구로 악용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미 지나간 역사가 그랬고.
한 사람의 죽음으로 여럿이 이득을 볼 수만 있다면 명분은 충분했다.
유타가 물었다.
“복수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을 마시던 로비아 백작이 실소를 흘렸다.
“큭, 내가 미쳤냐? 그나마 남아있는 식구들까지 다 죽일 일 있어?”
“그럼, 기사단은 왜 키우는 겁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그런 가문의 기사단에 제 발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니. 아버님께서 정말 좋은 분이셨나 봅니다.”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로비아 백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맞아. 다들 아버지 덕분에 풀칠하며 살아왔지. 좋은 일을 많이 하셨거든. 이젠 기억도 안 날 만큼 희미해졌지만.”
얼음에 희석된 위스키를 넘긴 그가 쓰게 웃었다.
바토니는 로비아 백작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격식도, 허물도 없이 한량처럼 굴고 있지만 정작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토니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정치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기도 했고.
제국의 칼이 되어 음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게 있다. 사소한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누군가의 목을 옥죄이는 사건들.
정치란 그런 것이었다.
전생의 그는 그러한 싹을 찾아내 뿌리째 자르는 작업을 했다. 그것이 곧 황실을 위한 일이자, 황제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만약 로비아 백작이 재기를 꿈꾼다면, 그리고 알베르토 기사단이 그의 작은 눈덩이라면, 앞으로 어떻게든 바토니를 붙들어 두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하지만 바토니는 깊이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아카이아에 오랫동안 머문다면 또 모를까. 그는 다음 주가 되면 오스카 제국을 떠날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럴듯한 사연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어지지 않는 점을 억지로 연결할 필요는 없다.
“바토니.”
“말씀하십시오.”
“이제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거야. 그렇지?”
“어느 정도는요.”
“그럼, 나도 좀 들어야 하지 않을까? 네 정체까지는 묻지 않을게. 대신, 아카이아에 온 이유 정도는 듣고 싶어. 앞으로 뭘 할 건지도.”
그릇을 깨끗이 비운 유타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도 모르는 걸 들으시려고…….”
“모른다고?”
“예.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유타는 그 말을 끝으로 빈 접시와 함께 일어섰다.
테이블에는 바토니와 로비아 백작만 남았다.
“유타가 한 말, 사실이야?”
“아마도요.”
“그럼, 대체 왜 너랑 같이 다니는 거야?”
“단맛만 느끼고 살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글쎄요. 저도 들은 게 그것뿐이라.”
“랄프는?”
“아버지의 피가 흐른답니다.”
로비아 백작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내 냉정을 되찾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거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 때가 아닌 인연은 바람과도 같아서 손으로 쥐려 해도 쥘 수 없다던.”
“좋은 말이네요.”
“기다리겠네. 언젠가는 너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너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거나.”
바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향하는 길이 달랐기에.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생각을 마친 바토니가 일어서려던 그때.
누군가 다급한 표정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알베르토 가문의 집사, 앙드레였다.
앙드레는 어울리지 않게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연신 두드리던 그가 로비아 백작을 찾았다.
“백작님…….”
“왜 그래?”
백작의 눈가에 불길함이 스쳤다. 지금껏 앙드레가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은 아버지가 처형당한 날뿐이었다.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
“저택 앞에 아이작 가문의 기사단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앙드레의 목소리에 짙은 한숨이 뒤섞였다.
“케색 아이작 백작도 함께입니다.”
그 이름을 들은 로비아 백작의 낯빛이 아주 잠깐 사색이 됐다. 기사들의 이목을 고려해 표정을 숨긴 것이다.
“이유는?”
“모릅니다. 무작정 찾아와서는 백작님을 데려오라며 난리입니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불안한 눈동자가 돌아서는 바토니의 뒷모습을 향했다.
* * *
로비아 백작은 기사단장과 앙드레를 대동한 채 저택 앞으로 향했다. 철창처럼 세워진 정문 밖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 있는 한 사내.
케색 아이작.
아이작 백작가의 장자이자, 친우인 척 다가와 모멸감을 안겨주었던 쓰레기 같은 인간.
그 뒤로 보이는 기사단장은, 마치 귀족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로비아 백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 로비아. 어떻게 한 번을 안 찾아오나? 친구끼리 서운하게 말이야.”
비아냥과 비웃음에 찌든 말투가 로비아 백작의 자존심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그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게. 표정을 보니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군. 내 사과하지.”
“우리 사이에 사과는 무슨. 됐네, 이 사람아.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어.”
“그 또한 미안하네. 한데, 연통도 없이 어쩐 일인가?”
로비아 백작은 사과하면서도 가주로서의 체면은 끝까지 지켰다.
그가 뒷짐을 지며 묻자, 케색의 눈가가 살며시 떨렸다.
“우린 아직 풀지 않은 앙금이 있잖나. 친구 사이에 그런 게 남아있으면 곤란하지.”
“앙금이랄 게 있었나…….”
물론 로비아 백작도 알고 있었다. 저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지,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니야. 이 친구들, 밤새 한숨도 못 잤다네. 나한테는 비밀로 하고 오늘만을 기다렸다는데. 가주로서 어찌 무시할 수 있겠나? 정식으로 말하지. 그때 마무리 짓지 못한 대결을 끝내려고 왔네.”
“나도 그러면 좋겠네만, 마침 우리 기사단이…….”
그 순간, 로비아 백작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때마침 휴가를 떠났던 기사에게 닥친 비극. 기사를 가족처럼 아꼈던 그는 망설임 없이 지방 영지로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습격이 있었고, 그 일로 기사단의 절반이 크게 다쳤다. 몇몇은 당분간 혼자서 화장실도 가지 못한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저 인간이 혼자서 벌인 일은 아니겠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더욱이 케색은 상대를 천천히 짓밟기로 유명하지 않나. 놈의 눈 밖에 나면 차라리 제국을 떠나는 게 낫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흠…….”
로비아 백작은 신음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케색은 제국민들의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아이작 기사단이 알베르토 기사단을 꺾었다고.
이건 단순히 가문 간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오스카 제국에는, 예로부터 귀족 가문의 기사단끼리 맞붙어 순위를 매기는 전통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었지만, 사병을 가진 귀족들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끔 경쟁을 유도하는 제도였다.